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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 부처님의 어머니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은 의지함이 없는 곳에서 출현
명칭·글 집착하면 지혜 눈 장애받아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법문 듣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중국 뤄양 용문석굴의 봉선사 대불.

 


問, 如何是眞正見解오 師云, 儞但一切入凡入聖하며 入染入淨하며 入諸佛國土하며 入彌勒樓閣하며 入毘盧遮那法界하야 處處皆現國土하야 成住壞空하나니라

 

해석)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참되고 바른 견해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여러분은 다만 언제 어디서나 범부의 경지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경지에도 들어가며 더러운 곳이나 깨끗한 곳에도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가는 곳곳에서 국토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모든 국토가 성주괴공(成住壞功)하게 되리라.”

 

강의) ‘임제록’에는 진정견해(眞正見解)를 묻는 질문이 유독 많습니다. 아마도 임제 스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정견(正見)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견성(見性)이라야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견해냐. 범부의 세계이든 성인의 세계이든, 더러운 곳이든 깨끗한 곳이든 모두 차별 없는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다만 우리가 차별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곳들은 모두 영원불멸하지 않으며 언제나 생겨서 머물다 허물어져 사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미륵보살의 미륵누각이든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상(無相)이라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진정견해입니다.


위의 대목은 사실 ‘화엄경’의 입법계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륵누각은 선재동자가 51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이며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주불입니다. 비로자나불은 흔히 광명변조(光明遍照)라는 뜻입니다. 지혜의 광명 그 자체이며, 진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보면 임제 스님께서 ‘화엄경’에 푹 젖어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佛出于世하야 轉大法輪하고 却入涅槃하되 不見有去來相貌하야 求其生死하나 了不可得이니라 便入無生法界하야 處處游履國土하야 入華藏世界하야 盡見諸法空相하야 皆無實法이니라 唯有聽法無依道人이 是諸佛之母라 所以로 佛從無依生이요 若悟無依하면 佛亦無得이니 若如是見得하면 是眞正見解니라

 

해석)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시어 큰 법륜을 굴리시고 다시 열반에 드셨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볼 수 없으며 그 자리에서는 생사를 찾아도 결코 얻지를 못한다. 곧 무생(無生)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노닐며 화장세계에도 들어가 모든 법이 다 텅 비어있어서 전혀 실다운 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오직 내 앞에서 법을 듣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곳으로부터 출현한다. 만약 의지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라는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인 것이다.”

 

강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나서 행한 행적을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태어나시고 불법을 전파하고 열반에 드신 세 가지 내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습으로써 부처님의 행적을 찾으려 한다면 결코 찾을 수가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示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이나 모습이 진실 된 것이 아님을 안다면 바로 여래를 보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행적이 전혀 쓸모가 없고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삶의 궤적은 당연히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행적이나 모습에서 부처님을 찾는다면 결코 진리의 당체로서의 부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은 세상에 오고 가신 적 자체가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면 태어남과 사라짐이 없는 무생법계(無生法界)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무생법계에 들어가 여기저기 국토를 돌아다니고 연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를 들어가도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법을 듣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바로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뜻은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관념이나 말이나 무엇에 의지해서 부처님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참다운 부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의지함이 없이 생긴다는 진리를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를 체득하는 것이 바로 진정견해(眞正見解), 즉 참되고 바른 견해입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견해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임제 스님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어머니임을 알아야 합니다.

 

學人은 不了하야 爲執名句하야 被他凡聖名礙일새 所以로 障其道眼하야 不得分明이니라 祇如十二分敎는 皆是表顯之說이라 學者不會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하나니 皆是依倚라 落在因果하야 未免三界生死하나니라

 

해석)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명칭과 글귀에 집착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사로잡힌다. 이런 까닭으로 도의 눈(道眼)이 장애를 받아 분명하게 보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십이분교(十二分敎)라는 것도 모두 이치를 드러내기 위한 설명일 뿐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명칭이나 글귀에 집착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에 의지한 것으로 인과(因果)에 떨어져 삼계를 생사윤회하게 된다.”

 

강의) 경전과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는 것은 이를 통해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배처럼 뜻을 알면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경전이나 큰 스님의 말씀을 붙들고 분별의 강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면 지혜의 눈이 장애를 받아 진리를 명확히 보지 못합니다. 십이분교(十二分敎)는 부처님의 교설을 열두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입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대장경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설명과 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전 속의 내용이나 경구에 집착을 합니다. 이것이 마치 진리 그 자체인양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에 의지해서 파악하다보면 진리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인과에 떨어져 삼계를 끊임없이 윤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하라 無形無相하며 無根無本하며 無住處하야 活鱍鱍地라 應是萬種施設하야 用處祗是無處일새 所以로 覓著轉遠이요 求之轉乖니 號之爲祕密이니라

 

해석) “만약 그대들이 나고 죽음과 가고 옴에 있어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지금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근본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어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인다.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이를 찾아 나서면 점점 더 멀어지고 구하려고 하면 더욱 어긋난다. 이것을 일러 비밀이라고 한다.”

 

강의) 임제 스님은 생사로부터 자유롭고 싶거든 당장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형상도 없고 근본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습니다. 다만 활발발하게 움직입니다. 활발발은 물고기가 힘차게 파닥거리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형상도 모양도 근본도 없는데 지금 현재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편을 사용해서 표현하려고 해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찾을 수도 없고 구하려고 하면 또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대기 중에 공기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잡을 수도 그려낼 수도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컬어 비밀이라고 부득이 말하는 것입니다.

 

道流야 儞莫認著箇夢幻伴子하라 遲晩中間에 便歸無常하나니 儞向此世界中하야 覓箇什麽物作解脫고 覓取一口飯喫하고 補毳過時하야 且要訪尋知識이요 莫因循逐樂하라 光陰을 可惜이니 念念無常하야 麤則被地水火風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이니라 道流야 今時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하야 免被境擺撲이어다

 

해석) “여러분! 그대들은 이 꿈과 허깨비 같은 이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무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려고 하는가? 그저 한술 밥을 찾아먹고 옷을 기워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배우는 일이다. 꾸물거리며 쾌락이나 좇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야 한다. 생각은 덧없이 흘러가서 거칠게는 지수화풍으로 흩어지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 사상(四相)에 쫓기고 있다. 여러분!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가 모양이나 형상이 없음을 깨달아 경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의) 시간을 헛되이 쓰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몸은 머지않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흩어지고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타락해 갑니다. 결국 윤회의 업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대(四大)가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은 의심과 애욕과 분노와 기뻐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사대(四大)든 사상(四相)이든 그 또한 실체가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하루빨리 벗어던져 버려야 합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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