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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쉬기만 한다면 그대로가 청정법신의 세계다

기자명 법보신문

삼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요
육신 또한 항상 하지 않아


한 생각 쉬면 바로 보리수요
쉬지 못하면 그대로 무명수

 

 

▲중국 란주에 있는 병령석굴 입구. 4~5세기 북위때부터 시작돼 원나라때까지 1000년 넘게 조성이 계속 됐다. 지금은 184개의 석굴이 남아있다. 실크로드를 건넌 불교는 이 곳을 거쳐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儞諸方來者가 皆是有心이라 求佛求法하며 求解脫求出離三界하나니 癡人이여 儞要出三界하야 什麽處去오 佛祖는 是賞繫底名句니라 儞欲識三界麽아 不離儞今聽法底心地니 儞一念心貪은 是欲界요 儞一念心瞋은 是色界며 儞一念心癡는 是無色界라 是儞屋裏家具子니라 三界가 不自道我是三界요 還是道流의 目前靈靈地照燭萬般하야 酌度世界底人이 與三界安名이니라

 

해석)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고,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는 마음이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대들은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부처와 조사는 의탁해 찬탄하려고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대들은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지금 그대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 그대들의 한 순간 탐내는 마음이 욕계이고, 한 순간 성내는 마음이 색계이며, 한 순간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다. 삼계는 그대들의 집에 있는 가구와 같다. 삼계는 ‘스스로 내가 삼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 내 눈앞에서 신령스럽게 모든 것을 비추어 보고 세계의 무게와 거리를 재고 있는 그대들이 바로 삼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강의) 삼계(三界)는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는 욕망의 집착과 욕망의 순도에 따라 나눠지지만 삼계 중에 가장 높은 세계인 무색계라 할지라도 윤회의 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계는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뒤에 과보로 인해 가는 곳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한 마음의 변화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임제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편하도록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삼계의 주인이 바로 우리이고 우리의 한 마음 속에 있습니다.

 

大德아 四大色身은 是無常이라 乃至脾胃肝膽과 髮毛爪齒도 唯見諸法空相하나니 儞一念心歇得處를 喚作菩提樹요 儞一念心不能歇得處를 喚作無明樹니라 無明은 無住處요 無明은 無始終이라 儞若念念心歇不得하면 便上他無明樹하야 便入六道四生하야 披毛戴角이요

 

해석) “대덕스님들이여! 사대(四大)로 이뤄져 있는 이 몸은 무상(無常)것이다. 비장, 위장, 간장, 쓸개와 머리카락과 털과 손톱과 이빨까지도, 보이는 모든 법은 오직 비어있다는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이 쉬게 됐을 때 이를 보리수라 하고, 한 생각이 쉬지 못할 때 무명수라 한다. 무명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들이 찰나 찰나에 생겨나는 망념을 쉬지 못한다면 곧바로 무명수 위에 올라가서 육도사생에 들어가 몸에는 털이 나고 머리에는 뿔이 돋은 축생이 될 것이다.”

 

강의) 우리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상(無常)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어 죽으면 내 몸은 결국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를 알고 마음을 쉬어버리면 이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만약 마음을 쉬지 못하고 분주하게 망념을 일으키면 곧 무명에 빠져 육도를 윤회하며 종국에는 짐승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쉬는 것만으로 깨달을 수는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본래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거센 파도가 잠잠해지면 맑은 바다는 절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갖 탐욕과 성냄으로 어지러운 마음은 파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쉬어버리면 진리 그 자체로서의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무명(無明)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본래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라는 인연에 의해 바다가 출렁거린 것뿐입니다. 무명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지면 파도는 절로 사라집니다.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어둠은 밝음이 없는 상태일 뿐이지 어둠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윤회는 업력에 끌려가지만
화신은 원력 따라 드러내


선종은 사구 활구 분명하니
자세하게 살펴서 알아야

 

儞若歇得하면 便是淸淨身界니라 儞一念不生하면 便是上菩提樹라 三界神通變化하야 意生化身하야 法喜禪悅하며 身光은 自照니 思衣하면 羅綺千重이요 思食하면 百味具足하야 更無橫病이니라 菩提는 無住處라 是故로 無得者로다

 

해석) “그대들이 만약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청정한 법신의 세계다. 그대들이 한 순간도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보리수에 올라가 삼계에서 신통변화를 일으키고 마음대로 몸을 바꾸고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으로 몸에서 빛이나 저절로 비추게 될 것이다. 옷을 생각하면 화려한 비단 옷이 천 겹으로 걸쳐지고 먹을 것을 생각하면 백가지 진수성찬이 차려지며 다시는 뜻하지 않은 병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보리는 어떤 머무는 장소가 없다. 그러므로 얻을 것 또한 없다.”

 

강의) 화신(化身)은 윤회와 다릅니다. 윤회는 업력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지만 화신은 원력에 의해 원하는 대로 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보리(菩提)는 이미 나에게 내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다고 밖에서 얻어지는 아닙니다. 그저 체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는 얻는 것이 아니고 그냥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道流야 大丈夫漢이 更疑箇什麽며 目前用處가 更是阿誰오 把得便用하야 莫著名字를 號爲玄旨니 與麽見得하면 勿嫌底法이니라 古人이 云, 心隨萬境轉이며 轉處實能幽라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라하니라

 

해석) “여러분! 대장부로서 다시 무엇을 의심하는가? 내 눈 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또 누구인가? 이 사람을 잡아 잘 활용해야 한다. 다시는 이름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마라. 이것을 일컬어서 현지(玄旨)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싫어하거나 차별하는 그런 법을 두지 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 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 곳을 따라 본성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의) 이름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숨 쉬고 있는 나의 근원인 그 사람을 잘 인지하고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미묘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알고 어떤 것도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두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마음이 경계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도 차별을 두거나 집착을 하지 않으므로 망념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진리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희희낙락하지 말고 조금 나쁜 일이 있다고 슬퍼하거나 실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道流야 如禪宗見解는 死活이 循然하니 參學之人이 大須子細어다 如主客이 相見할새 便有言論往來호대 或應物現形하며 或全體作用하며 或把機權喜怒하며 或現半身하며 或乘獅子하며 或乘象王이니라

 

해석) “여러분! 선종의 견해로는 사구와 활구가 뚜렷하다.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세하게 살펴서 알아야 한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만나면 곧 말을 주고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의 역량에 맞추어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체를 다 드러내 보이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방편으로 웃거나 성내기도 하며, 어떤 때는 모습을 반쯤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자를 타며 혹은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

 

강의) 사활(死活)이 순연(循然)하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사활순연’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돈다거나, 혹은 죽이고 살리는 일에 순서가 있다거나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 다음에 바로 선원에서 스승과 제자들이 만났을 때의 대화의 형태를 다루고 있으므로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로 풀이하는 것이 아마도 타당할 것입니다. 선원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만나면 선문답을 주고받습니다. 공부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인데 여기에 사구와 활구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삶과 죽음입니다. 부처를 뽑는 시험을 보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스승이 똑똑할 수도 무지할 수도 있고, 제자가 똑똑할 수도 무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근기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을 사빈주(四賓主)라고 합니다. 앞서도 나왔지만 사빈주는 주인과 손님의 네 가지 형태라는 말인데 주(主)는 스승, 즉 선지식을 말하고 빈(賓)은 공부하러 온 수행자 혹은 학인을 말합니다. 첫째는 선지식은 뛰어난데 학인이 시원찮은 경우, 둘째는 선지식도 뛰어나고 학인도 훌륭한 경우, 셋째는 학인은 훌륭한데 선지식은 별 볼일 없는 경우, 넷째는 선지식과 학인 모두 시원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선문답을 할 때는 근기에 따라 대화가 진행됩니다. 일부만 드러내며 살필 수도 있고 전체를 드러내 치열하게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방편을 써서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고 살짝 반만 드러내 놓고 시험하기도 합니다. 사자를 탄다는 말은 사자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의미함으로 이치로써 드러낸다는 말이고 코끼리는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상징함으로 실질적인 행동으로써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소개될 사빈주의 총론이라 할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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