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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화림산방 정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인간은 죽어도 ‘나’는 생사가 없으니 매일 매일이 ‘좋은날’

인생의미 찾다 화엄사 발길
금오스님 법문에 17세 출가

달마 그리려 처음 붓 잡은 후
91년부터 작품 10만장 보시

 

 

▲정현 스님

 

 

마곡사 일주문을 지나 ‘백범 김구 선생 명상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 길, 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 산 중턱으로 오르는 길이다. 정현 스님이 머무는 ‘화림산방(畵林山房)’은 분명 오른쪽 길 어딘가에 있을 터. 오르고 또 오르니 길 끝나는 곳에 작은 암자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다! 예쁘게 생긴 목인(木人)이 암자를 찾은 이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중국 선사 운문(雲門) 스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안거하던 동안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안거 끝난 다음에 대해 한마디 해보라.”
대중이 침묵하자 운문 스님 스스로 말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안거 이전과 이후의 차이. 수행하기 전과 이후의 차이. 깨닫기 전과 이후의 차이. 그 뜻을 묻는 듯한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매일매일 좋은 날!


철학과 문학을 좋아했던 10대 후반의 청년은 친구와 함께 수행차 화엄사를 찾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 하나가 그의 가슴에 꽂힌 순간부터 그 답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허사. 혹, 산사 도량에 앉아 있으면 답의 실마리라도 찾을까 싶어 찾은 화엄사였다. 금오 스님이 법상에 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오 스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다. 법문이 시작됐다. ‘해탈법문’이 귓가에 도달하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여기에 길이 있구나!”


친구는 며칠 후 입대 문제로 귀가했지만, 청년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전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세납 17세.


30대 초 언젠가부터 붓을 들었다. 달마를 그렸다. 옛 선비가 한 번쯤 사군자를 쳤던 것처럼 선사는 달마를 친다. 정현 스님도 그러했다. 어느 순간부터 단청색이 눈에 들어왔다. 문수동자를 그려보다가 어느 때는 새를 그려 보았다. 연꽃을 그리다가 그와 어울리는 물고기도 그려보았다. 마음 가는대로 선을 긋고 색을 넣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후 1990년대 초, 그림 하나를 올곧이 완성했다.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 정현 스님은 처음 붓을 잡았을 때 달마를 그렸다. 정현 스님의 달마도는 섬세하면서 기품이 있다.

 


스님은 자신의 작품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를 대중에게 보급했다. 1991년 시작해 2001년까지 1만장의 그림을 손수 그려 대중에게 전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는 무려 9만장을 보급해 총 10만장의 ‘날마다 좋은 날’을 그렸다. 물론 이 9만장은 목판(초. 기본 틀)의 편리함을 빌려 제작됐다. 그렇다 해도 채색은 스님이 직접 넣은 것이다. 원력 없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정현 스님은 대중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현 스님은 서암 선사의 주인공을 꺼내 들었다. 서암 선사는 매일 자신을 향해 ‘주인공아?’묻고는 스스로 ‘예’라고 답했다. ‘깨어 있는가?’ ‘예’, ‘언제 어디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 ‘예.’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 선문답으로 무문관 12칙에도 나온다.


“사람들은 잘 몰라요. 자신이 누구인지. 껍데기만 알 뿐, 주인공을 몰라. 저 나무를 보는 놈이 있고, 그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의 노래를 듣는 놈이 분명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를 모른단 말이지.”
내 안에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단 말씀일까? 아니다. 한 사람이 두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서암의 문답에서 보듯이 한 사람이 부르는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대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서 한 사람이 두 역할을 한다고 보면 이는 분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오욕칠정에 매여 분별망상에 떨어진 자신을 한 번 부정해 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떨어져 묶이면 헤어나기 힘들어요. 머무는 곳마다 내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오욕칠정에 매여 사니 인생이 고달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 무상을 체득하기는커녕 엿볼 수도 없어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는 서암 스님의 말씀은 곧 ‘깨어 있으라’는 말의 다름 아니라고 봅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작품 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눈 뜬 물고기!’

 

 

▲ 정현 스님은 지난 2010년까지 20년 동안 작품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10만장을 대중에게 보시했다.

 


언젠가 이외수 작가는 물고기가 눈을 뜬 채 잠을 자는 것은 “물이 언제까지나 깨끗한 채로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라 했다. 멋진 표현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세계, 법계의 청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현 스님의 눈 뜬 물고기는? 다름 아닌 ‘깨어 있음’이다. ‘내가 깨어 있어야 세상은 청정할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 행보를 스님은 주문하고 있다. 화두를 들고 있음도 깨어있음이요, 한 호흡, 한 걸음을 보는 것도, 찰나 간의 심적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도 깨어있음이다.


“본래마음은 다 청정하다 했는데 자신을 모르니 헛일만 저지르며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일례로요, 나만 잘 살고 타인은 죽어도 상관없다 하는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공명조 삶을 우리도 답습하는 거지.”
공명조(共命鳥).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둘인 새. 먹는 입이 다르고 생각하는 머리가 다르다. 어느 날, 한 쪽 머리가 다른 머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혼자 맛있는 과일 하나를 먹었다. 다른 머리 하나가 잠에서 깨어 난 후 이를 알아차렸다. 동고동락 했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과일을 혼자 먹었다니! 분노가 끓어올랐다. 급기야 다른 머리에게 독초를 먹여 죽였다. 그렇다면 독초를 먹인 머리는? 머리는 둘이어도 몸은 하나이니 같이 죽을 수밖에. 결말은 같지만 상황이 다른 버전도 있다. 분노에 찬 머리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독초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전후 어떤 것이든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깨어 있는 눈뜬 ‘물고기
한 몸 두 머리 ‘새’ 소재
나와 세상은 둘 아닌 하나
‘나’를 알면 문수지혜 발현


나와 너가 둘이 아니고, 나와 이 세상, 우주가 둘이 아니라는 ‘화엄경’의 진수를 스님은 공명조를 통해 열어 보이고 있다. 스님은 연꽃도 자주 등장시킨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했지요. 속세에 살고 있어도, 이 세상이 다소 혼탁하다 해도, 우리는 연꽃처럼 거기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만의 향기를 가질 수 있어요.”
스님의 작품 속 주인공은 문수동자다. 원래 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있는데 작품 속 문수동자는 소를 타고 있다. 왜 소일까?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동자가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해 보인 그림이 있지요? 심우도(尋牛圖, 十牛圖) 그겁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열 폭의 그림에 다 들어 있어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심우도. 소는 인간의 본성과 불성을, 목동은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자에 비유된다. 중국에서는 소 대신 말로 상징한 시마도(十馬圖)가, 티베트에는 코끼리로시상도(十象圖)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은 득우와 입전수수 대목이다.
소를 얻었다는 득우(得牛) 과정에서는 동자가 소의 목에 막 고삐를 건 모습으로 표현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혹에 동요하기 쉬운 미숙한 단계다. 더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심우도는 일러주고 있다.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는 육도중생의 세계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지팡이에 포대를 맨 행각승(行脚僧)의 모습으로, 또는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돌아간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회향이다.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현 스님은 ‘소’를 통해 끊임없는 정진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정현 스님 작품에는 간절한 바람, 즉 원력을 세워보라는 ‘숨은 그림’이 배치돼 있다. 문수동자 머리와 귀 부분을 유심히 보면 빨갛기도 하고, 노랗기기도 하며, 파랗기도 하다.


“머리에 염색을 하지요. 그냥 하면 ‘멋’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 하겠다’는 마음을 다잡고 노랑염색을 한다면 그건 원력이지요. 작은 원력이라도 세울 줄 아는 사람이 큰 원력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귀 부분도 독특하게 처리했는데 이 역시 좋은 소리만 들으려 노력해 보라는 바람입니다.”


이제야 스님의 작품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가 이해된다. 이 그림을 그리는 정현 스님, 이 그림을 받은 대중 모두가 문수동자의 지혜를 발현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 가자는 의미가 농축돼 있다. 여기 이 자리가 극락이요 정토라는 것이다.
동자가 소를 찾아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길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자가 소를 찾으러 나간 것보다는 우리가 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동자가 찾아 낸 소를 타고 있지 않은가. 선지식이 있는 만큼 길을 떠나되 동자처럼 숲을 헤맬게 아니라 자신 내면의 세계로 떠나보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정현 스님은 “이미 소를 타고 있는데 어디서 소를 찾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자신, 문수동자가 곧 우리임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공명조, 어리석은 생각을 말라. 눈뜬 물고기, 늘 깨어 있어라. 연꽃, 물들지 말라. 소, 정진하라. 그러면 문수동자와 같은 지혜를 발현해 한 생을 살 것이다. 정현 스님은 이 메시지를 단청의 원색을 통해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청년 시절 금오 스님으로부터 들은 해탈법문처럼 정현 스님은 그림을 통해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단순한 백지 위 선과 색을 넘은 무정설법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정현 스님은 말하고 있다. 방 거사가 줄 없는 거문고를 튕긴 것처럼, 우리도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수 있다고.


정현 스님은 또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했다.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난 바가 없으니 죽지도 않습니다. 옷 한 벌 갈아입은 셈일 뿐이지요.”
그 ‘나’는 정현 스님만이 아니다. 그 ‘나’는 ‘우리’다. 소 위에서 매일매일 무공적(無孔笛)을 부는 문수동자가 바로 ‘우리’라고 스님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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