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千江에서 달을 보다] 원효센터 주지 공파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그대는 바라밀 수행을 삶의 본질로 삼고 있는가”

종단-문중 구분 거북스러워
‘사바세계 석가종’ 에둘러 표현

가끔은 아주 원초적인 물음을 던져 볼 때가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 물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 “모든 중생들이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이미 갖고 있는데 부처님은 왜 굳이 이 땅에 오셨던 것일까? 여기서 출발하면 또 하나의 의문이 꼬리를 문다.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왜 그 지혜와 덕성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괴로운 인생의 나날을 보낼까’ 하는 것이다.

첫 의문을 간단명료하게 풀어낸 스님이 있다. 부산 원효센터 주지 공파 스님은 자신의 저서인 『부처님의 유언』에서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러 오셨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며 “중생을 제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 모두가 다 이미 제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앞에 고고하게 서셨던 것”이라고 설파했다. 과연 이 말은 맞을까?

공파 스님은 ‘독특’한 스님이다. 스님이 선보인 『부처님의 유언』이나 『극락세계』를 보아도 별다른 프로필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출가했는지, 은사가 누구인지, 어디서 수행했는지가 없다. 일종의 ‘신비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다.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누군가 ‘조계종 스님이냐’ 물으면 ‘사바세계 석가종’이라 답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은사가 누구라고 답하면 문중이라는 프리즘으로 나를 보려하고, 조계종 승려라 하면 조계종풍 속에서만 나를 재단하려 한다. 그래서 싫다. 나를 나 자체로 보려 않고 어느 범주에 따라 재단하려는 그 의도가 싫다. 불교는 어느 종단의 것만도, 어느 문중의 것만도 아니지 않은가?”

일리 있다. 스승과 정진, 선원 자료가 입력되는 순간, ‘아, 이런 길을 걸었겠구나’하는 예단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범해왔는가. 그 스님이 갖고 있는 법을 듣기도 전에 말이다. 공파 스님은 한국의 선원은 물론 중국과 남방권에서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대소승을 아울러 법을 펴는 스님으로 정평이 나 있다.

중국-미얀마 등에서도 용맹정진
“남·북방불교 정통한 스님” 평가

공파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정말 ‘제도하기 위해 오셨다’라는 말이 잘못된 것인지. 스님은 빙그레웃으며 그 뜻을 풀어 갔다.
“우리 모두는 온 우주를 사고도 남을 만한 황금덩어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고 있지요. 단돈 몇 천원, 몇 만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아귀다툼을 벌입니다. 평생 허둥대며 가난하게 살다 가고 마는 것이지요. 그것을 보신 부처님의 심정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차마 보다 못한 부처님이 말씀하시지요. ‘너희 호주머니를 뒤져 보아라.’ 그 때부터 지각 있는 사람들은 남의 호주머니로 향하던 두 손을 거두어 자기 주머니 속의 금덩이를 찾기 시작한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신의 긍휼만을 올려다보거나, 남의 돈만 어지럽게 세고 앉아 있을 겁니다.”

‘제도’가 맞나 안 맞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진정 자신이 갖고 있는 황금을 찾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원효 스님도 이르지 않았던가. “밥을 먹으면 굶주린 창자가 위로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처님 말씀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구나.”

“우리는 몸에 참으로 많은 투자를 하고 삽니다. 좋은 것,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촉감을 찾아 인간은 전생에서도 동분서주 했습니다. 현재라고 달라진 게 없습니다. 미래도 똑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육신은 떠납니다. 평생을 다듬고 보호해 주어도 떠날 땐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냉정하게 떠납니다. 이 보다 더 큰 배신이 또 있을까요?”

스님은 물었다. “당신은 진정 부처님 말씀을 믿는가?” 즉답하기 어렵다. 불자인 줄 모르고 묻는 질문이 아니지 않은가.
“부처님이 말씀하셨지요. 모든 중생은 부처될 가능성이 있다고. 제도를 이미 마쳤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까?”
분명 ‘믿는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진의 정진을 거듭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러한 길을 걷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공파 스님은 『장아함경』에 따라 중생이 진리에 들어오는 순서를 일러 주었다.

“사정취 중생이 있습니다. 부처를 잘 안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부처님이 방문하면 ‘누구냐?’고 물을 부류입니다. 그런 중생들이 수많은 종교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도록 그 토양을 제공하지요. 그리고는 그 종교에 의해 파멸되어 버립니다. 부정취 중생이 있습니다. 필요할 때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고 매달리지만 살만 하면 바로 돌아서지요. 손익계산을 정확히 따집니다. 부처님께 매몰차게 요구하다가도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원성을 부처님께 돌려버리는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불자가 아니지요. 정정취 중생이 있습니다. 불법을 기준으로 인생관이 정립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바라밀 수행을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갑니다. 차라리 자기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부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정법 수호자들입니다.”

원효 스님 ‘대승기신론’ 강의서
바라밀 실천-견고한 신심 강조

어디에 속하고 있을까? 정정취에 속한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바라밀을 삶의 본질로 삼고 있는가’라는 경계에 걸리니 말이다.
“정진을 하다가도 자기들의 세속일이 바쁘면 그것들을 일시에 뒤로 미루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 의식이 봉행되는 재일이나 행사, 불사에는 기꺼이 동참하지요. 이 사람들도 부정취 중생입니다. 아직 확실하게 불교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스승과 도반의 영향력에 따라 사정취로 도태되거나 정정취로 나아가느냐 하는 중간 단계에 서 있지요.”

부정취에 속한 게 틀림없다. 정진의 연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다. 어찌할 줄 모르는 심상을 눈치 챈 것일까? 스님은 너무 자책하지 말라 한다.

“불교인구가 1500만 명이라 하더군요. 이 분들이 다 정정취에 속해 있을까요? 저는 아닐 것이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정정취에 속하신 분이 1500만 명이라면 벌써 남한 사람은 다 불자일 겁니다. 한 사람이 네 명만 포교해도 6천만 명입니다. 정정취에 계신 분이 불법을 전하지 않을 리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물론 각각의 그릇과 인연에 따라 불법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니 이 계산도 맞는 건 아닙니다. 분명한 건 아직도 우리는 ‘불교를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확연히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파 스님은 원효센터에서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을 강의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 말씀을 믿으라’ 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믿으라 하는지도 분명치 않다는 게 공파 스님의 지적이다.

“무엇을 믿는다는 겁니까?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을 믿으라는 것일까요? 무엇을, 왜, 어떻게 믿어서 어떤 행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알아야 자각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맹목적 종교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대승기신론』은 어렵지 않은가. 무명에서 시작해 진여와 생멸을 말하는 논서 중의 논서가 아닌가.

“어렵지요. 기신론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논서도, 경전도 다 어렵지요. 범부가 부처의 경지로 오르는 길이 쉽지 않지요. 그 길을 적시하고 논하는 경전과 논서가 쉬울 리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처님 말씀에 따라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면 아무리 험하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해도 걸어야 합니다. 공부해야지요.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알고 보면 쉬운 길입니다.”

스님은 ‘어려운 게’ 아니라 ‘하려 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인간은 자신과 직면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 삶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을 들여다 본 순간 현 상태에서 변해야 함을 직감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이 그리도 멋지게 사셨는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부처님은 법을 설함으로써 지금도 아니 미래에도 추앙 받으시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변하려면 가진 것을 놓아야 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싫은 거지요. 그게 두려운 겁니다. 자신이 성취해 놓았다고 하는 경제, 명예, 권력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게 싫고 두려운 겁니다.”
따라서 공파 스님은 『대승기신론』에서 제시하는 바라밀을 내실있게 닦아보라고 권한다.

한국불교, 지혜 닦는 노력 부족
선정에만 치우치는 것 경계해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그리고 지관수행이다. 이 바라밀을 닦는 그 자체가 공덕이 되고, 그 공덕으로 네 가지 믿음이 성취된다고 한다. 네 가지 믿음이란 진여라는 법이 모든 부처님이 돌아가는 곳이고 모든 행의 근원임을 믿는 마음이요, 부처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믿는 마음이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마음이요, 바르게 수행하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이익도 가져다줌을 믿는 마음이다.

“믿음이 있어도 수행이 없으면 믿음이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잘못된 인연을 만나면 공부에서 물러나지요.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는 5바라밀을 닦아 네 가지 믿음을 굳건히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이 길을 걸으면 직심과 신심, 그리고 대비심을 낼 수 있습니다. 신심이 성취되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습니다. 당당한 삶을 살아가지요.”

다만 스님은 지관을 닦는데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지(止)만 닦으면 ‘때로는 게을러지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멀리할 수 있다’는 『대승기신론』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님은 『대승기신론』에 적시된 부분을 펼쳐 보였다.

‘모든 세간의 생멸하는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변하고 사라지며, 모든 마음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두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원효 스님은 이 부분에 대해 무상과 고 그리고 유전(流轉)과 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지(止)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릴 수 있고, 관(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도 함께 닦지 않으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기신론에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공파 스님은 세상을 고(苦)로 보기 시작해 무상과 무아를 체득해 가라 했다. 현재 체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좀 더 공덕을 지어가라 한다. 스님이 전하는 공덕이란 5바라밀 실천의 다름 아니다. 깨달음을 서두를 게 아니라 진정 그 길에 지금 들어섰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대·소승을 두루 섭렵한 공파 스님에 의해 원효 스님은 원효센터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 바라밀을 실천하고 있지 않거나, 믿음이 성취되지 않은 불자라면 원효센터의 문을 두들겨 보라. 공파 스님의 대승기신론 강의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 위원 penshoot@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