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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봉수사 주지 만인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금, 싹 틔워라! 천지가 합세해 꽃망울 터트리니

2천만원 시줏돈으로 토지매입
경학·화두 들다보니 사찰우뚝


자책·경책하며 매 순간 정진
남은 일생 ‘양심’따라 살겠다

 

 

 


충남 아산의 봉수산(鳳首山)은 정상이 534m 밖에 안 되지만 한 마리의 봉황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 그 기세가 등등하기 이를 데 없다. 만공 스님이 주석하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봉곡사가 북쪽, 봉황의 왼쪽 날개에 자리하고 있다. 남쪽의 천방산 능선은 오른쪽 날개에 해당되며, 갈막고개가 꼬리다. 남북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 광덕사가 자리하고 있는 동쪽의 광덕산(699m)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형상의 이 산은 한 눈에 보아도 영산이다.


봉황의 머리(정상) 아래 기슭에 자리한 봉수사(鳳首寺)에 만인(萬仁)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봉수사가 창건되기까지의 일화 한 토막이 있다.


한 불자가 백양사의 한 스님에게 시주하려고 돈 2천만원을 준비해 놓았다. 언제든 친견하면 직접 드릴 요량이었는데 인연이 닿았다 싶으면 꿈속에 만인 스님이 나타나 머뭇거리게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차례 같은 꿈이 반복되자 그 불자는 “아무래도 이 시주는 만인 스님에게 가야할 시주인 듯하다”며 선뜻 2천만원을 만인 스님에게 드렸다. 시줏돈 한 푼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봄에 밴 스님은 고민 끝에 봉수사를 창건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지를 좀 사고 남은 돈으로 조립식 건물을 올렸다. 이 때가 1993년이다. 창건 원력을 세웠다 해서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그래 왔듯, 경전을 공부하고 ‘무’자 화두를 들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봉수사에는 대웅전과 함께 작은 요사채 두 동과 남선당(南禪堂)이 자리하며 사격을 갖췄다.


만인 스님과의 인연은 대만 순례 길에서 맺어졌다. 초면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한 눈에 보아도 ‘비구’요 ‘수좌’였다. 말씨 하나, 걸음 하나, 옷매무새 하나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앗싸지 비구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념이 일 정도였다. 언젠가 꼭 친견하겠다고 염두에 두었다가 봉수사 카페에 올려 진 법문 ‘거품이 거품을 쫓아가서는 거품만 키울 뿐이지 실상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한 토막에 꽂혀 달려 왔다.


‘거품은 물을 볼 때 생명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이에 만인 스님은 창 밖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켰다. 한 물건(一物)을 말하는 것일까?


“생명의 꽃 한 송이가 있습니다. 아름답지요. 그러나 그 꽃도 갑작스런 비바람에 땅에 떨어져 썩고 맙니다. 그 자리에 또 다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떨어지기를 영겁의 세월 동안 반복해 왔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올 때는 기뻐했지만 갈 때는 괴롭고 두렵습니다.”


꽃 한 송이와 거품 사이를 관통하는 맥이 짚어지지 않았다. 처음 꽃을 가리켰을 때 알아차리지 못한 이상, 더 묻는다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터였다. 만인 스님은 말을 이었다.


“제석천에 있다는 보배그물 ‘제망’(帝網) 즉, 인드라 망을 떠올려 보세요. 그물코에 달린 보배 구슬은 다른 전체의 구슬을 비추고, 그 전체의 구슬도 각각 전체를 비추고 있습니다. 서로서로를 비추니 상즉상입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요. 찰해(刹海)란 유정무정 일체 존재와 국토가 제망처럼 무량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를 비추고 담는 모습이 중중무진으로 펼쳐져 있으니 화엄세계요 화장세계입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물 한 방울도 전 우주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세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세상 만물도 저 꽃 한 송이처럼 연기법칙에 따라 찰나찰나 변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무상이다. 우리 삶도 이 법칙에서 만큼은 예외가 아니다. 생명의 실상이 ‘제망찰해’ 한 단어 속에 농축돼 있음을 말하고 있음이라. ‘거품이 거품을 쫓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연기도리를 모르고 집착해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이다. 내면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이런 식이면, 거품은 거품만 볼 뿐, 물은 보지 못한다. 거품도 따지고 보면 물이었다는 간단한 이치도 알 길이 없다. 이러한 도리 하나만 명심해도 평화와 상생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인 스님은 한 발 더 나아가라 한다. 생사를 초월한 생명의 실상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를 보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잎만 보려 합니다. 그리고는 예쁘다, 아름답다, 향기가 좋다 하지요. 그러나 그 생명이 빚어 낸 열매나, 꽃 이전의 새싹에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단견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꽃잎도, 열매도, 새싹도, 그 뿌리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생명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뿌리와, 새싹, 꽃잎과 열매 속에 무상이 있다. 꽃잎은 지지만 씨를 남기고, 그 씨는 싹을 틔우지 않는가. 무상하지만 또한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요, 위대함이다. 그러니 꽃이 피었다 해서 큰 기쁨이 아니요, 지었다 해서 큰 슬픔도 아니다. 연기실상을 보려면 마음을 닦아야 할 터. 이 마음 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묻자 만인 스님은 “마음에 안과 밖이 없으니(心是無內外) 구름 흩어지면 봄의 산이 밝다(雲散春山明)”고 답했다.


포기않고 밀고가면 삼매일여
‘조급’ 버리고 기다려야 ‘소식’


중중무진 제망찰해 연기 속
나·우주 바로 봐야 실상체득

 

 

▲1993년 시줏돈 2천만원으로 대지를 매입하고 조립식 건물을 올렸다. 현재 봉수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두 동, 선원이 들어서 있다.

 


‘마음에 안과 밖이 없음’을 어떻게 해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느냐 여쭈어 보았다. 이에 스님은 화두를 통해 삼매에 들어보라 한다. 다만, 백척낭떠러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라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 발 더 나아가라 했다 해서, 무엇을 더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은 “기다리라”했다. 삼매에 들었을 때 어떠했느냐 여쭈어 보자 또 다시 자신이 지은 선시 하나를 내어 보였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하니(百尺竿頭進一步)
일단 삼매가 천지를 삼켜버렸다(一段三昧呑天地).
삶도 죽음도 중생도 없으니(無生無死無衆生)
산색 물소리 나와 평등하구나(山色水聲與我等).


옛 선지식은 ‘삼매를 체험하면 소식도 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에 만인 스님은 “분명코 헛된 말이 아니다”라며 “목숨을 던져 무가보(無價寶)를 구한 자 그에게 하늘과 땅을 주리라”한다. 여기에 일말의 ‘거짓’은 없을 터. ‘정말’이라는 의심만 하는 사람은 단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가부좌 틀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만인 스님은 다시 꽃을 들어 보였다. “싹을 틔우는 순간 천지 모든 것이 합세하여 그 싹을 키웁니다. 꽃을 피우겠다는 새싹의 작은 원력에 온 천지 만물이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바람, 물, 태양 모두가 그 꽃을 향합니다. 불자는 위대한 싹입니다. 지극한 원을 세웠다면 이미 그 원의 결실은 맺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포기하거나 자신을 부정하는 마음을 먹지 말라 한다. 그저, 정진하고 기다리면 시절인연은 분명코 닿는다고 한다.


만인 스님 주석처에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글이 걸려 있다. 순간적인 치기에 ‘어떻게 오셨기에 빈손’이냐 묻자 스님은 “생사란 원래 없는 것이니, 삼계 윤회란 말 나는 알바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면서 고봉 스님의 열반송을 내어 보였다.


와도 죽음의 문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來不入死關) / 가도 죽음의 문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去不出死關). /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鐵蛇鑽入海) /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撞倒須彌山).


만인 스님은 여기에 한마디 일렀다. “와도 생문에 들지 않았고, 가도 사문에 들지 않았다(來不入生門 去不入死門).”


스님의 선기가 봉수산 기세만큼 등등하다. 어쭙잖은 치기가 또 발동했다. 생사문에 들지 않은 사람은 이제 ‘한가한 노인’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죽비로 한 대 내려칠 만도 한데 스님은 ‘자비심’을 내어 노트 한 권을 말없이 열어 보였다. 수행 중 떠오른 선시와 일상에서 스쳐 간 짧은 멘트가 적혀 있었다. 살림살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의 살림살이다.
스님의 단편 선시는 불기2550년, 그러니까 2006년 음력 12월 시작됐다.


삼계는 진실한 것이 아니고(三界非眞)
몸과 마음은 환과 같다(心身如幻).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면(皆具脫落)
다시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復是何物).


주객이 문득 끊어지니(頓忘主客)
조처가 홀로 드러나도다(道體獨露).
고목은 노래하고(古木歌詠)
돌부처는 가만히 듣는다(石佛寂聞).


그 해 12월 느낀 바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지식들이 말한 ‘밑바닥이 쑥, 빠지는 체험’을 했을 법하다. 선사들이 말한 공적영지에 한 걸음 내디딘 것이리라. ‘삼천조항의 법규를 다 뒤져도 정(情)과 죄(罪)를 판단할 길 없도다’라는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의 법어에 스님은 ‘물 가운데 비친 달 그림자 물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며 답하고 있다. ‘차나 한잔 가라’했던 조주에 대해서도 한마디 전하고 있다.


말 많은 조주 늙은이(多言趙州翁)
굴려도 굴려도 옥구슬이라네(轉轉唯玉珠).
어떤 것이 조주인가(如何是趙州)
말 끊어지고 길 다한 곳이라네(言絶路盡是).


조주의 ‘잣나무’를 보고 ‘돌다리’를 건넌 것일까? 순간, 이 길에 들어서 보지도 않고 가늠해 보려 하는 마음이 가소롭게 느껴진다. 노트에서 배어 나오는 만인 스님의 선향을 따라가다 2009년 음력 8월13일 새벽 일상을 적은 짧은 글 한 편에 시선이 멈춰졌다.


‘지난 밤 꿈을 꾸다. 발가벗고 대중 속을 걷다가 돌아 나오는 꿈이었다. 연이어 갈 곳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 부끄러운 일이로다. 심히. 아직도 이 정도라니.’ 꿈속의 방황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자책이요 경책이다. 글은 계속 이어진다. ‘깊이 무심에 들었다가 글을 쓰다.’ 스님이 써 내려간 시 한수는 이렇다.


한 생각 문득 일어나니(一念頓起)
처처가 빈곤이라(處處貧困).
일념이 일어나지 않으니(一念不生)
천하가 태평하다(天下太平).


이어진 짧은 글 하나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매일여 되고 내외명철하여 생사투탈 해야 하리.’ ‘한가한 노인’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 자체가 ‘오만’이었다. 스님은 남은 일생 동안 ‘양심’에 따라 살겠다고 한다. 양심! 수좌로서, 비구로서 가져야 할 양심을 말하고 있음이다.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크다. 스님만 ‘불제자 양심’을 지켜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봉수사를 나서며 산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몽산 스님의 한마디가 스쳐간다.


‘일을 마친 사람은 생사의 언덕에서 거친 번뇌를 미세한 번뇌로 바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다. 지혜광명의 해탈로 모든 법을 낼 삼매의 왕을 얻으리니 이 삼매로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몸을 얻기에 뒷날 오묘하게 중생의 부름에 부응하는 그리고 믿음으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몸을 얻는다. 도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깊은 맛이 난다.’


이 산엔 분명 봉황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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