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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건’ 궁예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

기자명 이재범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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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궁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느낌이다. 한국방송공사의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그 여파가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혀 생소했던 종간과 같은 여러 인물들이 친숙하게 다가서고 있다. 궁예 불교에 관해서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교 부분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예 불교의 잔학성에 대해 의문이다. 과연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비정상적인 광신적 현상이었을까? 실제로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나오는 미친 궁예에 관한 기록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까? 이러한 의문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문헌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찬자의 주관적 요소가 있으므로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믿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궁예와 같은 인물에서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 자료에 대한 신뢰성이다.

궁예의 행렬은 사치를 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머리에 금책을 쓰고 넓은 포를 입었으며 비구를 2백명이나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대로 믿기 보다 궁예를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궁예를 승려로 본다면 이 행렬은 호화로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궁예를 왕으로 본다면 그다지 호화로운 행렬은 아닐 것 같다.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에 비교한 것에 대해서도 광신적 행동으로 보는 것 같다. 이 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들어 온 불교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4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래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불교 교리나 수행방법 등도 시대에 따라 교종이 유행하다가 선종이 선호되었다.

특히 불교는 국가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왕이 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은 신라왕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진흥왕과 진평왕이 이를 가장 잘 이용했다.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불, 부모를 석가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이라고 했다.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궁예가 석총을 죽이고 승려 36명을 생매장한 것을 두고 그의 잔학성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궁예가 승려 36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석총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궁예의 경전을 요망괴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궁예는 불교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다. 궁예는 어린 시절 세달사에서 사원의 생리를 알았고, 그 뒤 20여권의 경전을 지어 자주 강론하였다고 한다. 그는 기존의 불경을 답습하지 않았다. 궁예가 불경을 재해석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무엇인가? 달구어진 쇠공이로 부인을 찔러 죽이고, 무고한 왕건을 역모 누명이나 씌우는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되어 있다. 미륵관심법은 남을 학대하는 데만 이용되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궁예는 어떻게 민심을 모아 후삼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정치의 한 표현이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 맏아들을 청광, 둘째 아들을 신광이라고 하였다. 궁예 미륵사상은 미륵불을 주존불로 한 진표의 법상종의 한 갈래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편 궁예가 처음 세달사에서 화엄학을 배우다가 뒤에 진표계통 미륵신앙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모두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궁예 불교는 하층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미륵불은 미래불로서 현실적 조건이 좋지 않을 때 등장하였다. 특히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궁예 주변의 인물들 중에는 내원(궁중 사원) 허월,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 등 어려서부터 절에 기식할 수 밖에 없었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현실 정치와 궁예 미륵사상의 지도자가 됨으로서 하층민의 지지를 자발적으로 받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에 궁예미륵으로 불리는 삼존불이 있다. 포천과 철원에도 궁예미륵으로 불리는 석상이 있다. 그 밖에 ‘궁예미륵 문화권’이라고 할 정도로 모습이 닮은 미륵불들이 한반도 중부지역에 산재해 있다. 궁예 미륵의 존재는 궁예 불교가 천년 이상 민간에서 친숙하게 존경받았다는 증거이다. 궁예의 교리를 요망 괴설이라고 한 석총은 승자의 정치적 목적을 대변했다고 볼 수도 있다. 궁예가 승려를 정치적으로 보복하려 했던 것과 궁예 불교의 사상적 진면목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후대의 승자에 의해 기록된 내용만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궁예 불교에 대해 시대적 배경의 이해와 함께 폭 넓게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재범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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