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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티베트에서 자살이 없는 까닭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 다른 차원으로 이동일 뿐 종말 아냐”

척박하고 차단된 환경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삶의 순환’ 굳게 믿으며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

 

 

▲티베트인들은 끊임없이 성실한 자연의 법칙을 존중한다. 그래서 ‘삶의 순환’을 믿는다. 죽음이 가면 삶이 다시 오는 것이다.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우리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지만 우울이나 불안, 자살이 거의 없다. 이는 죽음에 대한 정의와 개념이 우리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티베트 라싸에서 한국인 관광객 한 사람이 길에서 만난 티베트인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티베트에서 자살을 하거나 직접 본적이 있나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혹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 하나요?”


길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던 티베트 순례자는 이 뜬금없는 질문에 갸우뚱 했지만 왜 이 사람들이 저 무거운 장비(카메라)를 들고 와서 자살을 물어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살? 그거요? 평소 생각도 해보지 않은 문제인데? 하지만 질문자의 공손한 태도와 눈빛에 감응하여 그는 곧 대답했다.


“여기는 그런 거 없어요. 티베트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죽음은 곧 삶이고 영혼이 환생하는데 무슨 죽음이 있겠어요? 그저 죽음이 다가오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나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고작(?) ‘죽음과 자살’이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 해발고도 4,000미터의 티베트까지 날아간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한림대학교 철학과 오진탁 교수였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사학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생사학 연구소’에 관하여는 후일 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그 의미를 조명할 계획이다.)


그는 한평생을 우직하게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살에 관하여 공부하고, 내면적 성찰을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발로 경험한 체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자살방지를 위해 애쓰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대다수의 지인과 지식인들의 만류에고 불구하고 사재를 털어 2011년 5월 <자살 한국사회를 만들다>(춘천 MBC와 한림대학교 공동기획제작) 2부작(제1부: 그대 영혼이 어디 있나요? 제2부: 위기의 삶, 사람이 희망이다.) 다큐를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이러한 작업은 “자살하려는 사람을 뭐하려 예방하고 방지하려해!” “그걸 예방할 수 있을까”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며 한편으로는 우아하게 와인을 홀짝 걸리는 일부 몰지각하고 감성이 마비된 지식인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 자신의 뿌리 깊은 학문적 소신과 사회적 책임의식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근사한 불빛에 시뻘건 와인을 우아하게 마시는 그들보다 나는 우리사회에 성숙된 죽음문화와 자살예방에 해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오 교수야말로 정말 우아한 노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정말 티베트에는 스트레스와 자살이 없는 것일까? 퍽이나 본질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세월 티베트를 돌아다니고 공부하고 있는 필자로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헤아려보니 몇 가지 우리와 다른 외부환경과 내부적 성숙함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 번째, 티베트에는 화려하고 살기 좋은 외부환경보다는 척박하고 죽을 것 같은 생존환경이 외벽을 차단하고 있다. ‘이런 환경이 뭐?’하겠지만 사실 이러한 환경은 오픈되고 개방된 환경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을 경외하고 존중하며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두 번째,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시간의 축적 속에서 종교의 탄생을 촉진한다. 샤머니즘(원시종교)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류종교가 정착하는 것이다. 티베트도 본교에서 시작하여 티베트불교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티베트불교 속에는 ‘윤회’와 ‘환생’의 사상이 뿌리요 근원이다. 따라서 티베트의 어린아이는 일찍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를 자연스럽게 시작한다. 엄마 아빠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을 믿고 따르니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어려서부터 부모가 간소하고 경건한 종교적 삶을 지향하고 현생의 삶에서 욕심을 버리는 무욕(無慾)속에서 성숙하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청년이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의 없다.

 

여기에는 언제든 죽음이 부르면 ‘네’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의 가치관과 문화가 사방에 성숙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교사원과 사원의 수행승이 그러하다. 사원은 평생 죽음을 공부하는 학교이며 수행승들은 죽음을 평화롭게 인도하는 가이드이다.


네 번째, 티베트에는 다양한 상장(喪葬)의식의 전통과 의례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혹자는 독수리에게 육신을 갈기갈기 발라내서 던져주는데 이게 무슨 인간다운 죽음의 방식인가? 하고 와락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표피적 수준의 질문에 속한다. (여기에 관하여는 티베트의 천장을 참조)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럼,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례의식과 문화는 방식과 그 의미가 잘 전달되고 있는가? 집보다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상업적으로 천박한 장례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것은 망자와 그 가족들에게 올바른 일인가?

다섯 번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티베트인들의 경건하고도 소박한 삶의 패턴이 우리와 다르다. 하루의 삶 속에서 티베트인들은 죽음을 숨 쉬고 있다. 사실 오늘날 티베트는 예전과는 달리 발전하고 있지만 삶의 방식과 패턴은 여전히 아니, 그에 역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티베트 사람들도 저 마다의 하루일과로 바쁘고 분주하다. 그러나 틈이 생길 때마다 종교적 분위기와 자세를 놓치지 않는다. 티베트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는 세상사를 연속으로 보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삶의 순환’이라 이해한다. 이번 생에서 모든 것을 얻고 누려야만 할까?


티베트에서 시간이란 일직선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다. 티베트에서 시간은 속도감 있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순환의 일부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이 죽음이가면 새로운 삶이 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티베트 사람들은 일찍부터 삶의 순환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직선도 알지만 곡선도 아는 사람들이다. 티베트인들은 죽는다고 현생의 고민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생의 고통이 다음생의 좋은 인연으로 환생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그들에게 스트레스와 우울증세가 올 겨를이 없다. 파고들 여지가 없다. 죽음은 삶의 긍정적 단계이며, 다음 생을 위해 통과해야 할 과정인 것이다.


‘내 가족만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자살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타인이 죽겠다는데 내가 왜 간섭하고, 또 그걸 어떻게 막아!’하면서 묘한 웃음에 커피나 홀짝거리는 사람들에게 (불쾌하시겠지만)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지금의 삶이 참 행복하신가 봐요?” “당신에겐 죽음이 없나 봐요?” 사실 필자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현생에 울고 웃겠다. 그러나 끝이 아님을 안다. 건강한 삶(몸)을 영위하려고 휘트니스나 건강센터에서 꾸준히 몸을 갈고 닦으면서 왜 건강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 걸까? 이는 우리와 티베트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죽음은 또 다른 상태 혹은 차원으로 이동이지 순환의 종말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서로 사랑해야 한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불안하고 우울하고 결국 자살충동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위에서 열거한 티베트에서 자살이 없는 요소들 중에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오진탁 교수는 아마도 이를 증명하기 위해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티베트로 날아간 것이 아닐까. 인간과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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