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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현득 한국불교아동문학회장

동심과 불심 버무려 어린이세상 일구는 영원한 천진불

빼꼼빼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옛 시골집 격자무늬 창에는 창호지 곱게 바른 하얀 문이 있다. 아이들은 그 하얀 문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굳이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그 틈으로 밖을 볼길 좋아했다. 그런 아이를 나무라기보다 문구멍 높이만큼 커진 아이의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

아동문학 발전에 반세기 헌신
불교 위한 어린이포교도 앞장
한국불교아동문학회 창립 주도
경전 윤색해 불교동화 발간도

▲ 신현득 작가는 “다시 태어나면 경전 속 설화를 모두 동화로 만들어 어린이들의 불성의 씨앗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신현득(82·善行) 아동문학가의 ‘문구멍’이라는 동시다. 시는 사람이 피운 가장 고운 ‘글꽃’이다. 눈으로 읽을 때마다 입으로 낭송할 때, 이 글꽃은 우리 마음에 더욱 진한 향기를 남긴다. 그는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구멍’이 입선된 후 글꽃을 피우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61년 첫 번째 동시집 ‘아기눈’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펴낸 책만도 동시집 28권에 동화집 10권. 팔순을 넘긴 지금까지 동심에 아름다운 꽃씨를 뿌리고 있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아동문학계에서 그의 위상은 고(故) 윤석중 선생의 뒤를 잇는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동문학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가장 존경받는 시인으로, 아동문학에 가장 기여도가 높은 작가로 여러 차례 뽑혔다. 또 어린이들의 맑고 푸른 동심을 키워주는 것을 목적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전국시낭송경연대회에서 최근 5년간 어린이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재 그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논문만 10여 편에 이른다. 그만큼 아동문학계에서 그의 위상은 높다.

“몸집은 왜소하지만 품고 있는 문학정신과 불교에 대한 사랑은 태산 같습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쉼 없이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권영상 칼럼리스트)

“작품을 통해 국가와 역사, 민족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도반입니다. 항상 베풀지만 베풀었다는 상을 내는 법이 없는 선비 같은 분입니다.” (최춘해 원로 아동문학가)

“어린이를 길러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50년대 초부터 포교활동을 함께해 왔습니다. 민족의 정신과 문화의 바탕인 불교를 알아야 국가도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어린이의 말과 글로 부처님 말씀을 전해온 불자입니다.” (김종상 전 한국불교아동문학회장)

한국아동문학계의 거목이지만 정작 본인은 ‘부처님 이야기 해주는 재밌는 할아버지’로 불리길 바랐다. 다시 태어난다면 경전 속 설화를 모두 동화로 만들어 어린이들의 마음에 불성의 씨앗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도 했다.

“‘아미타경’을 보세요. 법장비구가 48대원을 세우는 과정부터 극락세계를 묘사하는 내용까지 이보다 훌륭한 판타지 동화는 없습니다. ‘본생경’은 그 자체로 세계 아동문학사에 최초로 기록될 동화집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팔만대장경 속 어느 한 구절 동화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삶 그 자체가 불교이지만 불교와의 첫 인연은 그리 살갑지 않았다. 그는 1933년 경북 의성군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어렵던 시절 일제의 수탈까지 겹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4세 되던 해 가족들은 살기 위해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녹록치 않아 4년 만에 귀국했다. 설상가상 4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그는 이때부터 마을 앞 쪽박샘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디딜방아에 겉보리를 찧어 밥을 하고, 빨래와 바느질도 하며 서투른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불교에 심취한 아버지였다. 집안을 돌보기보다 염주를 목에 걸고 다니며 독경과 기도하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이익이 생기면 남을 돕는 탓에 가세는 기울어져만 갔다. 마을 아이들이 “사바하 사바하”하고 놀려대는 것 또한 창피했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깊어져 갔다.

그는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산중학교를 거쳐 안동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교회에 다니며 기독교 성서를 배웠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성서를 보면 볼수록 지혜가 얕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네 생각과 역사를 무시하고 서구적인 틀에 맞춰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싫었다.

고향마을 초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유교경전과 불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토록 싫어했던 ‘금강경’이나 ‘천수경’을 읽어나가며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신앙과 철학을 가졌던 자유인이며 선객으로 세상이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그의 일생이 멋있고 좋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교회에 다니며 한 가지 배운 점은 어린이를 키우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범대학 동기인 김종상 선생과 함께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는 한편, 상주포교당 주지스님을 설득해 어린이회를 조직하고 일요법회를 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저도 아이들에게 불연이 씨앗을 심기 시작한 셈입니다.”

 

1959년 신춘문예 입선 이후 동시 시인으로 삶이 시작됐다. 김종상, 박경용, 조유로 작가 등과 동시운동을 일으켜 우리나라 동시문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던 1975년, 20여년간 잡았던 교편을 놓고 소년한국일보 취재기자로 직업을 바꿨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글들을 읽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문사 취재기자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문을 두드린 대원불교대학,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됐다.

“본생경을 보는 순간 부처님이야 말로 세계 최초·최고의 아동문학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한글대장경 한 질을 구입해 한 권 한 권 읽어나갔습니다. 동화가 될 부분을 일일이 체크하고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춰 상중하로 구분하다보니 한 번 보는데 만 꼬박 3년이 걸렸어요. 정리된 내용을 확인해보니 동화가 될 내용만 수천편이 되는 거예요. 한 마디로 팔만대장경은 광활한 동화의 바다였죠.”

1982년, 석주 스님의 도움을 얻어 한국불교아동문학회를 창립시켰다. 원로 김동리 선생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총무로 한국불교아동문학회를 이끌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첫 불교동화집이 나오자 교계에 큰 반향이 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경전 공부와 집필에 매진코자 1989년 기자 일마저 내던졌다. 그리고 ‘어린이 팔만대장경’ ‘부처님 말씀 이야기 바다’ ‘석가모니’ ‘날아다니는 목련존자’ 등 어린이 불교동화집을 잇달아 발표했다. 틈틈이 팔만대장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윤색한 작품들도 여러편이다.

작품활동은 나이가 들면 들면서 오히려 왕성해지고 있다. 대학강의나 작품심사 요청 등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80이 넘어서자 거의 없어졌다. 그만큼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섭섭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아요. 강연이나 심사 요청을 마냥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제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느낌입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온종일 경전 보며 어린이 위한 글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으니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커가면서 동심 위에 다른 마음들이 쌓여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불가에선 동심을 부처님 마음이라고 한다. ‘어린이’라는 말만으로도 그의 얼굴엔 금세 환한 웃음꽃이 핀다. 동시와 부처님 이야기를 쟁기삼아 동심 밭을 가꿔온 반세기, 노작가의 깊어진 주름만큼 아이들의 불심이 무럭무럭 영글어가고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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