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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도장 찍어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기자명 법보신문

시중은 대중법문…상당보다 자유로워
임제 스님은 사료간으로 후학들 제접
주관 객관 또렷하면서도 걸림 없어야

 

▲임제 스님의 사리와 발우가 모셔져 있는 임제사 청탑.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師云 三要印開에 朱點側이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漚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삼요(三要)라는 도장을 찍으니, 아직 도장의 인주가 나타나게 찍지를 못했다. 붉은 점이 나타나지 않음이요. 이리저리 따져서 주관과 객관을 나눔을 용납하지 않는다.” “제이구의 경지는 어떻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문수가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으로 또한 뛰어난 근기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무대 위의 인형극을 잘 간파해야 한다. 모두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의) 여기서 제일구(第一句)는 가장 본질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뒤이어 제이구(第二句), 제삼구(第三句)가 나오는데 이를 흔히 체상용(體相用)으로 설명합니다. 체상용은 삼위일체(三位一體)로써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체(體)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여(眞如),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이에 해당됩니다. 상(相)은 진리의 드러남이고 용(用)은 쓰임이나 작용입니다. 이를 임제의 삼구(三句)라고 부릅니다.


체상용은 법보화(法報化)입니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입니다. 제일구가 법신이고, 제이구가 보신이며 제삼구가 화신입니다. 제일구에 대해 임제 스님은 삼요라는 도장을 찍었는데, 도장과 분리되지 않아 붉은 글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지 않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입니다. 깨달음 그 자체입니다. 이를 다른 선어록에서는 허공인(虛空印)이라고도 합니다. 허공에 도장을 찍었다는 뜻인데 텅 빈 허공은 아무리 도장을 찍어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는 진리의 본체가 바로 제일구입니다. 여기서 도장은 우리가 흔히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할 때 바로 그 도장입니다. 진리의 도장입니다.


제이구에 대해 임제 스님은 무착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일보일배(一步一拜)를 했던 일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무착 스님은 무착문희(無着文喜) 스님입니다. 어느 날 무착 스님이 오대산에 가면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에 일보일배를 하며 오대산을 향해 갑니다. 가는 길에 날이 어두워 하루는 허름한 오두막에 찾아갑니다. 그러자 그곳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분이 혼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배려로 맛있게 저녁공양을 먹고나자 노인이 스님에게 묻습니다. “젊은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은 불교는 어떻습니까?” “말법의 비구들이 계율이나마 지키며 모여 살고 있습니다.” “대중들의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3백 명에서 5백 명 정도 됩니다.” 이번에는 무착 스님이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곳의 불교는 어떻습니까?” “범인과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섞여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입니다.”


이내 대화가 끝나고 달게 잠을 잔 무착 스님은 다음 날 아침 황망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허름한 오두막은 사라지고 노인 또한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숲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이에 무착 스님은 그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임을 알고 큰 깨달음을 얻은 뒤 남방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남방으로 돌아간 무착 스님이 어느 날 대중들에게 줄 팥죽을 쑤고 있는데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속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무착 스님이 이를 본체만체합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말합니다. “이봐, 내가 바로 문술세.” 그러자 무착 스님이 주걱으로 김 속의 문수보살을 후려치며 말합니다.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진실여부를 떠나 이 일화는 벽암록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제이구의 경지를 “물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에 도장을 찍으면 잠시잠깐 형태를 남기지만 이내 곧 사라지고 맙니다. 이는 문수보살이 방편으로 무착 스님을 일깨우는 경지를 뜻합니다. 무착 스님 정도의 빼어난 근기가 있어야 문수보살의 말 몇 마디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잠시 분리됐지만 곧바로 하나가 됐습니다.
제삼구는 인형극으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인형극은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는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흙에 도장을 찍으면 그대로 남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진리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진리는 진리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남아 있으니, 하근기의 경계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師又云,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一玄門에 須具三要니 有權有用이라 汝等諸人은 作麽生會오 下座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또 말했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일현문에는 삼요가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했는가” 이렇게 말하고 법상을 내려왔다.


강의) 여기서 삼현문은 현중현(玄中玄), 구중현(句中玄), 체중현(體中玄)을 말하는데 체상용(體相用)을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상당법어입니다. 상당법어는 임제록에서 가장 격조 있는 법어, 품위 있는 법문을 말합니다.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법거량의 성격이 짙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시중(示衆)은 상당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법문입니다. 말 그대로 대중에서 가르침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임제 스님의 대중법문이라 봐도 됩니다.


시중(示衆)


師晩參에 示衆云, 有時에는 奪人不奪境이요 有時에는 奪境不奪人이요 有時에는 人境俱奪이요 有時에는 人境俱不奪이니라


해석) 임제 스님께서 저녁 법문에서 대중들에게 설법했다. “나는 어느 때는 사람을 빼앗지만 경계는 빼앗지 않고,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지만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다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다 빼앗지 않는다.”


강의) 여기서 만참(晩參)은 저녁 법문을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내용은 임제 스님의 사료간(四料揀)이라고 합니다. 요(料)는 헤아리다 혹은 잰다는 의미가 있고, 간(揀) 가려 뽑다, 구별하다는 뜻이니 재고 가려 뽑는 네 가지 기준 정도가 될 것입니다. 어떤 네 가지 기준일까요. 임제 스님께서 사람들을, 혹은 제자들을 제접하는 네 가지 기준입니다. 첫째,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둘째,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셋째, 사람과 경계 모두 빼앗는다. 넷째, 사람과 경계 모두 빼앗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인(人)과 경(境)은 주관과 객관, 혹은 나와 경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을 모두 비우고 가르침을 충실히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관은 사라지고 객관은 남아있는 경지입니다. 이후에는 가르침을 스스로 체득해 자신의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객관은 사라지고 주관이 남아있는 경지입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지는 경지입니다. 소승적인 깨달음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면 결국은 삼라만상이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주관과 객관이 모두 남아있는, 그러면서도 걸림이 없는 경계입니다. 대승적인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임제 스님은 근기에 따라 이런 네 가지 기준으로 후학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時에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고 師云, 煦日에 發生鋪地錦이요 孾孩垂髮白如絲로다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고 師云, 王令이 已行天下徧이요 將軍塞外絶煙塵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을 兩俱奪고 師云, 幷汾絶信하야 獨處一方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을 俱不奪고 師云,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해석)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사람을 뺏고 경계를 뺏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햇볕이 따스한 봄날에 만물이 발생하여 대지에는 비단을 깐 것 같고, 어린아이가 머리카락을 내려뜨리니 하얀 실과 같다.” 스님이 또 질문했다. “경계를 빼앗아 버리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왕의 명령이 이미 천하에 두루 행해지는 태평시절에는 전방 요새에 있는 장군도 전쟁을 하지 않아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신의를 끊고 지금은 독립하여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스님이 또 물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왕이 보배로운 궁전에 오르고, 들녘의 늙은 농부는 태평가를 부른다.”

 

강의) 임제 스님은 사료간에 대해 비유를 통해 하나 하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관이 사라지고 객관만이 남게 되면 세상은 봄날에 만물이 발생하여 대지에 비단을 깐 것처럼 아름답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관을 비웠음으로 시비(是非)가 사라집니다. 둘째는 주관을 내세우고 객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는 왕 한사람의 명령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세상인데 객관이 사라졌으니, 비교대상이 없습니다. 일인독재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가 없는 까닭에 어떤 측면에서는 태평성대입니다.


셋째는 주관도 사라지고 객관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를 병주와 분주가 신의를 끊고 독립하여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짐으로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넷째 주관과 객관이 모두 남아있으면서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소통하면서 본성을 걸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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