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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江에서 달을 보다] 경기도 광주 각화사 혜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삼라만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꽃이다

설산 동자 무상게 듣고 가슴 뭉클했던 소년
광덕 스님 은사로 출가…40여년 수행정진
한국불교 최초 대품반야-방거사어록 완역

圓覺山中生一樹(원각산중생일수)
開花天地未分前(개화천지미분전)
非靑非白亦非黑(비청비백역비흑)
不在春風不在天(부재춘풍부재천)

깨달음의 원각산 가운데 나무 한그루 있으니 / 하늘땅이 나눠지기 이전에 이미 꽃은 피었다. / 푸르지도 않으며 희지도 않고 까맣지도 않은데 / 봄바람도 하늘도 관여할 수 없도다.

혜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각화사(覺華寺) 요사채에 걸려 있는 주련이다. 네 번째 구를 ‘봄바람 속에도 없으며 하늘 어디에도 없어라!’라 해석하기도 한다. 혜안에 따라 읽고 새길 뿐이니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검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각화사의 사명(寺名) ‘각화’와 이 주련은 한 눈에 보아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각화사’라는 사명은 혜담 스님이 직접 지었다. 사명이 곧 창건주의 수행력과 불교사상을 농축해 짓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보면 ‘각화’라는 이름에도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각화’에 대해 혜담 스님은 2006년 선보인 『방거사 어록 강설』(불광출판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수행하여 깨달음의 꽃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삼라만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꽃이요, 일체중생이 바로 진리가 현현한 꽃이라는 의미를 이름 속에 담은 것이다.” ‘삼라만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꽃’이라는 이 한마디가 각화사로 구법의 길을 떠나게 했다.

밥 먹고 소화시키는 게 ‘신통’

초등학교 시절에도 스님 흉내를 낸다며 ‘묵언’을 시도(?)했던 소년. ‘골’이 나서도 아닌데 하루를 하기로 하든, 이틀을 하기로 하든, 한 번 마음먹으면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지키려 했던 옹골찬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 즈음, 수업 중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설산동자 이야기와 ‘무상게’를 듣고 가슴 뭉클했다는 학생이었으니 불교와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분명 전생에 닿은 불연이 이생에서도 이어져 지속된 것이리라.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세상의 모든 일은 항상 됨이 없어서 한번 나면 반드시 없어지나니
나고 죽음에 끌려가는 마음이 없어지면 적멸의 고요가 즐거우리라.

강원 수학 시절 “이 무상게의 본뜻을 알고는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혜담 스님은 술회한 바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시절의 어린 감성으로만 느껴졌던 무상게의 진면목을 출가해서 맛보았으니 그 기쁨은 말로 다 못할 것이다.

울산공고에 입학해서도 그는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출가 결심을 굳혀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출가하려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동안 자신을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들어간 학비만이라도 부모님께 돌려드리려 사회전선에 뛰어 들었지만 1년도 안 돼 그 뜻을 거뒀다. ‘돈을 번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이러다가는 언제 출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범어사 강원에서 『서장』을 배우던 중 한 게송을 접한다.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일용사무별 유오자우해)
頭頭非取捨 處處沒張乖(두두비취사 처처몰장괴)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주자수위호 구산절점애)
神通幷妙用 運水與搬柴(신통병묘용 운수여반시)
나날의 일은 무엇이라고 할 것 없어, 다만 스스로 잘도 옮겨가는구나.
어느 하나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어긋남이 없네.
왕사니 국사니 누가 칭호를 붙였는가? 이 산중은 티끌 하나 없는 곳
신통이니 묘용이니 무엇을 말하는가?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 바로 그것인 것을.

이 게송을 듣는 순간 혜담 스님은 너무도 황홀하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방거사야말로 자신이 찾던 ‘도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강원에서의 문자공부에는 흥미를 잃었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수행에도 차제가 있는 법을 알았던 혜담 스님은 이후에도 수행과정을 올곧게 밟아 갔다. 하지만 방거사의 이 한마디는 항상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광덕 스님이 내보인 ‘반야바라밀’과 혜담 스님이 찾고자 했던 공(空)을 알기 위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 귀국 후, 양평의 한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며 한국불교 최초로 『대품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완역해 내놓았다. ‘사교입선’의 의미가 왜곡돼 전해진 탓이었을까! 『금강경』과 함께 불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경전이 『반야심경』임에도 두 경전이 모두 속해 있는 『대품마하반야바라밀다경』이 완역되어 있지 않은 점은 놀랄만한 일이다.

‘반야’와 ‘공’에 깊은 뜻을 두었던 혜암 스님의 원력이 없었다면 지금도 이 경이 완역돼 출판되어 있을지 의문이다. 이후 법보신문에 연재한 ‘반야심경’을 『신 반야심경』으로 엮었으며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를 맡아 신행상담을 통한 포교에도 남다른 노력을 경주했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까지 역임했으니 정진과 포교, 행정에 이르기까지 부단히도 애써왔음을 알 수 있다.

“신통이니 묘용이니 무엇을 말하는가?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 바로 그 것인 것을”이라 외친 방거사의 일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간화선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대혜 종고 선사도 진소경에게 보내는 두 번째 답서를 통해 방거사의 이 게송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에 선의 진면목이 들어있을 터였다. 20대의 혜담도 이 게송을 듣고는 ‘모든 삶에 대한 번민이나 인생에 관한 고뇌가 일시에 다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방거사는 일상의 영위가 그대로 도(道)의 현현(顯現)임을 체득한 겁니다. 임제 스님도 ‘비록 오온의 번뇌로 이뤄진 몸이지만, 바로 이것이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이다’고 했습니다. 밥 먹고 소화시키는 작용도 신통이고, 새가 하늘을 나는 것도 신통이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신통입니다. 견성했다 해서 물 위를 걷는 그러한 신통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는 옛 선지식의 일언과 맥을 같이 한다. 무사인(無事人)이다. 강원에서 처음으로 방거사의 게송을 들은 혜담 스님은 훗날 방거사와 마조 선사가 나눈 선문답을 마주한다. 방거사가 “일체의 존재와 상관하지 않는 자, 그것은 어떤 사람이냐”고 마조 선사에게 묻자 “자네가 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시고 나면 그 때 그것을 자네에게 말해 주겠다”는 대목에서 혜담 스님은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은 듯했다.

조사어록 통해 깊은 선지체득

“방거사와 마조 선사의 선문답을 확연히 알았다고 한 순간 겁도 없이 방거사 어록 전부를 번역하겠다고 작심하고 잡지 「불광」에 연재 했지요.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방거사가 약산의 제자들에게 말한 대목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었습니다. 현묘한 이치를 깨달은 듯 한건 착각이었던 것이지요.”
혜담 스님이 연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목을 보자.

방거사가 약산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였기에 약산 스님은 선객 10인에게 분부해 해탈문까지 방거사를 전송케 했다. 문밖에 이르자 거사가 공중에 휘날리는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참 멋진 눈이다. 한 송이 한 송이가 다른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好雪 片片不落別處).”

혜담 스님은 자신 앞에 다가온 은산철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조사어록에 다시 도전했다. 『벽암록』과 『종용록』을 비롯한 각종 조사어록을 보는데 만도 3년을 보냈다. 조사 어록에 수록된 선문답은 결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었다. 용호상박의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쳐흘렀고 마조, 임제, 황벽, 백장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혜담 선지’가 차츰 발휘되자 방거사가 말한 ‘호설 편편불락별처(好雪 片片不落別處)’가 눈에 들어왔다. 방거사와 마조가 나눈 일대사를 깨고 나니 다른 선문답도 자연스레 풀려갔다. 단순 번역을 넘어 강설까지 붙인 『방거사 어록 강설』은 이렇게 나왔다. 한국불교 처음으로 방거사 어록 일체가 번역된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즉시색에 담긴 의미를 우선 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체 모든 것이 어떤 현상으로 성립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이기 때문입니다. 저 산에 보이는 나무 한 그루도 나무라 할 수 있는 실체가 없습니다. 어제의 나무는 오늘의 나무와 다릅니다. 왜냐하면 찰나찰나 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살 때의 아기가 진정한 나인지, 60을 넘긴 지금의 내가 진정한 혜담인지 정할 수 없습니다. 혜담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지요. 실체가 없음에도 혜담은 혜담 그대로, 나무는 나무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요. 그래서 공성이다, 공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온으로 이뤄진 물질현상일 뿐 실체라는 것은, 또는 실체라 할 만한 것은 없다는 설명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깃든 반야의 지혜임과 동시에 무상 속의 공을 혜담 스님은 설파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체유심조라 하지요.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마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 나무나 꽃은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나무는 나무의 공성 그대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것이고, 꽃은 꽃의 공성 그대로 피고 지는 겁니다. 다만, 이 속에는 연기라는 고리가 있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연기법에 따라 공성을 갖고 있는 만물이 그 공성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공’이기에 각기 존재하면서도 ‘공’이기에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모두 연기에 기반한다. 나무도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고, 꽃도 물을 만날 수 있기에 피울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한 송이 눈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조금은 와 닿는다. 눈뿐만 아니라 나무도, 꽃도, 사람도 모두 공성이기에 연기에 따라 제 자리에 ‘척척’ 가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직관해 보면 ‘삼라만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꽃’이란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듯하다.

혜담 스님은 연기와 공을 간파한다면 적어도 ‘집착’은 놓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소유냐’, ‘존재냐’ 하는 문제에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너무 ‘소유’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 한다.

“인간도 저 나무처럼, 저 꽃처럼 우리도 본성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본성의 의미를 알고 따르면 좀 더 쉽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급하게, 치열하게 돈과 명예, 권력 등만을 좇아 왔습니다. 존재보다는 소유에 무게를 두고, 아니 목숨을 걸고 좇아 온 겁니다. 행복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이율배반의 삶을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자문해 보아야지요. 방거사가 자신의 재물을 배에 싣고 강으로 가 과감하게 내던졌습니다.”

‘공’이기에 다투지 않고 존재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중하게 여기지만 / 나는 순간의 고요함을 귀하게 여긴다. /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 고요함은 진여의 성품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 “너희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모양은 횃불을 들고 바람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속히 버리지 않으면 불꽃은 곧 네 전신을 불사르고 말 것이다”고 하신 말씀을 방거사는 자신의 선지에 따라 그대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혜담 스님은 수행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실상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연기와 공을 아는 것과 실상을 보는 것은 천지차이라고 한다. ‘실상을 보라’ 함이 적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릇이 없으니 감로수를 받을 수 없다. 혹, 혜담 스님이 전하려 하는 ‘실상을 보라’ 함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은 각화사로 발길을 돌려 보라. 

채한기 상임논설 위원 penshoot@beopbo.com


혜담 스님은

1969년 ‘불교 대중화’를 이끈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지리산 칠불암과 해인사 퇴설당 등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군승 10기로 임관, 해병대에서 군법사직을 수행했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을 역임한 바 있는 스님은 1992년 『대품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번역했으며 이후 『반야불교 신행론』, 『신 반야심경 강의』,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등을 펴냈다. 현재 각화사 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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