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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장 도법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나’의 실상 바로 알면 누구나 유아독존

종단 개혁 선도·분규 수습 후
실상사로 돌아가 화엄에 천착

이념·계층·정치경제 갈등 대립
치유 해결 고민하다 ‘생명’화두

 

 

 

 

갈등과 소유, 상생과 존재! 우리는 두 갈림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어쩌면, 갈등과 소유에 치우쳐 상생과 존재를 이상과 관념의 상자에 집어넣어 놓고는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 터인데 계층, 이념, 정치, 경제 갈등이 계속 증폭 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전면으로 보인다. 그냥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뾰족한 답은 없다.


이 문제를 직시한 스님이 있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불사를 이끌고, 1998년 조계종 분규 당시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맡아 사태를 해결한 후 실상사로 조용히 돌아간 도법 스님이다. 1990년대 그 누구보다 변화의 몸부림과 갈등을 체험했을 도법 스님. 실상사에서 대중과 함께 ‘화엄’을 꼭 껴안은 스님은 2001년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지리산 1000일 기도’ 후 ‘생명평화’라는 화두를 얻었다. 기도 회향 직후인 2004년 3월, 스님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탁발순례 첫 걸음을 내딛은 이후 2008년 12월까지 5년 동안 2만 8천리를 걸으며 ‘생명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생명! 너무도 절실하게, 너무도 숭고하게 들리는 생명을 가슴에 안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생명’속에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평화가 숨 쉬고 있을 것 같아 도법 스님을 만났다.


탁발 순례길에 만난 사람만도 8만여 명. 궁금했다. 대중은 무슨 말을 하던지. “못 살겠다 아우성이지. 가장 많았던 건 살림문제.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인간관계. 이해, 존중, 배려, 신뢰보다 주장, 무시, 압박, 배신의 단어를 훨씬 더 많이 들었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정치, 경제, 이념, 계층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언이다. 그 대중에게 스님은 무엇을 설파했나. 어렵다는 사람 위안이라도 해 주는 게 스님의 몫일 터. “위안? 어떻게? 위로하면 살림 문제가 풀립니까? 위로하면 이념의 대립 벽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계층 갈등이 봄볕에 눈 녹듯 싹 사라지나요?”


스님은 ‘성찰’해야 한다고 한다. 누가? ‘나’ 자신이. 그 ‘나’가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종교인이든, 중산층이든, 서민이든. 성찰이 없으면 진단과 구호만 있을 뿐 변화는 없다고 단언한다. 스님은 갈등의 이면에 꿈틀거리고 있는 소유욕에 메스를 가했다.


“간디가 한 말이 있지요. ‘현재의 지구로도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한 인간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적확한 통찰입니다. 생존 욕구는 끝이 있어요. 배고플 때 어느 정도 밥 먹으면 숟가락 놓지. ‘이젠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기적 소유욕, 감각적 욕망은 아무리 충족시키려 해도 끝이 없지. 불씨와 같아. 탈 수 있는 조건만 있으면 끝없이 타올라. 50년 전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 백 달러였어요. 지금은 2만 달러 얘기 합니다. 만족도가 높아졌나? 정 반대지. 더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난리지. 어떻게 할 거야?”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어. 돈이 최고야’ 하는 믿음과 논리가 판치고 있는 세상을 향해 도법 스님은 일침을 가한다. “돈 앞에 양심도 개성도 신의도 자존심도 품위도 모두 무너지고 있지. 돈의 노예로 사는 게 아니고 뭔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돈은 적절하게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최고인가? 비인간적으로 살아도 될 만큼? 부자와 일등이 행복하다? 이것도 맹목적 소유욕에 따라 만들어진 허구논리일 뿐이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자와 일등 타령이 우리 사회를 우습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비인간적 삶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평화의 삶을 찾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평화! 왜 평화 위기를 초래했나. 비인간적으로 살기 때문 아닌가? 왜 비인간적으로 살게 됐나? 내 생명의 정체성 즉 내 생명의 모체인 상대의 존재 의미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끓어오르는 이기적 욕망, 감각적 욕망을 쫓아만 달리니 존재가 무엇인지,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 자문하지도 못 해. 종교세 커졌지요. 시민 역량도 커졌고, 대학도 박사도 많아. 지식정보 넘쳐나고, 물질도 풍요로워. 생활도 편리하고 정치 사회적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뤄졌어. 대단한 발전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운가요? 오히려 모순과 혼란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


왜 그런가? 본질은 간단하다고 한다. ‘나’의 존재 실상을 재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어떻게 이뤄진 존재인지, 내 내면의 소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몰라. 좀 더 솔직해 본다면 자신을 들여다보기가 겁나는 거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거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해대니 대립과 갈등만 남을 수밖에.”
이 병폐와 난제를 치유하고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도법 스님은 진정 찾으셨는가? 스님은 부처님 선언을 들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도법 스님

 


“소유 관점에서 부처님을 한 번 봅시다. 부처님. 가사 발우 외에 가진 것 없으셨습니다. 집도 절도 없으셨습니다. 남의 집 돌며 얻어 드셨습니다. 그러나 당당했습니다. 왜? 다 갖춰져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내 스스로 다 갖춰져 있음을 확실히 안다면 무엇을 더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갖고 있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나’의 존재를 규명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명쾌한 답변이 또 있을까 싶다.
“‘나’에 대한 실상의 긍정적 표현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고, 부정적 표현이 연기, 무아, 공입니다. 필요에 따라 표현을 달리할 뿐 같은 맥락입니다.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온 세상이 모두 고통에 잠겨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누가? ‘나’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러 하셨듯이, 나도 온 몸을 던져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쯤 되면 동체대비가 발현됩니다.”

 

화엄 바다서 건져낸 상생·연기
3만리 걸으며 ‘평화씨앗’ 뿌려

단순한 삶 통해 소욕지족 실천
내가 변해야 세상도 평화로워


자비와 사랑이 충만한 세상. 이상세계라 하겠지만 설계하고 구축해 낼 수 있는 세계다. 내가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체득하고, 세상의 고통 해결에 나서면 가능한 세계다. 도법 스님은 화엄에 기인한 인드라망을 펼쳤다.
“화엄경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나와 너, 나와 우주가 다 하나의 유기체라고. 승조 스님은 ‘천지는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 하셨고. 의상 스님은 ‘하나의 먼지에 온 우주가 함께하고 일체의 먼지들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셨지요. 인드라망처럼 한 세계가 살아 있는 그물이라면 낱낱 존재들은 그물코와 같지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거지.”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만 보아도 나와 꿀벌 한 마리도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꿀을 따러 나간 벌들이 전자파로 인해 길을 잃어 귀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사과, 포도 등의 먹거리가 줄어들고 급기야는 아예 생산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진다. 꿀벌 없는 내 삶도 그만큼 고달파지는 것은 자명한 일.


“그러기에 내가 존귀한 존재면 타인도 존귀한 존재라 봐야 옳지. 이를 확장해 보면 내가 있기에 네가 있고, 네가 있기에 내가 있음도 여실하게 알 수 있지 않나. 너를 죽여야 내가 살고, 네가 없어도 나는 있다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지.”
도법 스님이 대중과 함께 ‘생명’의 화두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세상에서 생명 보다 더 귀중한 게 있는가? 이념, 소유, 경제, 정치가 고귀한 생명보다 높은 윗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 4대강 살리기, 북한동포 돕기, 무상급식, 복지 정책을 놓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식의 주장만 있다. 양측 주장의 대립을 놓고 선악을 논할 순 없다. 그러나 진정, 생명의 눈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았는가는 자문해 볼 일이다.


“미래를 예언하는 게 신기한가? 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인가? 목이 너무도 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가 그에게 물 한 모금 주었더니 살아났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났다! 기적이지. 내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자체도 불가사의 하고 아주 신비로운 일이지. 나만 살고 있나? 당신도 살고 있지 않은가. 인간만 살고 있나?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도 숨 쉬고 있어요. 우리 눈앞에 신비로운 세상이 매 찰나 펼쳐지고 있단 말이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거룩하고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상생이다. 그 속에 평화가 자연스럽게 깃든다. 생명평화! 모든 게 완연해진다. 부처님 탄생게에 이미 나와 있듯이 나의 존재실상을 안다면 삶의 방식도 바꿀 수 있다. 도법 스님은 ‘소욕지족의 단순 소박한 삶’을 권한다.
도법 스님은 18세에 출가했다. 유복자였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아버지 이야기는 딱 두 토막이다. “누가, 아버지 왜 돌아가셨느냐 물으면 아파서 돌아가셨다 해라.” 스님의 부친은 제주 4·3항쟁에 연루 돼 생을 마감했다.

 

▲사진제공 불광출판사

 “너의 아버지는 농부였지만 깔끔했다.” 이게 다였다. 금산사로 출가했다. 어머니 병고가 깊다는 연락을 받고도 ‘출가한 이는 세연을 끊어야 한다’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었다. 도반이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출가인 이전에 한 인간이고 어머님의 아들이야.” 순간 ‘꽝’했다. 죽음! 그것이 무엇인지 미칠 지경이었다. 알려고 들면 들수록 허무로 빠졌다. 강원으로 향했다.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안다고 한다. 그래서 선방으로 향했다. 10년 여 있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나왔다. 그리고 ‘화엄’을 안았다. 화엄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보물 ‘생명평화’. 출가 40여년, 인생 60여년의 삶을 통해 얻은 화두다.


도법 스님의 원초적 물음 ‘죽음’은 해결된 것일까?
“오직, 지금 여기 직면한 존재의 구체적 사실과 진실 즉 실상을 보여주고 말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지. ‘그래, 그런 거지’ 하고 미소를 지으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이제 조금 숨 쉴 만하고, 홀가분 해. 삶이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그래서 삶이 그런대로 괜찮아요.”


멋진 삶 아닌가.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화두를 들고, 소욕지족의 단순 소박한 삶 쪽으로 조금만 방향을 튼다면 말이다. 길에 뿌린 생명평화의 씨앗, 시절인연이 닿으면 하나둘씩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어쩌면 벌써 꽃 한 송이 얻은 사람도 있으리라.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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