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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 스님의 몽둥이는 지혜 눈 뜨게 한 축복의 매

기자명 법보신문

같은 할이라도 상황따라 다른 뜻 담겨
사량과 분별로 진리는 이해될 수 없다
머뭇거리면 선의 정신은 바로 질식 돼

 

▲임제사에 들어가기전 문 앞에서 바라본 전경. 임제 스님의 사리를 모신 청탑이 우뚝 솟아있다.

 

 

上堂에 有僧出禮拜어늘 師便喝한대 僧云, 老和尙은 莫探頭好로다 師云, 儞道하라 落在什麽處오 僧이 便喝하니라 又有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이 禮拜어늘 師云, 儞道하라 好喝也無아 僧云, 草賊이 大敗로다 師云, 過在什麽處오 僧云, 再犯을 不容이로다 師便喝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니 어떤 스님이 나와서 절을 했다. 임제 스님이 문득 할(喝)을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임제 스님이 문득 할을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이 절을 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한번 말해 보라. 나의 할이 훌륭한 할이던가?” 그 스님이 말했다. “초야에 있는 도적이 크게 낭패를 보았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허물은 어디에 있는고?” 그 스님이 말했다. “다시 잘못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강의) 탐두(探頭)는 탐색입니다. 사람을 떠보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절을 하자 임제 스님께서 갑자기 할(喝)을 합니다. 여기서 할은 고함입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합니다. “저를 떠보지 마세요.” 이에 임제 스님이 묻습니다. “낙재십마처(落在什麽處)?” “네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 즉 네가 떠보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더 나아가 “내가 고함을 지른 이유를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런 뜻입니다. 그 스님이 어떤 경지에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할을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할로써 자신의 경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만약 임제 스님의 말에 속아 자신의 공부한 정도를 구구하게 설명하려고 들었다면 벌써 몽둥이질을 당했을 것입니다.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의 덫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 또 다른 스님은 이번에는 불법의 대의를 묻습니다. 임제 스님은 이번에도 할(喝)을 합니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임제 스님은 또 덫을 놓습니다. “나의 할이 좋은 할이었냐”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걸려들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에게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준엄한 경고까지 합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질문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임제 스님이 또다시 할을 합니다. 어떤 의미였을까요. 아마도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기특한 마음이 일어겠지요. 이렇게 할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변화무쌍합니다.


是日에 兩堂首座相見하고 同時下喝하니 僧이 問師호대 還有賓主也無아 師云, 賓主歷然이로다 師云, 大衆아 要會臨濟賓主句인댄 問取堂中二首座하라하고 便下座하다


해석) 어느 날 양당의 두 수좌가 서로 만나자 동시에 할(喝)을 했다. 이를 본 어떤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에도 손님과 주인이 있습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손님과 주인이 분명하다.” 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대중들아, 임제의 손님과 주인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다면 두 승당의 두 수좌에게 직접 물어보라.” 그리고 곧장 법상에서 내려왔다.


강의) 양당(兩堂)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을 말합니다. 전당(前堂)과 후당(後堂)이라 해도 의미는 같습니다. 수좌(首座)는 전당과 후당의 가장 법이 높은 스님을 말합니다. 양당의 당주(堂主)들입니다. 이 양당의 수좌 스님들이 만나자마자 동시에 할을 했습니다. 아마 이제는 할이 보편화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어떤 스님이 임제 스님께 묻습니다. “여기에도 손님과 주인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임제 스님께서는 의외로 “손님과 주인이 확연하다”고 말합니다. 할은 사량과 분별을 끊어내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객이 나뉜다고 하니 의아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임제 스님의 빈주구(賓主句)입니다. 할은 그 자체로 있음과 없음, 주인과 객체, 즉 손님과 주인의 경계를 떠난 경지를 드러내는 방편입니다. 그렇다면 임제 스님이 말씀하신 손님과 주인이 확연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각자 참구해봐야 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사족을 붙이자면 체(體)와 용(用)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당체는 본질적으로 공(空)이지만 인연조합에 따라 삼라만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공에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진리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망상입니다.


上堂,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竪起拂子하니라 僧이 便喝하니 師便打하다 又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亦 竪起拂子한대 僧便喝이어늘 師亦喝하니 僧이 擬議라 師便打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임제 스님이 불자(拂子)를 세우니, 그 스님이 곧바로 할(喝)을 했다. 이에 임제 스님은 그 스님을 때렸다.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역시 불자를 일으켜 세우니, 그 스님이 바로 할을 했다. 임제 스님이 역시 할을 했다. 그 스님이 이해를 못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때렸다.


강의) 불자(拂子)는 참선을 할 때 파리나 모기를 쫓아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선종에서는 선사들의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스님이 불법의 대의를 묻습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께서는 이번엔 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자를 세웁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또한 할을 합니다. 또 다른 스님이 불법의 대의를 묻습니다. 임제 스님은 이번에도 불자를 듭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할을 합니다. 이에 임제 스님도 역시 할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맥이 탁 끊깁니다. 두 번째 스님은 임제 스님의 고함 소리에 순간 머뭇거립니다. 임제 스님의 몽둥이가 날라 온 것은 당연합니다. 두 스님 모두 임제 스님에게 맞았지만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불법의 대의를 묻는 질문에 불자(拂子)를 세운 것은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에 가섭은 미소로 대답했지만 스님들은 임제 스님의 제자답게 할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스님의 할은 임제 스님의 흉내에 불과합니다. 머뭇거리는 것 자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할(喝)과 방(棒)은 사량이나 분별을 끊어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질문에 대해 즉답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설명하면 진리와 영원히 멀어지는 것입니다. 선(禪)은 직관을 중요시합니다. 구차하게 토를 달면 안 됩니다.


師乃云, 大衆아 夫爲法者는 不避喪身失命이니 我二十年前에 在黃檗先師處하야 三度問佛 法的的大意라가 三度蒙他賜杖하야 如蒿枝拂著相似하니라 如今에 更思得一 頓棒喫하니 誰人이 爲我行得고 時에 有僧出衆云, 某甲이 行得이니다 師拈棒與他한대 其僧이 擬接이어늘 師便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곧 이어서 말했다. “대중들이여! 무릇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몸과 목숨을 잃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십 년 전에 황벽 선사의 처소에 있을 때 세 번이나 불법의 큰 뜻을 물었다가 세 번이나 황벽 선사께서 하사하시는 몽둥이를 얻어맞았다. 그것이 마치 쑥대로 먼지를 털어주는 것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한번 그 몽둥이를 맞고 싶구나.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는가?” 그때 어떤 스님이 대중 중에서 나와 말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제 스님이 몽둥이를 그 스님에게 건네주려고 하자 그 스님이 머뭇거렸다. 임제 스님이 바로 후려쳤다.


강의) 황벽 스님은 몽둥이질로 제자인 임제 스님에게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고마운 스승의 자비로운 매질이기에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몽둥이질을 사장(賜杖)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賜)는 하사하다는 의미인데 해석하면 친절하게, 혹은 자비롭게도 몽둥이질을 내려주셨다. 그런 뜻입니다. 또 당시 중국에서는 갓난아기를 축원하는 의미로 쑥대, 즉 쑥다발로 아이를 쓰다듬는 풍습이 있었는데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매서운 몽둥이질이 마치 쑥대로 먼지를 털어주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이와 같이 몽둥이질을 해줄 사람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불쑥 나섭니다. 여기까지는 용기가 가상합니다. 그런데 막상 몽둥이를 건네주려니까 머뭇거립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바로 후려칩니다. 이것이 활발발한 선의 정신입니다. 만약 그 스님이 받아서 바로 때렸으면 임제 스님은 고스란히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진짜 받아서 때려도 되나’하고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바로 임제 스님의 몽둥이질을 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禪)은 생각과 이론과 문자를 떠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몽둥이질은 아직 멀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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