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공은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기자명 법보신문

법신·보신·화신 삼신은 한생각 마음 속에 존재해
밖으로 찾지만 않는다면 부처님의 지혜 절로 발현

 

▲중국 숭산 소림사의 탑림. 소림사를 거쳐간 역대 스님들의 사리와 비석이 모셔져 있다.

 

 

大德아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此不是儞久停住處니 無常殺鬼가 一刹那間에 不揀貴賤老少니라


해석) “여러분! 삼계는 편안하지 않아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된다. 무상(無常)이라는 사람을 죽이는 귀신이 한 찰라 사이에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나이 먹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 가리지 않는다.”


강의) 삼계(三界), 즉 중생세계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표현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중생세계를 불타는 집으로 비유한 것은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영원하지도 항상(恒常)하지도 않습니다.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성주괴공(成住壞空) 하고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합니다. 죽음은 귀천(貴賤)을 가리지도 않고 나이를 따지지도 않습니다. 죽음도 불행도 부지불식간에 찾아옵니다. 따라서 미혹한 중생에게는 무상(無常) 그 자체가 사람을 잡아가는 귀신인 것입니다.


儞要與祖佛不別인댄 但莫外求어다 儞一念心上의 淸淨光은 是儞屋裏法身佛이며 儞一念心上의 無分別光은 是儞屋裏報身佛이요 儞一念心上의 無差別光은 是儞屋裏化身佛이니 此三種身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이라 祇爲不向外馳求하야 有此功用이니라


해석) “그대들이 조사님이나 부처님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밖에서 구하지 말라. 그대들 한 생각의 마음에 청정한 빛이 그대들의 법신불이다. 그대들이 한 생각의 마음에 분별없는 빛이 그대들의 보신불이요. 한 순간 생각의 마음에 차별 없는 빛이 그대들의 화신불이다. 이 세가지의 몸은 바로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다. 다만 밖으로 쫓아다니지만 않는다면 이런 공용이 있는 것이다.”


강의) 요(要)는 욕(欲)과 같은 뜻입니다. ‘하고자 한다면’ 이런 의미입니다. 만약 부처와 같기를 바란다면 밖에서 구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누누이 밝혔지만 모든 것은 내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또한 마음 밖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물들어 혼탁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어느 순간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이 들 때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스스로가 법신불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별없는 마음이 들 때가 있고 또한 차별없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순간 보신불이며 화신불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 상태에 따라 삼신(三身)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는 그 삼신불은 지금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 밖으로 찾아 헤매는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처님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용(功用)은 법신, 보신, 화신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의 지혜의 작용입니다. 밖으로 헤매지만 않는다면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부처님의 지혜와 이에 따른 능력이 발현될 것입니다.


據經論家하면 取三種身하야 爲極則하나 約山僧見處하면 不然하니 此三種身은 是名言이며 亦是三種依니라 古人이 云, 身依義立이요 土據體論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는 明知是光影이니라


해석) “경론을 공부하는 이들에 따르면 이 세종류의 불신(佛身)을 취하여 궁극적인 경지로 삼지만 산승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이 세종류의 불신이라는 것은 이름과 말뿐이고 의지해서 발생된 것일 뿐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뜻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고, 국토는 체에 의거하여 말 되어진 것이다. 법성신 법성토는 이 빛의 그림자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강의)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법신, 보신, 화신을 자신들의 논거로 삼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듭니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삼신은 부처님의 지혜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법당에 불상을 모셔놓고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진리 그 자체라고 받든다면 그 또한 우상(偶像)입니다. 예를 들어 ‘관무량수경’에 보면 “정토는 마음 밖에 있지 않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허전해 합니다. 이해를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아름다운 세계가 있는데 이곳이 극락정토이며 아미타불이 상주해 계신다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삼신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법성(法性)의 신(身), 법성(法性)의 토(土)로 설명한다면 아미타불은 신(身)이 되고 극락정토는 토(土)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법성의 몸이든, 법성의 국토든 모두 마음, 진여, 진리당체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잘 알아야 합니다.


大德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하라 是諸佛之本源이요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 是儞四大色身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脾胃肝膽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니 是什麽가 解說法聽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是這箇가 解說法聽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便與祖佛不別이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은 이 그림자를 가지고 희롱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일체처가 모든 구도자들이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로 이뤄진 육신은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한다. 비위간담(脾胃肝膽)도 법을 설하거나 듣지 못한다. 또한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법을 설하고 들을 수 있는가. 그대들 눈앞에 분명한 아무 형체도 없는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강의) ‘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칠처징심(七處徵心)을 통해 내 몸 안팎 어디를 살펴봐도 마음을 찾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안을 들여다봐도 밖을 둘러봐도 마음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움직이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하지만 살펴보면 그 자체가 또한 나는 아닙니다. 인연(因緣)에 의한 조합에 불과함은 누차 설명했습니다. 양파의 본질을 찾기 위해 계속 벗기다보면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사람 또한 면밀히 분석해 들어가면 양파처럼 여러 겹의 껍질들로 구성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해도 눈에 마음이 있지 않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지만 코에도 마음은 없습니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뇌를 열어봐도 마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은 그림자를 가지고 희롱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런 존재입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면에는 이를 조종하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근본이며 모든 구도자들의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사대육신이 법을 설하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니며, 허공 또한 법을 설하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법을 설하고 듣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그 주체는 무엇일까요. 임제 스님은 ‘아무 형체가 없는 홀로 밝은 이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앞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한 물건(一物)”이라고 했습니다. 또 혜능 스님의 제자인 남악회향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는 혜능 스님의 질문에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고 맞받아칩니다. 이렇게 무위진인이든, 한 물건이든, 설사 한 물건도 아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이것을 이들 조사 스님들처럼 볼 수 있다면 조사와 다를 것이 없고,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但一切時中에 更莫間斷하야 觸目皆是언마는 祇爲情生智隔하고 想變體殊로다 所以로 輪廻三界하야 受種種苦하나니 若約山僧見處하면 無不甚深하며 無不解脫이니라


해석) “다만 일체의 시간에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다. 그것이 망념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자꾸 변하여 본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계를 윤회하며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산승이 보는 바에 따라 이야기를 한다면 깊고 깊은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해탈이 아닌 것이 없다.”


강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대로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일찰나(一刹那)에도 900번이나 생멸(生滅)을 거듭합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까닭에 청정한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감정에 휩쓸려 평정심을 잃게 됩니다. 망념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지혜가 막힘으로 생각이 변하여 본질과는 전혀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삼계를 윤회하며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은 조금 다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중생심의 세계 또한 깊은 경지 아님이 없고 해탈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이며 해탈의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극락이든, 깨달음이든, 해탈이든, 윤회든 모두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중생이지만 또한 부처님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체득한다면 중생의 몸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삶이 그대로 깊은 경지이며 또한 해탈입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은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