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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선지식이라야 천하의 옳고 그름 논할 수 있다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와 법을 구하는 것은 모두 악업 짓는 일
노스님의 권위에 복종하면 지혜의 눈은 닫혀

 

▲선종의 이조인 혜가 스님이 눈속에서 자신의 팔을 베어 달마 스님에게 바치며 법을 구했다는 자리에 세운 소림사 입설정.

 

 

儞諸方에 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을 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도 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로 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해석) “그대들은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고 말하나 착각하지 마라. 설사 닦아서 얻을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유전의 업이다. 그대들이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도 곧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역시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 없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번뇌와 이로 인한 미혹(有漏有爲)이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전혀 걸림이 없는 경지(無漏無爲)든 간에 모두 청정(淸淨)함이라는 업이 되는 것이다.

 

강의)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전도 공부해야 하고 참선도 해야 하고 보살행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은 이런 노력들이 모두 업을 짓는 일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자, 우리의 신행 형태를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의 신행은 사실 욕망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함경도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절에 들러 좁쌀 한 되를 부처님 앞에 놓고 합격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봤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선비는 가는 길에 좁쌀을 놓고 기도를 했던 절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법당에 들어가자 부처님을 쳐다보며 말합니다. “부처님 제 좁쌀 한 되를 그냥 공으로 드시고 왜 놀놀하게 앉아계십니까.” 어떻습니까. 지금의 우리 신행 형태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들 무언가 바라면서 기도하고 참선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된 기도며 참선일까요. 임제 스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모두 업을 짓는 미혹한 행위 일 뿐입니다.


살펴보면 임제 스님의 가르침은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밖에서 구한다는 생각이 남아있으면 모두 업을 짓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공부라는 말씀이지요.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전혀 걸림이 없는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해탈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 참선하지만 참선한다는 마음이 남아있는 한 절대 참선은 안 됩니다. 불교는 무언가 얻고 구한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진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다 무심(無心)하고 무사(無事)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은 텅 비어 걸림이 없고 또한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가 된 것이며 또한 진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有一般瞎禿子하야 飽喫飯了하고 便坐禪觀行호대 把捉念漏하야 不令放起하며 厭喧求靜하나니 是外道法이니라 祖師云, 儞若住心看靜하며 擧心外照하고 攝心內澄하며 凝心入定하면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라하니라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리오 渠且不是修底物이며 不是莊嚴得底物이니라 若敎他莊嚴하면 一切物을 卽莊嚴得이니 儞且莫錯하라

 

해석) “어떤 눈먼 머리 깎은 사람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 나서 바로 좌선하거나 관행을 하면서 번뇌 망상을 꽉 붙들어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구하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머물게 해서 고요함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수습하여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응집시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이것들은 모두 조작일 뿐이다.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닦게 하고, 어떻게 그를 깨닫게 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할 수 있겠는가? 그 물건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착각하지 마라.”

 

강의) ‘눈먼 머리 깎은 사람’들은 당시의 스님들을 말합니다. 위 내용은 육조혜능 스님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 스님이 북종선을 비판한 내용을 조사의 말씀으로 인용했습니다. 좌선을 하고 관행을 하면서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억누르고 각종 삼매에 든다는 방법들을 사용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조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로 임제 스님 앞에서 법문을 듣는 사람들의 본질인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닦을 수도 깨닫게 할 수도 장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깨끗하기 때문에 닦을 수 없으며, 진리 그 자체이기에 깨달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장식할 수도 없습니다. 내 안에 내재된 무위진인은, 불성은 완전무결하여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착각합니다.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는 완벽한 진리 그 자체이건만 밖에서 찾고 구하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며 부산을 떱니다. 이런 이들에게 임제 스님은 그냥 무심하게, 평소의 마음을 그대로 조작하지 않고 쓰면 그것이 바로 도의 현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道流야 儞取這一般老師口裏語하야 爲是眞道하야 是善知識은 不思議요 我是凡夫心이니 不敢測度他老宿이라하나니 瞎屢生이여 儞一生을 祇作這箇見解하야 辜負這一雙眼하니 冷噤噤地가 如凍凌上驢駒相似로다 我不敢毁善知識하야 怕生口業이니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의 설법을 듣고서 그것이 참된 도라고 여긴다. 이 선지식은 참으로 불가사의한데 나는 범부의 마음이어서 감히 그 노스님의 생각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먼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평생을 이러한 견해만 지으면서 한 쌍의 지혜의 눈을 저버리는구나.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얼음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당나귀의 새끼 같구나! 그러면서 구업이 두렵기 때문에 감히 선지식을 비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강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큰 장애 중 하나가 바로 권위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은 이런 권위주의를 가장 경계했습니다. 부처든 조사든 만약 진리를 추구함에 걸림이 되면 인정하지 말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스님들의 설법을 듣게 되면 옳고 그름은 따지지도 않고 권위만을 쫓아 노스님을 절대시하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혜의 눈을 애써 감아버립니다. 노스님의 말씀이나 행동 중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 있어도 구업(口業)을 지을까봐 선지식의 말씀을 비방할 수 없다고 변명을 합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우치는 공부인데 마치 절대자의 말씀에 복종하는 종교마냥, 교리에 의심을 품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어떤 종교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큰스님이네, 조실스님이네 하는 스님들의 말씀에 절대 복종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부해서는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부처가 될 수도 조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대장부가 돼야 합니다.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 대장부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지 못하고 권위와 제도에 주눅이 들어 얼음판 위에 당나귀처럼 벌벌 떨어서야 어찌 출가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부처입니다. 다만 미혹해서 이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보고 조사님이 봤다면 당연히 나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부처님과 더불어 하등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道流야 夫大善知識이 始敢毁佛毁祖하며 是非天下하며 排斥三藏敎하며 罵辱諸小兒하야 向逆順中覓人하나니 所以로 我於十二年中은 求一箇業性을 如芥子許도 不可得이니라

 

해석) “여러분! 큰 선지식이 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비방하고 천하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다. 경·율·논 삼장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어린애 같은 하근기의 무리들을 욕할 수 있다. 거슬리거나 순종하는 경계를 사용하며 진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12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지만 겨자씨만 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강의) 큰 선지식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도 있고 경전 속의 가르침을 불쏘시개로 사용해도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역경 속에도 집어넣고 순경 속에도 넣어보면서 자유자재로 근기를 시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임제 스님은 12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작은 허물도 찾을 수 없었다고 당당히 말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마음이 허공처럼 텅 비어 걸림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若似新婦子禪師하면 便卽怕趁出院하야 不與飯喫하야 不安不樂이어니와 自古先輩가 到處人不信하고 被趁出하야 始知是貴하나니 若到處人盡肯하면 堪作什麽오 所以로 師子一吼에 野干이 腦裂이니라

 

해석) “만약 이제 갓 시집 온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려워 안락한 마음을 갖질 못한다. 예로부터 선배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불신을 받고 쫓겨난 다음에야 비로소 귀한 사람인 줄 알았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자가 한번 포효를 하면 여우의 뇌가 찢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강의) 신부는 나약하고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는 존재를 뜻합니다. 당시에는 대중들의 눈치나 살피는 선사들이 더러 있었나 봅니다. 임제 스님의 성품을 생각한다면 추호도 용납될 수 없는 것 들입니다.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똑바로 진리의 한길을 가야 합니다. 달마 스님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호불황제(護佛皇帝) 양무제에게서도 쫓겨납니다. 그럼에도 빼어난 제자들을 길러냈고 지금까지도 선의 역사에는 달마 스님의 향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대개 우매한 대중은 뛰어난 선사들을 배척하게 됩니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결국 나중에는 귀한 사람인 줄 알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대중과 야합하여 인정에 안주하는 선사가 어찌 제대로 된 선사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임제 스님의 사자후에 부처님의 말씀이나 팔아먹던 거짓선지식들의 얄팍한 밑바닥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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