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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관음사 주지 종하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무재칠시 행하는 당신이 부처의 몸과 마음입니다

바야흐로 봄입니다. 봄은 어디에서 옵니까.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의 ‘봄처녀’라는 노래에서처럼 봄은 저기 동구 밖 봄 처녀의 나물바구니에서부터 오지 않는가 싶습니다. 나물바구니에는 봄이, 희망이, 소박함이, 인정이, 자연이,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나물 캐는 아낙이 짜증을 낼리 없고 증오심을 품을 일이 없습니다. 나물 한 접시면 만족하는 소박함만이 담겨 있습니다. 소욕지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 보다 적은 것과 작은 것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소욕지족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유형 물질만으로는 인간을 만족 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소박한 바구니를 버리고 담고 담아도 채워지지 않으며 만족을 모르는 무한의 궤짝을 차고 살아갑니다.

욕심의 궤짝 짊어진 고단한 삶

요즘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조석지간에 듣는 이야기가 경제대란으로 세계 각국이 동요하고 우리나라와 기업이 동요하며 실직과 폐업으로 가정이 와해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개인의 동요는 범죄로 이어집니다. 서로 도와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으면 동요는 사라지고 경제난도 사라질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속에는 경제난을 극복하는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는 먹고 살만하고 현찰이 수억, 수십억 두둑하니 강 건너 불구경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심하게 말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보살의 길, 즉 보시행만이 경제난을 해결하고 경제난을 넘어 깨달음을 얻는 길입니다. 사회가 편안해지고 나아가 불국토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대란이 오기 전에 소욕지족하고 이웃 간, 국가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보시와 나눔을 일상화했다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저소득 실직 가정을 위한 자비나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비나눔의 생활화가 보살행의 일상이며 부처의 빛을 발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당연한 의무이며 정법입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 행태가 있다고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법시, 재시, 무외시가 그것입니다.
법시란 부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중생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져주는 것입니다. 재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물질로써 도와주는 것입니다. 무외시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과 공포를 주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시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을 갖지 않고서도 일곱 가지의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시(身施)입니다. 이는 육체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노동으로 이웃을 도와주거나 장기기증 등이 포함됩니다. 철로에 떨어지거나 물에 빠진 이를 구해주는 것, 장애인이나 노인의 손을 잡아주고 봉사하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는 심시(心施)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하며 이해하고 서로 상의하여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동식물에까지 자비심을 갖는 보시행입니다.

세 번째는 안시(眼施), 눈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대할 때 온화한 눈길을 주면 이 눈길이 서로간의 벽을 허물고 소통을 이루며 사회를 안정시킵니다.
네 번째는 화안시(和顔施)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의 얼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걸인이 구걸왔다고 화난얼굴하지 말고 누가 내 발등을 밟아도 한번 방긋 웃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질 없어도 보시 행할 수 있어

다섯 번째는 언사시(言辭施)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하듯 상스러운 대화는 결국 제 자신을 망칩니다. 불자는 구업을 멀리해야 합니다. 구시화문이라, 모든 화근은 입을 통해 시작돼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늘 부드럽고 상대를 배려하는 말을 아낌없이 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상좌시(床座施)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버스나 지하철의 자리양보도 해당되며 동료나 상대를 짓누르고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또 법당에 와서는 부처님 앞 중앙에 앉겠다고 다투는 것도 상좌시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빽이나 돈을 써서 승진하는 것도 상좌시에 반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아무리 집을 지어도 집과 방이 모자랍니다. 대통령되는 사람마다 땅을 개발하고 집을 지어도 왜 아파트가 모자라고 방과 집이 모자랄까요. 정부가 재검토해야할 사안입니다.

이렇게 무재칠시(無財七施)를 할 수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육신 자체가 보시의 원천이며 원류이니 우리 마음과 마음이 바로 보살이며 부처님의 몸이며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절에 와서 기도를 하고 때론 수행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불자들은 항상 ‘나는 부족하고 업장과 번뇌로 괴로운 인생’이라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또 ‘나는 공덕이 부족하여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갈구하고 또 그 갈구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불자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흡사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깨진 독에 물을 붓기 보다는 독을 물에 맡기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깨진 독이건 성한 독이건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불신충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님의 깨달음은 나와 더불어 일체 만물에 충만 돼 있습니다. 이것을 절에서는 불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모두 불신이며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공간과 시간, 장소가 불신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에 불신은 충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갈애, 분별, 집착을 갖고 안절부절못합니까. 이것을 놓으면 우리는 진리와 더불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갈애와 집착이 우리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고 끝없는 윤회와 고통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불교는 발상의 전환을 추구하는 가르침이고 여러분은 인식의 전환을 이뤄야 합니다. 왜 스스로가 업보중생, 죄 많은 중생이라며 스스로에게 집착합니까. 거기서 벗어나야합니다. 내가 이미 부처요, 나와 더불어 우주 삼라만상이 부처라고 하는데 왜 이 작은 생각에 집착하여 이 작은 감옥에 갇혀있습니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면 탐진친 삼독이 불법승 삼보로 변합니다. 화가 복이 되고 한숨소리는 인생을 축복하는 소리로 변합니다. 불교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행입니다.

여러분은 왜 절에 옵니까. 부처님법을 배우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법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까지 시삼마 화두를 들고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나를 찾자는 것입니다. 사대오온으로 형성된 나의 육신은 거짓 나입니다. 이것은 항상 생멸 속에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초월해서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파하신대로 ‘중생실유불성’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수행과 증득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부처임을 선언해야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기도고 이것이 살아있는 정진입니다.

생각보다 실천하는 불자돼야

정부와 야당도 경제를 살리며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강한 민족입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시절도 잘 견뎌냈습니다. 불자님들이 우리 사회를 극락세계로 장엄하는 일에 앞장서 주십시오. 국민에게 희망을 주며 세상을 원만구족하게 하는 도량과 불자가 돼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스님들과 불자님들이 있는 한 불교는 사회의 등불이 되고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우가 내리니 모든 인연이 본래 한 연꽃임을 확인합니다. 연꽃향기 퍼져 얼어붙은 마음들이 녹아내리니 불우이웃의 얼굴에 희망과 미소가 가득합니다. 너도 나도 이웃 돕는 손길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서울 봉은사에서 진행한 도심포교 선도 사찰 주지스님 초청법회 가운데3월 22일 봉행된 회향 법회에서 관음사 주지 종하 스님이 설하신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종하 스님은
1938년 출생, 1958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1959년 고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 했다. 통도사, 봉암사, 범어사 선원 등에서 6하안거를 성만했고 1972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제4대부터 12대까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조계종 부원장, 조계종 제9, 10대 중앙종회의장, 중앙승가대 이사, 불교방송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도심사찰 관음사 주지 소임을 맡아 관음사를 대표적인 도심 포교, 수행도량으로 가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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