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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작음은 큰 것 비하여 작음이며
큰 것은 작음을 상대하여 큰 것
연기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그 이치 알면 가는 곳마다 해탈

81. 수미산의 본디 모습이 여여

 

 

▲돈황 막고굴 112굴.

 


如上所說 納須彌芥 毛呑巨海 旣唯一心 須彌爲復入芥子 不入芥子. 若言入 經何故云 須彌本相如故 若言不入 又云 唯應度者 見之.


문 : 위에서 말한 대로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두고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는 것이 오직 한마음이라면,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들어간다면 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수미산의 본디 모습이 여여하다.”라고 말합니까? 만약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또 “오직 깨친 사람만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라고 말합니까?


若有所入處 卽失諸法自性 若言不入 又成二見. 又 或云 小是大家之小 大是小家之大 或云 芥子須彌 各無自性 此皆是以空納空 有何奇特. 故知 未入宗鏡 情見難忘 局大小於方隅 立見聞於妙道 致使一眞潛隱 萬法不融.


답 : 만약 들어가는 곳이 있다면 곧 모든 법이 자성을 잃는다.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또한 잘못된 견해이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작음’은 ‘큰 것을 상대하여 작음’이고, ‘큰 것’은 ‘작음을 상대하여 큰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겨자씨와 수미산에 자성이 없다. 이것이 다 ‘공(空)’으로써 ‘공(空)’을 들이는 것이니 무슨 기특할 게 있느냐.”라고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종경’에 들어가지 않으면 알음알이를 끊기 어렵다. 치우친 좁은 견해로 크고 작음을 분별하고 ‘오묘한 도’를 ‘보고 듣는 알음알이’로 헤아리니 ‘참마음’이 숨어버려 온갖 법이 오롯하지 못하다.


강설) 종경이란 무엇이며 종경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종경을 달리 말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연수 선사는 ‘능가경’에서 언급된 “부처님은 마음을 종지로 삼는다.”는 말에 근거하여 ‘일심(一心)’을 종지로 삼았다. 이 일심을 ‘종경’이라 표현하니 ‘종경’의 ‘종(宗)’은 가장 근본이 되는 마음이고, ‘경(鏡)’은 모든 것을 비추어 주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종경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공부가 끝나 증득해야 할 것도 없고 알아야 할 마음도 없어져 주객이 사라진 자리 곧 온갖 대상에 대한 시비 분별이 사라진 것을 말한다. 이 자리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서 그 자체가 믿음이요 법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단지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마음이 종경일 따름이니 종경은 ‘일심’, ‘한마음’, ‘참마음’과 같은 뜻이다.


今明正義者 所謂 入而不入 卽識須彌之本相 不入而入 能了諸法之自宗. 還原觀云 所言入者 性相俱泯 體同法界 入無入相 名爲入也. 經偈云 如來深境界 其量等虛空 一切衆生入 而實無所入.


지금 올바른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이른바 ‘들어가면서도 들어가지 않음’이 그대로 ‘수미산의 본디 모습을 아는 것’이요,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들어감’이 모든 법의 본래 종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환원관’에서는 “들어간다 말하는 것은, ‘성(性)’과 ‘상(相)’이 함께 사라져 그 바탕이 법계와 같아 ‘들어가도 들어가는 모습이 없는 것’ 이를 일러 ‘들어간다’라고 한다.” 하였다. 경의 게송에서 말한다.


여래의 삶 드러나는 깊은 경계는
그 크기가 불가사의 허공과 같아
모든 중생 이곳으로 들어갔어도
거짓 없이 들어 간 바 흔적이 없다.


강설) ‘성(性)’과 ‘상(相)’이 함께 사라져 그 바탕이 법계와 같아 ‘들어가도 들어가는 모습이 없는 것’ 이를 일러 ‘들어간다’라고 한 것은 앞서 말한 주객이 사라진 자리 종경에 들어간 것이다. ‘성(性)’과 ‘상(相)’은 ‘아는 마음 본성’과 ‘보는 대상 경계’이니 ‘성’과 ‘상’이라고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들어가도 들어 간 바 흔적이 없다. 예로부터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니 그 자리가 본디 부처님 자리인 것이다.


華嚴經云 悉入法界 而無所入 若別有一入處則 入時失本相 不得說種種諸法 以當體自虛 名入法界 無別可入則 不壞種種.


‘화엄경’에서는 “모두 법계에 들어가도 들어간 바가 없다. 따로 들어갈 곳이 있다면 들어갈 때 본래 모습을 잃게 되니 온갖 법을 설할 수 없다. 바탕 자체가 본디 비어 있는 것으로써 이를 일러 ‘법계에 들어간다’고 하기 때문에, 달리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온갖 법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강설) 바탕 자체가 본디 비어 있는 것으로써 이를 일러 ‘법계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법계란 무엇이며 어찌하여 본디 비어 있는 것인가? 현실 속에서 연기하는 것이 ‘법(法)’이며, 법이 지혜를 통해 나타나나 그 쓰임에서 차별이 있는 것이 ‘계(界)’이다. 이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나누어짐이 없이 원융하니, 허공과 같아 모든 것에 두루 통하고 가는 곳마다 현현하여 명료하지 않음이 없다. 결정된 성품이 없어 바탕 자체가 본디 비어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 법계에 들어가더라도 들어간 곳이 없으니, 만약 들어간 곳이 있다면 곧 모든 법의 성품이 ‘공(空)’인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달리 들어간 곳이 없다는 것은 오직 마음이 경계를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달은 것이니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법의 성품을 알기에 온갖 법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又 經云 雖諸法無一無異 而說一異. 故知 要由事相歷然不入 方得相資相遍耳. 若入則 失緣 則無諸緣各異義 不入則 壞性用 不得力用交徹 則無互遍相資義. 若具入不入 則成俱存無礙義. 具此三緣 方成緣起.


또 경에서 “비록 모든 법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더라도 같다고도 설하고 다르다고도 설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모습이 각각 저마다 분명하여 서로 고유한 특성으로 차별이 되어야 바야흐로 서로 돕고 아우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차별 없이 하나로서만 존재한다면 서로 의지하는 반연이 없으니 곧 모든 반연이 제각기 다르다는 뜻에 맞지 않고, 차별이 있다면 서로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성품을 쓰게 되니 작용하는 힘이 서로 대립하여 융합될 수가 없으므로 곧 서로 아우르고 돕는다는 이치에 어긋난다. 그러나 서로 차별이 있으면서도 차별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 함께 존재하면서도 서로 걸림 없다는 이치에 맞는다. 이 세 가지 ‘연(緣)’을 동시에 갖추어야 연기가 성립한다.


강설) 결정된 성품이 없는 법은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할 수 없지만 인연 따라 달리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말한다. 현상계에서는 서로의 모습이 분명히 달라 서로 차별이 있다. 그러나 서로 차별이 있다고 하면 법이 각각 저마다 독립되어 결정된 성품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되니 법계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차별되면서도 차별이 없다고 하니 같이 존재하면서도 걸림 없으되 서로 아우르고 돕는 연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 현상계에 존재하는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의 모습은 자체가 달라 서로 차별이 있다. 그러나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의 본래 성품은 원래 ‘공(空)’이어서 하나의 성품이니 두 모습이 없어 서로 차별이 없다. 법에는 결정된 성품이 없으나 단지 세상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함으로써 마침내 나에 집착하고 경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걸림 없는 청정한 세계에서 홀연 잘못된 생각이 일어나 온갖 중생계를 만들어서 치열하게 시비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了此緣性 則能變通 遂乃 方而能圓 小而能大 狹而能廣 短而能長 無非我心神德自在. 則觸目皆是須彌入芥 擧足住不思議解脫矣. 故云 吾心常分也 豈假於他術乎.


이러한 연기의 성품을 요지하면 곧 신통변화가 가능하여, 마침내 모난 것을 둥글게 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며 좁은 것을 넓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할 수 있으니, 모두 내 마음의 신령스런 공덕이 자재한 것이다. 곧 보는 것마다 모두 수미산이 한 알의 작은 겨자씨에 들어가는 도리이며, 가는 곳마다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늘 있는 일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술법을 빌리겠는가.”라고 한다.


▲원순 스님
강설) 연기의 성품을 알면 신통변화가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연기란 것도 결국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온갖 경계가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는다면 가는 곳마다 해탈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망념도 인연 따라 생긴 것이다. 만약 망념이 본디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연을 기다려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법은 인연을 의지해 생겨나기 때문에 스스로의 바탕이 없는 ‘공(空)’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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