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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마음 조각 이철수 목판화가

기자명 법보신문
  • 만다라
  • 입력 2010.05.18 16:09
  • 수정 2011.06.27 18:44
  • 댓글 0

생명에 대한 연민, 일상 속 위대함 발견

 
평범함 속에서 본래면목을 스케치하는 이철수 목판화가. 그의 눈은 밥 한 알을 온 우주로, 강을 생명으로 바라본다.

 

변덕스럽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며 비를 내리다 금세 볕을 흩뿌렸다. 당최 예측할 수 없다. 애당초 우리네 삶도 그렇다. 울고 웃으며 아프고 설레며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곳에 살며시 그림 한 장을 내민 이가 있다. 그 그림엔 산이 있고, 들이, 논과 밭이, 바람이, 비가, 개와 고양이가, 꽃과 풀들이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

 

5월 11일,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마을. 천등산을 마주 바라보고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를 웃고 넘어, 1987년 서울 삶을 정리하고 박달재에 똬리를 튼 한 목판화가를 찾았다. 목판화가 이철수(56). 그는 칼을 품은 손으로 세상에 대한, 생명에 대한 연민을 조각한다. 가벼운(?) 사색을 가져다주는 그림을 새기는 목판화가의 마음속을 산책하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예상치 못한 만남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변덕스럽게도.

 

그의 집에선 석가탄신일에 태어난 ‘탄’이가 가려운 곳을 긁으며 꼬리를 흔들어 반겼다. 손님이 드나드는 일이 자주인 모양이다. 옆엔 그와 아내의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섰고, 초록 잔디가 자라는 정원에는 작은 못이 자리했다. 뒷간 옆에는 삽이며 쟁기며 쇠스랑이며 농기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처마엔 옥수수가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갔고, 야트막한 담장 아래에는 봄꽃들이 서로를 뽐내느라 정신이 없다. 여지없이 촌 동네 농사꾼 집이다.

 

판화가 탄생하는 곳에 들어서려하자 금강역사가 노려본다. 쓸데없는 생각 버리고 들어오라는 냥 마치 일주문 같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텅 빈 충만은 그래서 나온 말이 아닐까. 그의 판화 속 그림과 글, 여백에서 삶에의 성찰이 묻어나는 이율런지도 모른다. 작업실 한 쪽에는 편히 앉은 관세음보살상이 자비로웠다.

 

그 동안 마을을 지키고 영혼의 스승 장일순 선생과 관련된 일을 하느라 도통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그는 다시 판화를 새기고 있다. 몇몇 곳에 연재도 시작했다. 또 소규모 막걸리 도가들이, 막걸리 붐으로 유통망을 장악하는 대기업 틈바구니서 살길을 모색한다고 해 요새 술병 디자인도 한다.

 

“한동안 쉬다가 올해 다시 이곳저곳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직업상 앉아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판화가로 살아갈 수 있는데, 요즘은 세상에서 자꾸 불러내 그러지 못하고 있네요.”

 

때론 감성적인 짧은 글이, 그림 한 장이 가슴에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살아가는 틈새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발견해 늦게 배운 홈페이지(www.mokpan.com)에 매일 엽서를 띄운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며 본 자신의 그림자도, 어느 식당에서 놔둔 오줌통도, 손님이 잦아 굳은 날 자주 외출하는 우산도 다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그래왔지만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판화든 엽서든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라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시간에 치어 빠르게 길을 가는 우리에게 길옆에 핀 한 송이 들꽃을 보라고 손짓한다. 최근 보낸 엽서에는 빨간 튤립 세 송이 위에 파란 하늘 세 개가 둥둥 떠 있었고, 이런 글이 앉았다.

 

“튜울립 몇 포기 봄추위에 잎이 상했습니다. 꽃은 온전할까하고 염려했는데 다행입니다. 꽃이 와서, 안심하라고 저 이렇게 온전하다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와 이 땅에서 살게 된 외래종이지만 꽃에 국적이 무슨 상관이고 국경이 어디 있겠어요. 꽃이지요! 사람도 사람일 뿐이고, 뭇 생명이 그대로 생명으로 소중할 따름이지요! 그런 말도, 하고 있네요.”

 

자비(慈悲).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 다름 아니다. 자기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타인, 다른 생명에 대한 연민은 일상의 위대함을 보는 눈썰미를 길러준다. 그 역시 그런 눈을 갖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정작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내민다.

 

“호흡은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행동입니다. 사실 의식도 못한 채 보통은 뱉고 들이 마시고 있지요. 그러나 호흡은 우리 생명의 처음이고 끝입니다. 마음을 이야기 할 때도 마찬가지지요. 절대 빼먹을 수 없습니다. 삶의 근본이 되기도 하니까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눈, 큰 것에서도 작은 것을 짚어내는 눈, 즉 법안(法眼)이 있어야 세상이 세상답게 바르게 보일 거예요. 무엇보다 사람이 온전히 보일 것 같습니다.”

 

“파헤쳐지는 4대강, 탐욕 찌든 시대의 악업”

수만 년을 흐르고 흘러 여러 생명들을 키워 낸 강. 한반도의 젖줄인 4대강이 파헤쳐지는 지금, 그의 마음은 강가에 있다. 4대강이란 비교적 큰 이야기에 그림을 보내 마음을 더하기도 했다. 돈에 눈먼 이들이 섬뜩한 굴삭기의 삽으로 강의 살을 찢는 모습은 생명을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을 훼손하는 일”이라 안타까워했다.

 

“운하로 시작하더니 이제는 ‘4대강 살리기’라는 표현을 빼앗아갔습니다. 실상은 죽이기를 하며 말은 살리기라고 하니, ‘살리기를 반대해야 하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자연 전체를 부모님 은혜와 같으니 천지은(天地恩)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삶의 모태가 되는 존재에 함부로 기계를 들이대 뜯어 고치려고 하는 것은 태아가 자기가 들어앉은 어머니의 자궁을 훼손하는 일과 같습니다.”

 

영혼이 썩지 않은 사람이 되고픈 이철수. 그는 4대강 문제에서 불교에 거는 기대가 있다. 불교계에서 할 말이 많이 있을 것 같단다.

 

남한강 기슭에 앉아 강을 지키려는 수경 스님이나 낙동강을 순례하는 지율 스님처럼 나서지 못하고 말 한마디 못하지만, 마음을 보태는 많은 이들이 있을 거라 그는 믿는다.

 

천지가 서로 관계하고 인연을 맺어가며 움직여가는 원리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하는 불교인만큼, 수행하는 스님들부터 범부 중생이라고 하는 평범한 이들까지 생각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문득, 오체투지를 바라 본 그의 심정이 궁금했다.

 

“주먹 쥐고 거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체투지는 참 고마웠어요. 자신을 낮추는 오체투지, 배례(拜禮). 절로 예를 올리는 겸손한 방식으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가르쳐준 점이 고마웠지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성직자, 특히 불제자가 하는 방식이었고 참 좋았습니다. 비폭력이 주는 충격처럼 오체투지가 그 이상으로 법다운 법이라 여겨졌어요.”

 

그러나 그의 말처럼 부처님이 큰 깨달음을 얻었어도 세상 인연 따라 구르는 수레바퀴는 구른다. 오탁악세가 그 깨달음 하나로 정토가 되는 건 아닐 터. 하여 중생들은 법의 눈으로 살핀 세상이 어떤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법다운 법이 있길 바라는 그에게 오체투지는 법으로 비춰진 것이리라.

 

그런 법의 눈으로 세상을 살피고 세상과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그는 바란다. 때문에 주제넘은 짓도 했다고. 그 무렵 그가 쓴 엽서에는 오체투지 하는 걸음에 미움 한 점이라도 있으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오체투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항의

가만가만 얘기하는 그에게 불교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물었다. 사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줘야할 몫이 불교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과연 불교가 그러한 지에 대한 편치 않은 기분과 함께.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힌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은 돈인 듯 해요. 돈이 모든 것이고 때론 성직자조차 신앙보다 돈을 먼저 믿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리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특히 불교는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도 커요. 전통승가에서는 그래도 이판사판 구별을 해 수행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계산에 두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고. 이제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수행자가 얼마나 될까요.”

 

쉽게 답을 내어 주지 못했다. 최근 조계종에서는 사후 개인명의의 재산을 종단에 출연한다는 유언장을 쓰고 있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불편하게 모인 재물이라 업장에 불과한만큼 승가공동체에 돌려줘 삼보를 외호한다는 취지다. 그럼에도 승가에‘재산’이라는 단어가 붙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무소유를 얘기하신 스님 돌아가시고 나니 사회가 그 언표에 보이는 충격적인 관심을 봤습니다. 돈에 사로잡혀 살면서도 ‘이래서 될까’하는 의심들도 대중들이 갖고 있는 사실을 새삼 알았지요. 무소유란 말을 굳이 해야 하는 현실이 있었던 거죠. 부처님이 버리고 떠나오신 것을 굳이 다시 찾아서 붙들고 거두려고 하는 수행자는 그 선택이 뭘 의미하는 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봐야 할 때입니다.”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단상도 털어놨다. 불교라는 문맥 안에 도드라진 자리라면 누구나 마음에 부처의 씨앗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고 연등하나 달아 올릴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스스로 부처 씨앗을 하나씩 품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좀 더 또렷하게 하는 날로 삼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소유’ 표지 판화에 담박한 삶 담아

 

“우리 안의 씨앗을 소중히 가꿔야 하지요. 부처가 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의 씨앗을 최소한 확인이라도 하고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적어도 싹을 자르는 짓은 않고 살아야 법을 법답게 모시는 일이지요.”

 

수행자 같은 대답이다. 그러나 젊은 날 그는 달랐다. 1980년대 민중화가로 불리며 강하고 억센 그림으로 독재와 사회 억압에 격렬한 분노도 자주 드러났다. 그러다 자신부터 돌아봐야겠다는 마음이 절박해졌다. 1990년 무렵, 성찰과 선적인 내용이 담긴 그림이 나왔다. 마음을 이야기하는 판화가가 된 셈이다. 그는 2000여 평의 논밭에서 농약 없이 벼, 콩, 깨, 팥 등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을 아내와 둘이서 가꾼다.

 

그렇게 24년 간 농촌생활에 적응하면서 자기 삶이나 주변의 일상적 생활상인 집, 나무, 새, 닭, 꽃, 농민의 일하는 모습이 판화에 새겨졌다. 송광사서 펴냈던 ‘불일회보’에 그림과 글을 실으며 인연을 맺은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의 표지도 그가 그렸다. 법정 스님은 그의 그림이 삶에서 묻어 나온다고 평했다.

 

“흙을 가까이 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시골생활은 때 묻음 없이 나날이 새롭게 피어남이요 소생이며 창조의 삶이다. 그림과 글은 이런 흙과 자연에서 빚어진 것이기 때문에 흙 향기처럼 가슴에 산뜻하게 묻어온다.”

 

그 이면에는 땅을 일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리 숙이고 물에 기대어 살라는 스승이 있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공생과 살림의 문명을 주창한 스승은 아예 “기어살라”고 경책했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가 진짜라고 가르친 스승. 일상 속 절박함이 주는 마음이 새긴 글이니 위대한 까닭이다.

 

“포장마차 주인이 내 그림이 실린 달력을 걸어놨다는 소식이 그렇게 반가웠습니다. 내 삶의 반성문삼아 그리는 그림들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선한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나머지는 각자의 삶을 도량 삼아야 해요. 반성문에 동감한 그 자리에서 연민의 마음가짐으로 우선 자신을 살피고 다른 생명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어요.”

 

간디는 “보리가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삶이 죽음에서 생기 듯, ‘나’를 죽이면 비로소 ‘너’가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도종환 시인처럼 봄 생명의 싱그러운 탄생에 가슴 한 번 설레 볼 일이지 않은가.

 

“아침에 집을 나서다가/ 막 피기 시작하는 개나리꽃을 보았습니다./ ‘어, 개나리 피었네!’ 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좋아서 혼자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좋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나리꽃이 피었다고 뭘 어찌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가슴이 설레었습니다.”(도종환, ‘어쩌면 좋아’)

 

생명에 대한 놀라움과 연민은 늘 이렇다.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림과 글로 연민의 심정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하는 목판화가 이철수. 그윽한 난초는 누가 향기를 맡아주지 않아도 그 향기를 피워 올린다. 그가 제자리에 앉아 가만히 풍기는 사람의 향기는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제천=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이철수는

 

평범한 삶과 일상, 자연을 바라보며 그 안에 깃든 인간의 본래면목을 스케치하고자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판화는 우리네 욕심으로 사납고 황폐화된 마음에 따듯하고 촉촉한 비를 선물한다. 연민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고 평범한 일상이 고운 정신으로 가는 길이라 정의하는 그. 그의 판화는 이제 낮은 목소리로 존재의 경이를 이야기하고 삶의 긍정을 말한다. 그는 24년간 제천 외곽 농촌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땅을 일구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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