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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티베트 천장사(天葬師)의 하루-중

라마승 좇아 하루 24시간 죽음명상에 집중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만들어진 요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것들 중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AM 3:30
눈을 떴다. 새벽 3시 10분. 아직 20여분의 시간이 있다. 언제나 이 시간은 춥고 외롭다. 여름에도 춥고 가을에도 춥다. 방문사이로 히말라야의 바람이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바람은 계절과 무관하게 늘 칼과 바늘처럼 예리하고 날카롭다.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고 코끝은 시리다. ‘투모 호흡’(몸을 보호하기 위해 체열을 발생시키는 호흡법)을 시도해보지만 여전히 춥다. 그래도 몸을 일으켜 올바로 앉는다.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이 신새벽, 오늘의 삶도 이 짧은 새벽의 명상과 자기다짐에 달렸다. 오늘도 내 마음을 바깥세상에서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오늘도 철저하게 공부를 하고 마음 깊게 명상을 하고 수행자로서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눈을 감고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20분정도 지나면 잠이 깨고 식(識)이 돌아온다. “아, 오늘도 살아있구나.” “아직 안 죽었구나.” 매일 새벽 눈을 뜸과 동시에 나는 내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잠과 꿈은 잠시라도 이승을 떠나는 의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M 5:00
조용히 명상을 마치고 자리를 일어났다. 아침 법문시간이다. 문을 나서니 새벽의 어둠 속에서 라마승들이 여지저기서 불쑥 불쑥 나타난다. 빨간 망토에 손에는 저마다 경전과 종이를 들고 있다. 설법시간에 중요한 멘트와 의문이 떠오르면 적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저기 라마승은 이어폰을 끼고 간다. 저걸 어디서 구했을까? 사실 나도 저것이 좀 궁금한데? 속세의 물건인데 하고 다녀도 괜찮을까? 하긴 설법하는 사원 마당에도 얼마 전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했는데 이어폰 정도는 괜찮겠지. 요새 젊은 라마승들은 확실히 나랑은 다르다. 핸드폰도 최신식이고 이어폰에 심지어 카메라도 가지고 다니다. 오후만 되면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그 요상한 문명의 기계들을 관찰하기에 정신이 없다. 어떻게 구했을까. 그걸 구하려면 라싸까지는 발품을 팔아야 하는데. 나도 구입할까 생각 중이다.


법당에 들어섰다. 법당 안은 법문을 들으려는 라마승들로 자리를 찾을 수 없다. 늦게 와서 자리가 없는 수행자들은 법당 밖에서 스피커폰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 법당은 대략 오백 명의 출가자들의 숨소리로 들썩인다. 맵시 있는 새벽 날씨와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마치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느낀 자라가 목을 좀처럼 내밀 것 같지 않은 모양과 흡사하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자리에 않아 켄보(법문을 주관하시는 활불)를 기다린다. 오늘의 켄보는 ‘짜시롭덴’(72세)이다. 7세 때 출가해 줄곧 티베트불교를 공부하고 25세 때 불교학 박사(게시)를 받았다. 30세 때는 사천 성의 그 유명한 써다(色達)의 오명불학원(五明佛學院)에서 5년 동안 밀교를 용맹정진 했다. 35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사원에서 출가한 라마승들을 위해 불교를 전교하고 법문을 주관하고 있다. 현교와 밀교 모두 정통하다. 우리들에게는 살아있는 부처이며 감히 쳐다 볼 수도 없는 숭고한 존재이다.


법문을 시작하기 10분전. 이제 갓 출가한 어린 수행승 5명이 자기 머리통보다 큰 주전자를 들고 나타났다. 자신들의 몸에 비해 주전자의 무게가 버거워 두 손으로 꽉 잡고 있지만 걸을 때마다 몸이 기우뚱한다. 몸을 녹이라고 따뜻한 야크 젓과 버터가 들어간 우유가 큰 사발에 한잔씩 돌려진다. 아침 공양인 셈이다. 나는 이 순간이 좋다. 이 따뜻한 한잔으로 오늘 하루가 시작된다. 가끔은 두잔 마셨으면 좋겠는데 딱 한잔만 준다.


켄보가 입장하고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일순 법당이 숙연하고 조용해진다. 바로 법문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제는 ‘집수(執受)’이다. 집수란 식(識)이 자기 외부의 요소들을 내부의 유기체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나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도 이해가 부족하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친구 ‘앙항갸쵸’는 아까부터 명상하는 척하며 자고 있다. 옆구리를 ‘쿡’ 하고 강하게 찔렀다. 하지만 이 친구는 몸을 가까스로 세우고 앉아 있을 뿐 여전히 잔다. 코를 골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AM 6:30
아침 법문이 끝났다. 모두들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과 생명의 약동을 온몸으로 흡입하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이 하루는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다. 아침밥을 해먹는 라마승. 아예 바로 절벽위의 움막집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명상을 준비하는 라마승. 스승을 붙잡고 경전을 암송하는 라마승. 햇볕이 비추는 따뜻한 장소를 찾아 경전을 암송하는 라마승. 바람이 부는 언덕에 앉아 하루 종일 먼 산만 바라보는 라마승. 흐르는 물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라마승, 이들 모두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구도자들이다. 인도의 마하싯다(mahasiddha)들은 해골로 만든 밥그릇으로 식사하고 대퇴골로 만든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는데, 이는 죽음이 항시 현전하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오직 수행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 어느 것도 나를 도와 줄 수 없다. 그래서 여기 있는 수행자들은 모두 인간 내면의 세계와 죽음 저편의 세계를 탐구하는 구도자들이다. 특히나 죽음의 과정과 후의 경험,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이들은 하루 온종일, 일 년 내내, 평생을 죽음의 명상과 수행에 집중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하루의 일정이 있다. 바로 시체를 해부해야 하는 것이다.

 

AM 7:00
해부가 있는 날은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마침 어제 망자의 식구들이 고맙다며 주고 간 음식이 남아있다. 그걸로 간단하게 해결해야겠다. 떡과 과일 그리고 짬바(Champa) 등이다. 밥을 먹고 있는데 나의 천장의식을 돕고 있는 제자 3명이 방으로 찾아 왔다. 모두 현재 사원의 출가승들이다. 열여섯 살, 열여덟 살, 스무 살. 모두들 열 살 때 이 사원으로 출가했다. 제일 어린 갸왕누메(16세)는 청해성 시닝(西寧)에서 왔다. 엄마는 탕카(唐)를 그리는 화가이고 아빠는 택시 운전사이다. 부모가 모두 티베트불교 신자여서 이 사원에 출가를 권유했다. 18세인 추마놀부는 사천성 아바(Ngaba)티베트자치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티베트불교를 믿는 농부이며 엄마는 추마가 다섯 살 때 시장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숨마추제’는 운남성 출신이다. 내가 운남의 샹그리라 현 ‘송찬린사(松贊林寺)’에 갔을 때 만난 청년이었다. 당시 숨마추제는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오체투지로 라싸를 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내가 이리로 데려왔다.


여기 사원은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한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을 정식으로 하려면 스스로가 아담한 공부의 공간도 만들어야 한다. 또 개인적으로 공부를 돌보아줄 스승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나의 제자들(세 명의 출가자)은 모두 수행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몇 년 전부터 나를 도와 천장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공부를 위한 생계수단인 셈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천장의식을 진행하기 전 경전을 같이 암송하며 돕덴(천장사)의 수칙을 크게 합창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시체는 더럽지 않다. 2, 시체를 인간으로 보지 말자. 3, 해부시간에는 잡담이나 농담을 하지 말자. 4. 망자의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말자. 5. 해부는 수행의 한 방편이다.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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