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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시론] 봉하 이야기판

기자명 법보신문

이강옥 영남대 국어국문과 교수

봉하 마을 추모 대열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추모객들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황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고인의 미덕을 찬양하며 이른 죽음을 애달파 한다. 나는 또 다른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다. 대통령이 방문객들의 부름을 받아 나오면서 시작된, 반갑고 흥겹고 진지했던 봉하 이야기판의 사라짐에 대해서.

대통령이 퇴임하여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의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 많은 국민들이 감동했다. 참 따뜻한 모습이었다. 자전거에 손녀를 태우고 들판을 달리는 모습이 그랬고, 오리 농법으로 키운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을 운전하는 모습이 그랬다. 고향 강 습지를 되살리기 위해 쓰레기를 줍고 뒷산 장군차 밭의 풀을 뽑는 모습도 그랬다. 그중 가장 찬란한 순간은 봉하 이야기판의 단골 이야기꾼으로 대통령이 등장할 때였다.

방문객들은 대통령의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시때때 불러댔다. 어느덧 대통령은 굵은 이마 주름을 더 깊이 만들며 환한 웃음을 앞세우고 나왔다. ‘손님이 오시면 인사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대통령은 방문객들과 같은 자리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이야기보따리에는 주로 고향 마을의 산과 들, 집과 나무에 관한 것이 들어있는 듯하였다. 그 속에서 유년과 청년 노무현이 서성대고 있다. 생가를 짓던 날 선친께 흙을 날라드리던 어린 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고향 산천을 쏘다니던 청년의 행적을 ‘삐댔다’는 경상도 사투리로 요약한다. 과수원집 아들로서의 과수 나무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과수 나무는 씨가 생기는 순간 모든 정성을 그쪽에 쏟는다. 몸 속 영양의 대부분을 씨에게로 보낸다. 다음 생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씨 있는 부분은 먹기에는 불편하지만 달고 맛있다. ‘나무는 정성입니다.’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방문객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건너 산 농막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아이를 둘러업은 아내는 밥을 나른다. 고시에 합격하자 학벌 없는 고시생은 ‘출세했고’ 젊은 아내는 ‘팔자 고쳤다.’며 파안대소한다. 방문객들도 깔깔 따라 웃는다.

어느 방문객이 “강원도에서 왔는데요.”라 하면, 다른 방문객은 오늘 아침 비행기로 LA에서 왔으니 제발 자기하고만이라도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 한다. 세계적 경제 위기의 시절에 위안의 말을 원하는 직장인이 있는가하면, 아이의 가슴에 일생 동안 새겨 넣을 좋은 말씀을 해달라는 부모도 있다.

이렇게 봉하 이야기판은 순수하고 흥겹고 진실했다. 세속적 분별을 초월한 상호소통의 자리였다. 그 이야기판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나를 알려면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시시각각으로 올라온 그들의 얼굴 사진을 보면 된다. 나는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행복한 형상을 짓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공부한 나는, 봉하 이야기판을 더욱 활성화할 묘안을 제공하는 자원봉사자가 되고 싶었다.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사저를 가리키며 “집이 좋지요?”라고 동의를 구했다. 그 집은 문화재가 될 만한데, 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가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제가 앞으로 꽤나 오래 살 것이니, 문화재가 된 저 집을 보기 위해서라도 어르신들 오래 사십시오.”라는 축원을 위한 것이었다. 어르신 방문객의 장수를 축원하는 그 말이 당신의 때 이른 죽음을 예언한 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 즐겁고 흥겹고 진실했던 봉하 이야기판은 사라졌다. 나는 그게 너무나 안타깝다. 이야기판이 사라진 곳에 슬프고 처절한 이야기들만이 떠돌고 있다.

언젠가 간결하고 진솔한 입담을 가진 이야기꾼들이 다시 모여서 봉화 이야기판을 되살릴까? 즐거웠던 봉하 이야기판에서 사람들은 권위나 오만, 차별이 아니라 겸손과 솔직함, 평등의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바라보며 자기 삶을 이야기했던 이야기꾼 노무현.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상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겸손하게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그 즐겁고 찬란했던 봉하 이야기판은 방방곡곡에 만들어질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꾼 노무현이 되살아날 것이다.

이강옥 영남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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