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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선원 원장 지광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희망·용기담은 뚝심 설법으로 34만 불자 배출

신도 10명·월세로 시작해
10년 만에 8층 능인선원 우뚝


전국 가정법회 만도 1000여 곳
4개 말사·3개 해외지원 거느려

 

 

▲능인선원 제공.

 


서울 능인선원. 매년 이 곳에서 적게는 6000명, 많게는 1만여 명의 불자가 배출된다. 지역별로 구성된 가정법회 만도 1000여개. 교구본사도 아닌 도심사찰인 능인선원이 지원하고 있는 사찰도 4곳이나 된다. 굳이 비교한다면 본사의 말사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북한산 국녕사, 서울 관악구 등룡사, 경기도 고양 석룡사, 경기도 수원 용장사가 그것이다. 중국 톈진을 비롯해 태국, 뉴욕 등 해외에도 지원을 두고 있다. 보시금과 신도들의 저축 및 대출을 관리하는 능인신협은 현재 2300여명의 회원에 300억 자본규모로 성장했고, 2010년 신협중앙회 1등급 기관으로 인증받기도 했다. 현재 신도는 약 34만여명. 이 모든 게 25년 만에 이뤄졌다. 경이적이라 말 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 지광 스님은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성당 주일학교 교장을 맡을 만큼의 열성 인물이었던 그는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1980년 당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후 수배자 신세로 쫓기게 되었다.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든 곳은 지리산 화엄사 인근의 한 토굴 암자. 불교에 매료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때부터다. 동헌 스님 등 지리산 자락에서 만난 스님들이 들려주는 법담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세간에서 당한 내상이 너무 컸기에 상처 또한 쉽게 아물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지리산 계곡에서 목 놓아 울부짖었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하느냐’는 ‘피울음’이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다. 세상에 빛을 본지 며칠 안 돼서도 숨을 헐떡거렸다. 할머니는 ‘내일 갖다 묻을 거’라며 윗목에 밀쳐두었는데 다음날 아침 식었던 몸에 온기가 돌아와 살기도 했다. 성인이 된 그는 시대가 앓고 있던 병에 또 걸려들고 말았다. 당시의 절망감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으리라.


그 때 한 스님이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아파서 산에 들어왔지만 더 아파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기도를 해 보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그 스님이 알려준 그대로 3개월 정진에 들어갔다. 그리고 체험한 바가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던히도 업장이 두터웠던 연유를 알게 되었고, 지금의 쓰라림이 어디서 온 지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불교의 선미세계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기독교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불교가 몸에 배어갈 무렵 새로운 인연이 시작됐다. 지리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쓰러진 한 부부를 정성껏 보살폈다. 의식을 회복한 부부는 주소를 남기며 “서울 올 때 꼭 한 번 찾아 달라”고 당부했다. 1984년 말 스님은 선방과 토굴의 고된 수행으로 상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서울 서초동에 사는 그 부부의 집에 잠시 기거하게 된다.


어느 날 부부가 ‘천수경’을 독송했다. 불심 돈독한 부부라 여기며 “혹 뜻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의외로 “전혀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80년대 중반이라면 지금의 불교대학도 없던 시절이다. 누구 하나 경전이나 교리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이가 없을 때였다. 말 그대로 ‘기복불교’에 머물렀던 시대였다. 스님은 그 부부에게 ‘천수경’의 뜻과 그에 따른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 부부는 “우리만 듣기에 너무 아깝다”며 다른 사람까지 초청해 함께 공부해 갔다. 과외가 금지된 당시 스님은 그 신도의 자녀들에게 영어로 불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불교경전을 강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른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도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스님은 지리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 서초동 삼익상가 내 28평 사무실을 보증금 500만원, 월세 15만원에 빌려 ‘능인선원’ 간판을 내걸었다.


1985년 12월, 당시 신도 수는 10명 남짓 했었다. 이때 이르러서야 스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확고하게 정했다. 포교와 전법(傳法)이었다. 이후 10년 만인 1995년 8월, 지하 5층 지상 3층의 도심사찰 능인선원을 건립한 후 새롭게 도약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기간에 강남의 ‘기복불교’를 ‘인텔리불교’로 바꾸며 새로운 ‘포교바람’을 일으킨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를 뛰어넘은 ‘무아의 나’ 알면
언행·마음 한 가닥 씀에도 신중

 

2013년 화성 능인대학 개교하면
세계서 전법 펼칠 ‘부루나’ 양성


한번쯤 지광 스님의 설법을 들은 사람이라면 금방 느낄 수 있겠지만 지광 스님의 설법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 힘과 희망을 말하기에 감동이 있다. 그 감동이 대중의 세포를 하나씩, 하나씩 깨워내고 있다. 희망을 가지려면 지금의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 누구든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이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이라 여길 것이다. 지광 스님은 칼릴 지브란의 한마디를 꺼내 들었다.


“당신이 마시는 축배의 잔, 그 잔은 수천 도의 가마솥을 지나왔다. 당신이 부는 피리 소리, 그 피리는 수백만 번의 칼끝을 거쳐 왔다. 일리 있지요? 허만 멜빌이 쓴 ‘백경’에서도 에이합 선장이 외치지 않습니까? ‘탁월한 선장은 모진 폭풍이 만든다’라고.”


고통을 피하려만 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말이다. 작은 고통을 이겨 내면 작은 즐거움이 오고, 큰 고통을 이겨 내면 큰 즐거움이 온다고도 했다.


“고통이라는 위대한 투자 없이는 즐거움이라는 결실도 결코 없습니다. 무한한 고통을 이겨 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열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고통을 극복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지광 스님은 고통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고통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면 ‘자신’에게로 돌아가 보라 한다. 다만, ‘철저한 자신’이다.


“내가 나를 주장하는 순간, 개체아(個體我)로서의 인식이 발현됩니다. 우주와 내가 분리되는 겁니다. 이때 우주는 더 이상 실상이 아닙니다. 나의 의식작용에 의해 창출되는 허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무아(無我)이어야 합니다. 귀한 사람이란 피아의 경계가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음을 알기에 모두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요, 천한 사람이란 피아의 경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타인을 모두 투쟁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말이 ‘나’이고, 가장 위대한 말이 ‘당신’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상(相)’을 버리라 하셨지요.”


‘철저한 자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대로의 나’가 아닌 ‘나를 떠난 나’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관계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한다.


“분리되어 있는 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세포요,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일 뿐입니다. 엘리어트도 ‘예술은 자기 것의 표현이 아니고, 자기의 것을 넘어선 세계의 표현’이라 했습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만의 세계가 아닌, 나를 넘어선 세계를 인식한다면 어떤 언행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지광 스님은 마음과 몸도 하나이기에 마음 한 자락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탐욕스런 마음은 병균과도 같은데 독심을 일으키는 순간 이미 나의 마음이 오염돼 그 업보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작용이 없는 게 아닙니다. 악한 마음을 낸 순간 몸에서 독소가 퍼져 나옵니다. 그 독소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몸에 축적될 뿐입니다. 그 독소 또한 정화시켜야 할 장본인도 자신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인생기로에서 내린 선택 역시 탁월할 것이라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한 한마디가 있다. ‘인생은 정해진 시간이다. 그리고 문제의 시작이다.’


“마샬 맥루한은 ‘현대의 인류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했지요. 우리의 인생 그 자체, 즉 삶의 과정은 모두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선지형인 경우가 많지요. 중첩되어 몰려오는 문제의 정답을 얼마나 신속하고 지혜롭게 선택하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가름하는 대의명제가 됩니다. 지금은 선택의 시대입니다.”


두 가지의 선택이 놓여 있을 때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선택하려 해도 어느 것이 나의 미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분명한 사실은 다른 길로 갔더라도 미련이 남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진의 힘을 얼마나 발휘하는가 입니다. 옛 성현들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이미 성취되었음을 강력하게 외치라고 말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기도든, 참선이든, 일상의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지광 스님은 ‘늘 확신에 찬 말을 하고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확신을 갖게 되고 엄청난 추진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을 인용하며 반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설파해 갔다. 특히 타인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남에게 그리고 남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역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사람의 운명이 선생님의 평범한 말 한마디, 부모나 친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경우를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말이 곧 부처님이요, 말 한마디에 자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좋은 말의 활용에 노력해야 합니다.”


지광 스님의 설법 원동력이 무엇인지 이제야 가늠할 수 있었다. 지혜로운 선택과 끊임없는 정진에서 그 힘은 샘솟고 있었다. 지혜로운 선택에 앞서 스님은 자신을 비웠다. 타고난 병치레, 신군부의 총칼 등의 반연에도 굴하지 않고 ‘위대한 선택’을 했다. 그 선택 이후 불거져 나온 역경은 스님의 원력 앞에 모두 삶의 자양분으로 작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진해 갔다. 누구의 시샘도, 누구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무소의 뿔처럼 홀로 자신이 걸아야 할 길을 걸었다. 그런 역경을 이겨 낸 스님이기에 대중들에게 “고난에 당당히 맞서라”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한 법석에 어찌 감동이 없겠는가.


이제, 스님은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걷고 있다. 지난 25년의 열매에도 전법갈증이 해소 되지 않는 것일까?


“아름다운 결과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은 오랜 고행과 수행 끝에 온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거기서부터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능인선원을 찾는 불자들에게 저는 항상 ‘결코 멈출 생각을 하지 말라. 즐기고 누릴 생각은 접어 두고, 쉼 없이 정진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지광 스님이 현재 공들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바로 경기도 화성에 건립중인 능인불교대학원대학에 담겨 있다. 2013년 개교를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 중인 교육불사다. 지광 스님은 이 학교를 통해 한국 등 내외국에서 전법을 펼칠 ‘부루나존자’를 배출하겠다는 원대한 원력을 세워 놓은 상태다.


“외국 강연을 할 때마다 그들은 말합니다. 왜 한국불교는 대화하려하지 않고 앉히려고만 하느냐고. 한국 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일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사실 법문도 다양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청량한 선법문도 좋지만 생활 속에 녹아드는 법문도 매우 중요합니다. 포교는 설법에서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행과 학문이 높다고만 해서 설법을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에 따른 연구도 절실합니다.”


지광 스님이 향후 펼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해졌다. 체계화된 프로그램 속에서 인재를 키우고, 그 인재가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에도 진출해 부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스님은 시대가 변해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어야 할 건 ‘부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 놓은 듯싶다.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이 직접 하겠다며 지광 스님은 또 한 발 내딛었다. 부루나존자의 인(因)을 심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많은 역경이 있겠지만 그 과(果)는 분명 달 것이다. 능인선원은 지금도 정진의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분명 한국불교의 새 지평을 또 한 번 열 것임에 분명하다. 원력에 찬 마음으로 걸은 길은 훗날 크게 빛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채한기 상임논설 위원 penshoot@beopbo.com


지광 스님은

1950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80년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 해직. 입산 출가. 제12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99년 조계종 포교대상 수상. 2003년 사회복지단체 대상 수상. 2005년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 현재 능인선원 원장. 저서로는 ‘정진’, ‘영원을 사랑한 구도자’, ‘별과 나 그리고 부처님’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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