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에 왕생하는 일은 세간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일이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일없이 지났다. 한 해가 얼떨결에 지나가 버리고, 일생도 멍하게 있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밤에 잠들 때는 오늘 하루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을 울어야 하고, 아침에 깨어나면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이 해이해 질 때는 생사가 무상함을 생각하라. 나쁜 생각이 들 때는 소리내어 염불하라. 귀신이나 악마에 대해서는 자비의 마음으로 이익케 하고, 항복시키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아니된다. 가난은 보리의 씨앗으로 아침마다 불도로 나아가게 하며, 부는 윤회의 고삐라 부유한 사람은 매일 밤마다 악업을 더하게 된다.’ (‘일언방담(一言芳談)’에서)
‘카고(賀古)의 교신(敎信)은 서쪽으로는 담장도 치지 않고, 극락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게다가 본존불도 모시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모습으로 마침내 서쪽으로 향하여 염불하여, 그 밖의 일은 잊어버린 듯이 하였다.’(‘일언방담’에서)
이 책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육자는 인연이 먼 주문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또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아빠진 신앙의 형태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의 발견이야말로 인류의 사상사에서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의 하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종교사상의 한 극치를 볼 수 있다.
염불은 사색적인 측면에서 뛰어났던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 와서 실제적인 신앙으로 성숙되었지만, 하나의 종파를 건립했던 것은 실로 일본이다. 더구나 이 나라에 와서 육자의 의의가 가장 깊어졌고, 지극히 독창적인 내용에까지 도달하였다.
불가사의하게도 한국에서는 크게 발달한 흔적이 없고, 일본에 와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의 높이까지 사색은 사무쳤다. 더구나 일본에서 배양되고, 성장하고, 무르익은 몇 가지 사상 중에서 가장 깊고 따스했던 것은 이 “나무아미타불” 육자를 둘러싸고 있는 종교사상일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무수한 생명들이 이 육자에 의해 구원받았으며, 지금도 내내 구원받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도 이 육자에 신비한 힘이 있는 걸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도(道)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진실이 알려져야 하리라.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종문(宗門)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아마도 몇 가지 문제에서는 종래 종학의 입장에서 행해진 해석과는 다른 견해가 제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틀림없이 몇 가지 문제에서 종문의 사람들에게는 자명(自明)한 것을 새삼스럽게 서술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까닭에 나름대로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가 종문의 교양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종학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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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