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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산국제선원'연 無心 스님

기자명 이학종

'오직 중생을 위해 살아 갈 뿐!'

한 미국인 스님이 부산에 선방(禪房)을 차렸다. 참선 공부를 원하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직접 한국의 참선을 지도하겠다는 취지다. 한국불교사상 처음 있는 일인지라 이 스님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이 당찬 의욕의 주인공을 부산에서 만났다.

'美 명문대생의 출가'

화제의 주인공은 숭산 스님(화계사 조실)의 제자 무심(無心·45) 스님. 푸른 눈빛의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준수한 외모는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청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왜 출가를 하려고 하는가?'

'견성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견성이야 출가를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출가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면 허락하겠다. 견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살아가자면 스님이 되는 것이 적당하다. 출가의 이유는 오직 중생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발심(發心)에 있기 때문이다.'

'오직 중생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보스턴의 한 미국인 청년이 이른바 '김치 영어'를 하는 숭산 선사와 나눴던 면담 광경이다. 훗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무심(無心)이라는 법명의 스님은 이렇게 한국 선문(禪門)에 들어왔다.

무심 스님은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승용차가 2대, 방마다 컬러 텔레비전이 있었을 만큼' 유복한 유대인 교육자 집안이었다. 게다가 명문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앞길이 창창한 청년이었으니, 그런 그가, 삭발염의를 하게 된 연유는 오랜 생에 걸쳐 맺어진 불연(佛緣)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화학을 공부하면서, 또 관련분야에 취직해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이 과학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문명으로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으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생사의 문

제, 가치 있는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 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고민은 젊은 시절, 누구나 홍역처럼 치르곤 하는 그런 고뇌와는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평소 스키를 함께 즐기며 가깝게 지내던 삼촌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면서 무상(無常)을 폐부로 체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스님은 나고 죽는 문제 등 인생의 근원적인 부분들을 의심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의심 덩어리는 점점 커져갔다. 서양 사상에 의지해 보았으나 마침내 인간의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신의 영역으로 인정해 버리고 마는 것에 절망과 한계를 느꼈다. 이즈음 무심 스님의 관심이 동양사상, 특히 불교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으리라.

'숭산 선사와의 만남'

그의 표현처럼 당시 미국에는 '불교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여러 나라의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스님은 인도에서 온 한 수행자와 우연히 만나 불교를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했고, 그 스님으로부터 '불교를 알려고 하지말고 먼저 산부처를 찾아 보라'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는 캠브리지 선 센터에서 숭산 선사와의 만남을 통해 한국 선(禪) 불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했다.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사량분별을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화두선의 전통이 살아 있는 한국불교의 가치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 한국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는 것.

'달라이라마도 만났고, 인도의 요가도 경험했어요. 일본불교도 짧은 시간이나마 공부를 했습니다. 다 훌륭한 가르침이었지만 왠지 나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지금의 스승이신 숭산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처음 보는 순간 출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 3년 가까이 공부하면서 숭산 스님에게 지도를 받던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무심 스님의 얼굴에는 이내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초심자 시절의 열정이 다시금 기억에 되살아난 탓이리라.

'스님이 어느 날 말씀하시길, '부모를 죽여도 참회가 가능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죽이면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라고 물었습니다. 화두를 내리신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대로 천진불(天眞佛)이다.

한번은 내가 좌복(방석)을 한 손으로 집어들고 스승께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어요. 방석이라고 답을 해도 30방, 아니라고 해도 30방이라는 중국 선가의 공안(公案)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요. 그러자 스승께서는 '젊은이, 그 방석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그리고 거기에 앉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지 말고 어떻게 할 것인가의 수용법을 일러준 것이지요.'

'16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

숭산 스님과 인연을 맺은 후 3년 여 세월이 흐른 후, 무심 스님은 출가를 단행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지는 올해로 꼭 18년이 됐다. 그 사이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도 받았고 서울 화계사와 공주 신원사 등 제방 선원을 다니며 정진을 거듭했다. 어느새 선방 구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한국말 솜씨도 다소 어눌하기는 하지만 수준급이다.

스님이 구족계를 받던 해는 1986년, 그러니까 부산과 인연을 맺은 이후 16년 만에 다시 부산을 찾아와 선방을 여는 스님의 감회는 남다르다. 다른 곳보다 불심이 강한 고장인지라 잘 할 자신도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기존의 대찰 선방이나 인연 있는 스님의 절에서 신세만 지며 살다가 처음으로 독립을 해보는 것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영어 법회'를 구상 중에 있기도 하다. 영어 공부에 목숨을 거는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면서 참선지도를 하면 선원 살림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무심 스님은 이 선원이 성공하면 제2의 조국 한국 땅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큰 역할을 하겠다는, 그래서 세계 어느 사상, 어떤 수행보다도 우수한 한국의 선불교가 티베트 불교처럼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할 수 있게 하리라는 원력도 세웠다.

'한국禪 전세계에 알릴터'

범어사 인근인 금정구 남산동 972-6번지에 위치해 있는 선원의 이름은 '남산국제선원(051-518-7913)'. 도심에 있지만 선원 창 밖으로 가깝게 내다보이는 남산 자락이 운치가 있다. '이곳 경치가 제법 좋아요. 저 남산이 금정산 줄기거든요.' 내부 수리를 하느라 부산하지만 스님의 얼굴은 막 이사를 온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무심 스님, 견성은 하셨습니까?'

'제가 지금 기자님하고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출가 18년. 젊은 시절 그토록 고민하던 인생의 문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즉답은 가히 걸작이다. 우문현답이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리라. 남산선원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이 도와달라는 당부를 뒤로하고 선원을 나섰다. 뒤에서 스님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내가 거마비(차비)를 드려야 하는 건데…'



부산=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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