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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투파 숭배 기원과 사리

기자명 법보신문

형상 없는 진리 좇아 형상을 만들다

 

▲산치 대 스투파. 울타리 난간으로 둘러싼 둥그런 반구형 돔. 동서남북 4방위의 탑문. 꼭대기에 유골함이 있고 양산으로 고귀함을 표시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셨다. 즉 열반에 드셨다. 제자들이 인도 전통 장례에 따라 장작불에 화장하고 남은 뼈와 재를 항아리에 수습하여 8개 부족이 나누어 가지고 가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최초 스투파 근본 8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막강한 통일 군주 아소카왕이 다시 꺼내어 8만4천개로 나누어 전국 방방곡곡에 스투파를 널리 보급하였다.
그 숫자를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아주 많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치 스투파는 유명한 아소카왕의 돌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3세기에 처음 설립된 것이다. 산치 스투파는 유골함을 반구형 돔의 제일 꼭대기에 묻었다. 아래에 묻던 위에 묻던 인도 전통의 만달라 도형 사상의 평면상 반드시 정중앙이 된다.


타고 남은 부처님 뼈가 사리


여기서 사리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살펴보아 바로잡고자 한다. 범어로 ‘사리라(sarira)’가 중국어 한자 음역 ‘사리(舍利)’로 번역되었다. ‘사리라’ 원뜻은 ‘몸’ 즉 ‘신체(body)’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란 다름 아닌 타고남은 뼈와 재 즉 유골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초기 경전의 성문(聲聞)시대 제자들은 스승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므로 그 분신으로서 스승의 유골을 모셔 기리게 된다. 마치 우리가 군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혹시 시체도 못 찾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여 미리 손톱과 머리카락을 깎아 보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나라 불보 사찰 통도사 금강계단에 신라 때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얻어온 부처님 어금니가 모셔져 있다. 오대산 월정사와 태백산 정암사와 몇 곳에 적멸보궁 이름으로 진신사리가 묻혀있어 성지로 대접받는다. 얼마 전 존경스러운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 “내 몸에서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리의 원 뜻 대로 보면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즉 유골 즉 뼈와 재 전체가 사리인데 다시 뒤적여 찾을 사리가 뭐 있을 것인가?

 

 

       ▲해탈 후 설법한 보리수.             ▲하늘로 올라간 사다리.    ▲귀한 몸을 감히 그리지 않은 빈 옥좌.

 


인도 석가모니 원래 불교가 동아시아로 들어오면서 사리가 구슬이나 보석으로 바뀌어버렸다. 스님의 공덕이 높아야 사리가 나오고, 단단해야만 하며, 그것도 몇 알이 나왔고 심지어 한 말이 나왔다던가 하는 세속적 숫자 경쟁으로 바뀌어 버렸다. 한의학자로서 도올 김용옥 선생도 사리 결석이 생기면 비적상적 병이라고 진단한다. 석가모니 순수 말씀의 불교가 후대에 신비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지나치게 사물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 스님의 말씀은 다시 오늘날 귀감이 된다.

 

▲전도를 의미하는 부처님 발바닥에 새긴 진리의 법륜, 삼보의 삼지창, 연꽃.

고려 중기 일연 스님이 쓰신 ‘삼국유사’를 보면 대부분 다른 기술은 한두 쪽 분량에 그치는데 비해 사리는 ‘전후소장(前後所將) 사리’ 조에 무려 11쪽이나 할당하여 자세히 언급한다. 중국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여러 차례 가져온 기록이다.


‘사리’ 몇 ‘알(粒)’과 함께 ‘머리뼈 조각과 어금니(佛牙)’도 동시에 귀중하게 언급된다. 그 때에 이미 사리라는 말이 원래는 유골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유골과는 구별되는 구슬로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이면 일연 스님은 어떤 것은 진짜 진신 사리가 아닐 것이라는 상식적 의심의 판단도 함께 적고 있다.

 

석가모니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힌두교의 전신 바라문교는 창조주 쁘라자파티에(발음주의) 대한 숭배 제식의 종교였다. 창조주를 설정하는 것에서 힌두교와 기독교는 똑같다. 그러나 불교는 명상을 통하여 해탈하는 철학적 종교였다. 석가모니는 일체의 숭배 행위를 금하였다. 직계 제자 즉 비구들은 추상적 말씀에 충실할 수 있었으나 대다수 재가 신자 중생들은 뭔가 구체적 숭배 대상물이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분신 유골을 묻은 스투파를 숭배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가 비구 승가 집단 쪽에서도 옆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 척 할 수만은 없어서 스투파 모심을 시대적 대세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승가 집단이 모인 불교 사원이면 반드시 한 가운데에 스투파를 모시는 것이 기본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사리 봉안해 숭배물 된 스투파


부처님 사후 처음부터 스투파를 경배하게 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산치 스투파 빙 둘러서 울타리 난간이 있고 정확히 동서남북에 ‘토라나’라고 하는 돌 탑문을 세운다. 4방향 출입문이기도 하지만 겸해서 거기에 부처님 생애를 빽빽이 새겨 넣은 교육적 조각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데, 열심히 발이 닳도록 다니면서 전도했다는 의미의 부처님 발자국과 그 속에 동시에 진리의 법륜, 불(佛) 법(法) 승(僧)을 나타내는 삼지창과 연꽃을 볼 수 있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설법한 보리수,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그리고 감히 옥체를 그리지 않은 빈 옥좌 등등의 추상적 상징을 통하여 스승을 기리게 된다.


부처님의 분신인 유골 사리를 묻은 스투파는 그대로 부처님 몸을 상징한다. 형상 없는 무색(無色) 부처님의 진리 말씀으로 가기 위하여 색(色)의 형상을 숭배한다는 방편으로서 스투파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도 스투파 형상은 다음 시대에 나올 불상에 비하면 아직은 단순소박하고 추상적이고 엄숙하다. 스투파는 그 후 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어 오랜 세월 불교 사원 자체를 나타내게 된다. 물론 우리에게는 탑이 되었다.


유골을 묻은 봉분으로서 스투파는 점차 신성시 되어 유골 여부와 관계없이 스투파 자체 형상을 만들어 고이 모시고 숭배하게 된다. 주요 숭배 방식은 말할 것도 없이 탑돌이다. 보통 말굽형 평면의 집을 짓고 제일 속에 둥근 스투파를 모시게 된다. 그리하여 산치 단지에도 몇 개소 있는 ‘차이탸’ 즉 탑당(塔堂)이 성립하게 된다. 그 후 인도 전역의 석굴 사원에 반드시 차이탸 굴, 즉 탑원굴이 말굽형으로 파져서 석굴사원의 기본형으로 정착된다.


▲이희봉 교수
다음 호에서는 스투파의 둥그런 부분 신성한 ‘알’을 엎어놓은 밥그릇 ‘복발(覆鉢)’로 한자로 잘못 번역된 것을 우리 탑에서 지금껏 사용하고 있는 수치스러운 불교 용어 현재를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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