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염불종이 의지하고 있는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을 읽으면, 미에 관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십팔원 가운데 제4원은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가령 내가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내 국토의 사람이나 신에게 형색이 같지 않고 좋음과 추함이 있다고 한다면, 정각을 얻지 않겠다(設我得佛, 國中人天, 形色不同, 有好醜者, 不取正覺).”
이는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이라 불리는 것인데, 염불의 종문에서 아직 이 원의 의의를 언급한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미의 법문(法門)이 의지해야 할 경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추는 미추(美醜)의 다른 이름인데, 이러한 차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 부처와 범부라는 차별을 넘어선 피안에 염불의 일문(一門)이 선다면, 마찬가지로 미추의 피안에 예술의 정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은 모두 틀림없이 이러한 진리를 내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추함에 상대하는 아름다움은 아직 충분히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이 제4원은 바로 미추 이전, 미추가 나뉘기 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원보다 예술의 정토를 더 잘 설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미의 정토가 있다면, 거기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정토교는 특정한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불교 안의 염불종으로만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보다 폭넓게 모든 문화 중에서 볼 수 있는 종교이다. 이 원으로 인하여 정토교의 무게와 깊이와 크기가 더해진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 가르침이 보다 더 가깝게 다가간다면 좋겠다. 실은 ‘사물’의 세계에서도 정토문이 세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주로 종문(宗門) 밖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이 책을 엮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염불의 종지를 좁은 염불의 교단에서 해방시켜서, 일반 사람들도 지닐 수 있게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염원이다. 그럼으로써 염불종의 새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
*미의 법문(法門) : 종래 정토교 안에서는 특별히 제4원, 즉 ‘무유호추’의 원에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원에서 그가 추구했던 민예(民藝)미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1958년 그는 ‘미의 법문’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책에서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로 졸렬하면 졸렬한 대로 아름다워지는 작품이야말로 좋은 작품”이라며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기보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기존의 천재 중심의 미사상에서 벗어나 민중중심의 관점으로 옮겨가야 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 책은 최재목·기정희 박사에 의해 2005년 한국어로 번역(이학사 출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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