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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풀꽃이 되자! 이름 없다 해서 향기도 없으랴

 

 

 

낮에는 승복을, 저녁엔 교복을 입었다.
“난 스님인가, 학생인가?”
빗속을 걸었다. “그래, 난 스님이야!”
어머니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스님, 공부 열심히 하시게.”

아이들이 버스타고 산길을 걸어 산사를 찾아왔다.
“경운기 스님 보고 싶어서. 도량에서 놀고 싶어서. 그냥 오고 싶어서….”
눈물이 흘렀다.

지역 주민들에 보답하고 싶어 산사음악회를 열었다. 폭발적이다. 1만 신도에 연간 참배객 50만.
나누자. 매일 봉사하고 공부하자. 향기가 날 것이다.

 

 

9세 소년이 ‘삼촌스님’ 손을 잡고 출가했다. ‘이 몸이 얼마나 살겠기에 일생을 닦지 않겠느냐’는 원효 스님의 말 한마디도 모르던 소년에게 집을 향한 그리움은 사무쳤을 터. 11세에 이르자 며칠이 멀다하고 “집에 보내 달라”며 하염없이 울었다. 혼자 귀향길을 나섰지만 일주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딱, 거기까지였다. 바람이 산사 나뭇가지에 닿았을 때 낸 소리를 들었으리라.


낮에는 승복을 입었지만 저녁엔 교복을 입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이르던 어느날 비가 내렸다. ‘난 스님인가, 학생인가?’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는 ‘금강경’ 한 줄도 아직 가슴에 닿지 않았을 그의 정체성에 혼란이 인 것이다. 빗속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순간 마음 한 조각이 꿈틀거렸다. ‘그래, 난 스님이야!’ 바람이 비를 만나 낸 소리를 그때도 들었으리라.


입대 전, 늦은 밤 고향을 찾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뒤늦게 알아보고는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 쌀을 씻었다. 아들의 뺨을 스쳐 지나간 바람이 어머니 눈가에 머물렀을 때 낸 소리도 그는 조용히 들었으리라.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비비추 새순을 된장국에 넣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던 시절에도, 토굴에서 홀로 별을 바라보며 아린 외로움을 달랬던 시절에도, 고향은 유년의 뒤편 추억일 뿐이었다. 청량사 주지 소임 초기  고향 사람들이 산사를 찾았다. 아버지 환갑 기념 여행길이었던 것. 너무도 무심했던 게 마음에 걸려 어머니 손을 잡아드리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찰나가 겁으로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도량 한 구석에 혼자 눈물 흘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또 손을 잡지 못했다. ‘어머니’ 대신 ‘보살님’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왜, 여기 계십니까?”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님, 공부 열심히 하시게.”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을 맡고 있기에 일주일에 5일은 서울에 머물지만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경북 봉화로 달려간다. 단장을 맡기 전 청량사 불자분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제가 단장을 맡으면 세월의 반은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스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스님과 불자, 주지와 신도 사이에 밴 신의가, 믿음의 돈독함이 어느 정도인지 읽혀지는 대목이다.


지현 스님은 1986년 처음 청량사를 찾았을 때를 회고했다.
“비가 새는 법당, 거의 다 무너져 내린 요사채, 말 그대로 폐사지였습니다.”
방 안을 보니 ‘주지 임명장’이 수북이 쌓여 있더란다. 1년은 고사하고, 한 두 달도 안 돼 떠난 스님이 그토록 많았다는 얘기다. 별과 꽃은 도반이 될 수 있었지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법당에 켜진 촛불은 그렇지 못했다. 아련한 촛불에 비춰진 건 서글픔이었다.


“신라시대 원효, 의상대사가 창건한 청량사는 창건 당시 33개의 부속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합니다.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암자에 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하구요. 대찰의 흔적은 찾아보기도 어렵고, 그나마 남아 있는 전각도 비가 새고 무너져 내리니….”


혼자 기도하고,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며 절을 고쳐 나갔다. 땅을 다지며 돌을 날랐다. 짬짬이 인근 지역을 돌아다녔다. 새 기와 올리는 집에 사정해 폐기와를 얻고, 새집을 짓는 사람에게서 나무를 얻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스님만의 작지만 큰 불사를 이어갔다. 1년 7개월. 이젠 불자들이 청량사를 찾을 것이라 생각하고 등 50여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초파일 법회 때 걸린 등은 27개.


‘삼촌스님’ 손잡고 9세 출가


걸망 하나 달랑 메고 마을로 내려갔다. 반상회에 얼굴 내밀고, 여름이면 함께 고추 따고 풀을 베었다. 고맙다는 인사에 “언제, 마을회관 한 번 들려 달라” 청했다. 농사일 다 끝나고 저녁공양까지 마친 저녁 9시시면 회관에서 법회를 열었다.


아이들 노는 틈에 끼어 술래가 되어 주었다.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주머니에 든 사탕 하나 건네주고는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없는 살림 쪼개고 쪼개 경운기 한 대 샀다. 청량사와 마을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셈이다. 경운기에 올라 탄 아이들은 절까지 따라왔다. 천진불이 뛰어노는 도량은 새 활기를 찾았다. 꼬박 4년. ‘지현’이라는 법명 대신 ‘경운기’스님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인근 지역에 사는 초등학교 2, 3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 손을 잡고 절에 옵니다. 어른들은 핑계가 많지요. 비가 와서, 결혼식이 있어서, 손님이 온다 해서. 아이들 역시 걸음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들 몇몇이 절을 찾아 온 겁니다. 영주에서 아침 8시40분 버스를 타고 산길을 걸어 온 겁니다. 최소 2시간은 걸리는데…. 어찌 왔냐 물으니 아이들이 말합니다. 절에서 놀고 싶어서, 경운기 스님 보고 싶어서, 부처님 보고 싶어서, 그냥 오고 싶어서….”


지현 스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출가 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교계에서 산사음악회를 최초로 연 것도 지현 스님이다. 어느 날 경북도민체육대회가 있어 운동장을 찾았다. 가수 김건모가 온다는 소식에 10만 인파가 몰렸다. 알고 보니 진짜 가수 ‘김건모’아니라 ‘닮은 김건모’였다. 느끼는 바가 있었다.


“절을 찾아주는 봉화, 안동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보답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전해야 하나.”
그러다 무릎을 ‘탁’ 쳤다. 문화를 전하자! 시골 분들이라 해서 어찌 문화갈증이 없겠는가. 장사익, 안치환, 오정해, 신효범 등 내로라하는 예인들이 지현 스님의 마음에 감동해 산사음악회를 빛냈다. 해마다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천년의 소리, 천년의 북’, ‘서양과 동양의 만남’ 등의 주제로 음악회가 열렸다. 달빛에 어우러진 소리를 가슴에 담은 사람들은 청량한 바람 한 점을 안고 산을 내려갔다.


시 낭송회와 시화전이 열리고, 미술전시회는 물론 청량산 바위에 새겨진 글과 그림을 모은 탁본전도 열었다. 신도수가 1만여명이다. 등산객을 포함한 수치지만 연평균 25만 명이 청량사를 찾았다. 선학봉과 자란봉을 잇는 현수교량 ‘하늘다리’가 개통되고 보니 참배객은 50만에 육박하고 있다.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로의 인식전환이 일궈 낸 대 변혁이다.

 

 

▲ 청량사 찻집 안심당에 이는 바람은 어떤 소리를 낼까.

 

 

 

▲ 청량사를 찾는 참배객은 연간 50만명에 이른다.

 


1970년대 어느 날 논산 관촉사에 머무른 적이 있다. 도량을 거닐다 담 밑에 앉았다. 여행 온 여고생들이 서로 웃으며 뭐라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스님이 시계를 찼어, 시계를!”
시계 찬 스님이 왜 신기할까? ‘스님은 재만 올리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구나. 큰일 났다. 아니,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은 스님밖에 없는 줄 아는구나. 다행이다.’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었다.
“저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 아니, 그 동생과 그들의 부모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야지.”


포교 원력은 이 때 세워졌다. 스님이 어린이 찬불가 동요를 보급하고, 합창단을 조직하고, 장애인복지관을 수탁해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심사찰을 보자. 어린이 포교에 공을 들이는 사찰이 몇 퍼센트나 될까?


“20년을 투자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중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군입대를 해도 불교와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꼭 내 사찰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 지역 사찰로 안내해 주면 되는 겁니다. 계층별 포교는 절대적입니다. 특히 어린이 포교를 지금 하지 않으면 당장 20년 후 불자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농부의 땀 없이 풍요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현 스님의 계층별 포교 속엔 ‘문화’가 있다. 문화 속에 법음이, 법음 속에 문화가 스며있다. 군 제식훈련을 연상시켰던 여의도 초파일행진을 연등축제로 자리매김 한 인물이 지현 스님이요, 다보탑 일색이었던 시청 앞 점등식에 연꽃과 같은 예술미를 더한 조각작품을 밝힌 것도 지현 스님이다. 법에 문화가 스며들었을 때 어떤 파급 효과가 있는지를 스님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어린이 포교, 20년 투자해야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지현 스님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포교’ 이상의 그 무엇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세상을 향한 메시지라 하면 너무 거창합니다. 다만, 요즘 불자분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기는 합니다. 하나는 ‘나누면서 살자.’ 수입의 2%는 나와 가족이 아닌 이웃에 회향하자는 겁니다. 선가귀감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을 하거든 능력따라 베풀라’ 했습니다. ‘한 몸이라 생각하는 큰 자비가 참다운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매일 봉사하자.’ 하루 시간의 2%만이라도. 친구에게, 이웃에게, 도반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봉사입니다. 또 하나는 ‘매일 나를 위해 공부하자.’ 하루 시간의 2%만이라도. 세상사에 매이다 보면 자신을 돌아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한 세상 살다 갑니다. 불교 공부든, 인문학 공부든, 기도든, 좌선이든 무엇인가 하나는 정해 매일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날 겁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가자는 말이다. 내가 꽃이 되고, 당신도 꽃이 되자는 뜻이다. “풀꽃이면 어떠합니까. 이름 없다 해서 향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지현 스님은 청량사 찻집을 지으며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 이름했다. 이 연유를 묻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인지. 아니면 다소 허전해 보여서인지는 몰라도 후에 ‘차 한 잔 하며 마음이라도 편안히 가져 보라’는 뜻으로 ‘안심당’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했다.


바람은 무엇인가 만나야 소리를 낸다. 찻집에 앉아 무엇을 만나 어떤 소리를 듣는지는 자신의 몫일 터. 꽃을 만난 바람은 향기를 더더욱 멀리 퍼지게 할 것이다. 지현 스님과 동행해 보라. 그 인연 길에서 감풍(甘風)의 소리 한 점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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