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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청량사 주지 현엽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나’ 내세운 기도엔 일말의 성취도 없다

 

▲현엽 스님

 

 

부산 명지동에 자리한 청량사. 포구나무를 스쳐 온 바람이 청량하다. 청량사는 지금의 이름이고 이전에는 연화사였다. 그 이전에는 장유암 교당으로 불리어졌는데 그만한 연유가 있다.


청량사가 위치한 명지동 사취등(沙聚登) 마을은 1800년 중반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청량사터 300여평만이 바다 위 섬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낙동강 모래가 쌓여 형성된 모래톱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당산나무라 불리는 포구나무는 절이 세워지기 100년 전부터 모래톱과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4년과 1865년에 변혁이 일어났다. 두 해에 걸쳐 일어난 대홍수와 산사태가 바다를 육지로 바꾸어 놓은 것. 지금의 대동, 대저, 명지라는 새 땅은 그 변혁 속에서 잉태됐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며 작은 마을이 형성돼 갔다. 범람도 잦았던 터라 사람들은 포구나무 앞에서 ‘마을 안녕’을 기원했다. 그 언젠가부터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의 조짐이 있을 때마다 변을 예고하는 북소리와 목탁소리가 울려 펴졌다. 명지동(鳴旨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북과 목탁 소리를 들으며 변고를 피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멋진 삶 영위 가능하단 말에 17세 청춘에 강천사로 출가
낡은 솜 하나 쓰는 일에도 부처님 허락구했던 은사스님


불연의 씨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금도 스님이 부처님을 모시며 장유암 교당을 세웠다. 이후 이 교당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연화사로 불리어졌다. 사취등 일대가 홍수로 물에 잠겨도 이 절만은 홀로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물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과 같았기 때문이다. 1958년께 홍경 스님이 주석하며 조계종 청량사로 개칭한 후 1961년 범어사 말사로 등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1년 현엽 스님이 청량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사찰은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아직 불사가 회향되지 않아 손볼 곳이 간혹 눈에 띄지만 그래도 도심 한복판의 전통사찰로는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청량사 법회가 새 활기를 띠고, 수행하고자 하는 불자들이 부쩍 증가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스님의 원력이 어떻게 활용되었기에 이러한 변화를 불러 왔는지가 궁금했다. 


청량사 게시판에 걸린 ‘지침의 글’ 한 편이 눈에 들어온다.


날마다 수행하고(日日功夫)

가족과 함께 하며(家族敎化)

스스로 베풀고(自願布施)

좋은 인연을 만들며(因緣善業)

밝은 마음 되길 발원하라.(明心發願)


분명, 청량사의 진면목은 이 글에 모두 스며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청량사 수행 열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매월 첫 번째 일요일마다 봉행되는 일요법회에서는 200여명의 불자가 운집해 ‘대불정수능엄신주’를 독송한 후 108배를 올린다. 이 정도는 여느 사찰에서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니 그리 특이하다 볼 수는 없다. 놀라운 것은 청량사 불자라면 대부분 매일 능엄주와 108배를 올린다는 사실이다. 수행 일편이 하루일과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셈인데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10년 전에 매일 108배를 해보라 하니 실천해 보기도 전에 고개를 젓더군요. 일상의 일도 추스르기 힘들 지경인데 1시간이나 걸리는 수행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불자들의 수행생활화가 녹록치 않음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서둘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안 되면 한 달, 한 달 만에 안 되면 1년 만에 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한 명으로 시작 해 10명으로 늘리고, 100명으로 늘려갔다. 


현엽 스님은 17세 되던 해 대해 스님을 은사로 제천 강천사에서 출가했다. ‘보리심을 증득 하겠다’는 원력을 세워서가 아니다. 출가하기 직전 무섭게 생긴 사람들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꾸었다. 악몽이라 생각했던 청년은 인연 있던 스님께 여쭤보았다. 스님은 “신장님이 다가가려는 것일 뿐”이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살아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진 삶!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해졌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출가해 공부하면 무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때가 세납 17세.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후 송광사로 발길을 돌렸다. 좌복에 앉아 ‘시심마’ 화두를 들었다. 화두가 챙겨질리 없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9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앉아 있는 시간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스님 말 그대로 ‘몸이 죽을 지경’이었다. 해인사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하루 열두 번도 더 도망가고 싶었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보다 늦게 출가한 ‘후배’들도 딱 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데 ‘선배’인 제가 먼저 일어날 수는 없었지요.”
며칠이 지나자 힘이 생겼다. 단순히 오래 앉을 수 있는 ‘인내’가 아니었다. 10시에 취침해 새벽 2시에 일어나 좌복에 앉아 화두를 들었다. 힘은 더욱 생겨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심이 가슴 한 자리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경험이 청량사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안 된다,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적 강요가 아니었다. 불자들을 설득해 갔다. 기도의 공덕은 물론이고 기도를 함으로써 얻는 힘을 설파해 갔다.


“기도는 ‘나’를 바로 잡아 줍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일수록 번뇌망상에 끌려 다닐 뿐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어디를 향해 걸어도 어지러운 행적만 남길 뿐입니다. 방황할 때 ‘기도 한 번 해보자’는 결심만 세워도 중심이 잡힙니다. 불보살님에 의탁해 시작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기도의 힘이지요.”

 

수행 일상화·선연 맺기 강조 도심사찰 새로운 변화 이끌어
사찰 불사보다 인재양성 시급 청미단 이끌며 계층포교 매진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월례 법회는 물론 일요 법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기도하며 절을 올렸다. 평일에 나와 홀로 1000배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내 3000배, 나아가 1만배를 올리는 불자들이 줄을 이었다. 기도수행 열기가 점점 오를 무렵 불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나를 내세우지 말라’고.


“초발심 낸 분이 묻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왜 성취가 되지 않느냐고. 씨를 심었는데 왜 열매가 열리지 않느냐는 ‘항의’인 것이지요.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간절하려면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하려면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은 사람은 수행 중에 고비가 닥쳐도 끝내는 극복합니다. 하지만 ‘나’를 앞세운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포기합니다. 그동안의 기도가 물거품 되는 순간이지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도는 처음부터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부산 청량사 대웅전과 당산나무. 당산나무는 수령이 250여년 됐다.

 


현엽 스님은 법회 때가 아닌 평상시에도 부처님 말씀 한 구절이라도 간직하며 살라 강조한다. 마치 선사가 화두를 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절을 올리는 것도 공부고, 경전 한 구절 독송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매일 공부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요.”
‘가족교화’라 해서 남편, 아내부터 포교하라는 게 아니다. 절에 다닌다면, 공부를 하는 불자라면,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게 현엽 스님의 주장이다.


“말 한마디라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절에 다니기 이전, 수행하기 이전과는 달라야 합니다. 적어도 남편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수행한다더니 뭔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도량에서는 단어 하나도 조심해 쓰면서, 집에 가서는 막말 그대로 쓴다면 ‘도대체 절에 가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핀잔만 들을 뿐이지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보시도 절에 내는 금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눔’의 마음을 가정과 이웃에게 펼쳐보라는 말의 다름 아니다. 그런 나눔의 마음은 곧 선연으로 이어질 것이다. 선연 속에서 피어나는 ‘밝은 마음’이 곧 정토를 밝혀가는 한 줄기 빛이라는 점을 스님은 전하고 싶은 것이다.


현엽 스님은 옛 스님 말씀 그대로 ‘삼보정재’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스님이 참여하고 있는 소모임 자리에서도 공양비는 무조건 1인당 3만원 이내에서 해결하자는 주장을 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작은 일 같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엽 스님은 은사 대해 스님의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어느 겨울 대해 스님은 법당에 놓여 있던 방석 하나를 부처님 전에 올리고는 절을 올렸다.


“부처님! 이 방석 안의 솜을 제가 쓰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어린 현엽 스님 눈에도 이상한 광경으로 다가왔다. 말이 방석이지 거의 다 해진 방석이었다. 대해 스님은 방석 속의 솜을 꺼내 다소 긴 천에 넣더니 바느질해 갔다. 목도리였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방석의 솜 하나 쓰는데도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허락을 받으려 하는 그 마음 하나가 그 어떤 가르침 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청량사 불자조직과는 별도로 스님은 ‘청미단’이라는 다소 생소한 단체를 이끌고 있다. 청미단은 청년미륵단체의 줄임말인데 일종의 청년불자단체다. 1986년 스님은 부산불교사회교육원을 개설해 원장직을 맡은 바 있다. ‘사회교육’이라는 말 자체도 ‘불온’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사회였으니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간판조차 걸기 버거웠다던 시기다. 그럼에도 스님은 그 사회교육원에서 ‘통일’을 주제로 강의까지 했다. 오해와 압력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직장인을 상대로 한 강의는 소문을 타고 하나둘씩 강의실을 채워갔다. 그 때 모인 불자와 이후 운집한 청년이 함께 어우러진 단체가 ‘청미단’이다. 청년불자 양성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인재를 육성하지 않고는 불교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절 불사보다 인재불사가 더 급선무라는 게 스님의 주장이다. 학술, 문화,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를 우리 스스로 길러 내자고 한다. 비록 힘들고, 다소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 시작하자고 한다. 승재가 모두가 한 번쯤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청량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충격적인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정도를 걸어가는 현엽 스님이 있었고, 믿고 따르는 불자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변화가 일었다. 그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청량사에 거는 기대가 여기에 있다.


분명, 머지않아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행문화가 정착될 것이다. 스님은 오늘도 ‘시심마’ 화두를 들고 있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엽 스님
1971년 제천 강천사에서 출가했다. 1976년 해인사 승가대를 졸업한 후 해인사, 송광사, 망월사, 수도암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했다. 조계종 호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부산 청량사 주지, 부산 강서구장학회 이사. 부산 강서경찰서 경승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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