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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불탑의 영원한 고향, 위대한 산치를 찾아

기자명 법보신문

타종교 박해 속에도 살아남은 산치 스투파

 

▲승원 폐허에서 바라다 본 대 스투파.

 


드넓은 인도 대륙 어디서부터 풀어나갈까 생각했는데, 본격 답사 첫 기착지 산치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한국 불자들이 자주 가는 8대 성지에는 비켜나 있으나 생전에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동아시아 탑의 영원한 고향이다. 한국 탑 관련 책 앞머리에 반드시 등장하는 산치 대 스투파가 바로 거기에 있다. 동시에 백 년 전 일본인 학자들이 멋도 모르고 이름붙인 용어를 해방 후 7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학자들이 그대로 베껴 쓰고 있는 오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1818년 영국 장군이 발견


시작 전 독자들이 알아야 할 기초, 층층 쌓아올린 동아시아 불탑을 탑이라 부르는데, 원조 인도 불탑은 둥그런 모양이므로 원 이름 그대로 ‘스투파’로 불러야 맞다. 인도 발음 ‘스투파’가 줄어서 한자로 ‘탑파(塔婆),’ 더 줄어서 ‘탑’이 되었다. 스투파는 인도 불교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앞으로 몇 차례 더 자세히 볼 것이다.


2006년 12월19일 새벽 어둠에 잠든 시커먼 빠르간지 골목을 지나 인근 뉴델리 역으로 향했다. 골목 곳곳에서 배낭 여행객들이 물줄기처럼 합류하였다. 빠르간지는 지금은 재개발되어 없어진 서울역 앞 골목같이 배낭 여행객 특히 한국인들이 애용하는 여관 골목이다. 인도 숙소 이름은 전부 호텔이지만 필자가 묵은 곳은 주로 여인숙 급이다. 6시17분 발 보팔 행 샤탑디 특급에 올랐다. 대륙을 죽 돌면서 여명(黎明), 밝아오는 새벽의 대자연을 살갗에서부터 가슴속까지 느꼈다. 차창 너머 조금씩 밝아오며 멀리 지평선까지 검은 점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작은 관목들이다. 인도 전역에서 늘 볼 수 있는 풍광이다. 필자가 이미 두 번이나 가본 유명한 타지마할의 아그라 역에 수많은 승객들을 내려놓고 열차는 계속 달린다. 인도 열차는 침대 차 위주이지만 여기는 단거리(?)이기 때문에 그냥 전부 의자식이다.


8시간 좀 더 달려 오후 2시 반 대도시 보팔역에 도착했다. 남한 지도를 다섯 배 정도 튀기면 보팔은 대전 정도로 인도 한 가운데 위치한다. 1984년 필자가 미국 유학 당시 자동차 부동액으로 유명했던 유니온카바이드 회사 보팔 공장에서 살충제 원료 독가스가 유출되어, 못사는 죄로 인도 국민 수만 명이 목숨 잃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했던 세기의 대 참사 도시 그 보팔이 여기 있을 줄이야. 30년 지난 오늘 뉴스에 아직도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신 다국적 기업 다우케미컬에 항의하고 있단다. 자연 순리를 거스르고 돈만 움켜쥐려는 탐욕의 자본주의는 욕심을 버리라는 석가모니 불교 정신과 대비된다. 
 

산치행 열차는 1시간 뒤에 있었다. 일반표를 끊었으나 열차 길이가 하도 길어 제 칸을 찾지 못해 이 후 인도 여행에서 죽 애용하게 된 2등칸 연결 통로에 자리 잡았다. 물론 불법이고 걸리면 벌금도 낸다는 곳에 한 시간이나 서서 갔다. 산치는 그야말로 한적하고 조그만 마을이었다. 부리나케 두 개 뿐인 여관 한 곳에 짐을 내리고 산치 단지 입구로 향했다. 외국인 입장료가 5불인데, 문지기 말이 지금 들어가면 곧 해질 시간이 되어 다 못 보니 아예 내일 해 뜰 때 다시 오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오늘 표는 내일은 무효란다. 그의 말에 좇아 숙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생각하니 수만리 찾아온 내가 그깟 5천원, 오늘도 보고 다 못 보면 내일도 또 보고 할걸 그랬다 후회되었다.

 

 

▲멀리 대 스투파가 보이는 산치 폐허.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검게 탄 식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정확히 아침 8시 다시 어제의 그 입구로 들어갔다. 산치 단지는 벌판에 솟은 나지막한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올라가니 큰 연못이 나왔다. 아니 물탱크였다. 인도는 물이 귀하여 불교 승원에는 반드시 물 저장 수조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사원을 죽 답사한 후 나중에 알아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니 꿈에 그리던 산치 스투파가 눈앞에 확 펼쳐졌다. 학생들에게 30년 동안 슬라이드 그림으로만 보여주던 그 스투파를 직접 맞이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동쪽 막 떠오른 햇살을 받으며 드넓은 폐허를 샅샅이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B.C. 3세기 마우랴 대제국을 건설한 아소카왕이 말년에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한 죄를 참회하면서 불교를 널리 퍼뜨리게 된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육신 포함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왕에 올랐던 세조 임금이 말년에 불교로 귀의하여 참회한 것처럼. 물론 백만명 넘게 죽인 그야말로 무자비했던 정복자 아소카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왕은 인도전역에 수많은 스투파를 세웠다. 산치에 지금은 부러져 누워있지만 유명한 아소카 석주가 세워져 있었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처럼 제국 곳곳에 통치 영역 표시 기둥을 세웠다. 산치는 아소카 왕비 출신 도시 비디샤 인근에 건립되었다.


인도 사원은 예배 대상 스투파와 거주처 승원으로 구성된다. 큰 스투파 외에도 작은 스투파들이 널려있고, 스투파를 모신 사당 차이탸도 여럿 거의 폐허가 되어 바닥 돌만 남기고 있다. 인도 전형적 주거 배치처럼 안마당 중심으로 사방에 독방들이 죽 배열되어있는 스님 숙소 폐허가 스투파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있다.

 

탐욕에 눈멀어 일부 훼손

 

 

▲산치 복원 추정도. P. 브라운.

 


아소카 이후 슝가, 굽타 왕조를 지나며 원래 스투파를 두 배나 키우고, 둘러싼 돌난간과 네 방향 탑문도 세운다. 후대의 것인 불상도 몇 발견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그렇듯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7세기 인도 전역을 다닌 현장법사의 기행문에도 없다. 오랜 세월 타 종교의 침략과 박해 속에 인도 평지 사원의 스투파가 다 파괴되었어도 산치 스투파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 그대로 보존된다. 산치 유적지는 정글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8년 영국 장군이 발견한다. 발견 시에는 불교 유적인지도 몰랐다. 앞에 말한 산치의 역사는 돌에 새겨진 명문을 후에 해독한 결과이다. 근세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제 모습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장에 널브러진 부재 돌들을 재조립하며 약간의 추후 복원을 거쳤다. 많은 인도와 파키스탄 대형 스투파 윗부분이 망가진 것은 탐욕에 눈먼 식민지배 영국 놈들이 보물 발견하겠다고 파헤쳤기 때문으로, 산치 대 스투파도 발견 4년 후 당시 시장이 파헤쳐 한쪽 귀퉁이가 오랫동안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었었다.


▲이희봉 교수
다음 호부터 문제의 산치 스투파를 자세히 보며 탑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 미술사 건축사 학문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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