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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영규 찬불가 작사가

이 땅에 구현될 연화세계 그리며 반평생 부처님을 노래하다

▲ “아직 가야할 길이 있는데 중간에 멈출 수 없다”는 반영규 작사가는 노년의 나이에도 꺼질 줄 모르는 창작의 열정을 내보였다.

법회의식 때 찬불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현재와 같은 의미의 찬불가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법회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서양음악기법으로 만든 찬불가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왜 다른 종교의 음악을 흉내 내느냐”는 비판은 물론 “법당에 오르간 소리가 웬 말이냐”는 호통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음악을 통한 포교시대’를 이끈 선각자들의 원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3000여곡에 달하는 찬불가가 탄생하게 됐고, 법회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현대 찬불가 토대 개척 1세대
붓다의 메아리 등 100곡 작사

합창·콘서트 문화포교에 주력
부처님 일대기 교성곡이 목표

찬불가 대중화를 위해 일주문을 세운 1세대로는 운문 스님과 정민섭, 반영규, 서창원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반영규 거사는 여전히 창작 열정을 불태우며 활동 중인 현역 작사가다. 1973년 찬불가 작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붓다의 메아리’ ‘어화너’ ‘무상게’ 등 100여곡의 노랫말을 지었다. 무려 40여년의 세월 찬불가 삼매에 들 수 있었던 동력은 무얼까. 지극한 정성과 불심이다. 차계복란(此鷄伏卵)이라, 암탉이 알을 품듯 정성을 다하라는 그 의미 그대로 반영규 거사의 삶이 꼭 그러했다. 찬불가 한곡 한곡에 불심을 불어넣고 생명을 불어넣는 정성, 그것은 암탉이 알을 품는 그 정성 그대로였다.

반 거사의 찬불가 작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올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발표된 ‘연등회의 노래 9집’ 제작에도 참여했다. 86세의 나이에도 그의 ‘음악을 통한 포교’는 꺼지지 않는 빈자의 등불처럼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포교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내놓으면서도 상(相)을 내는 법이 없는 불교계에 없어서는 안 될 보배와 같은 불자다.”(정혜사 선원장 금산 스님)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포교와 무대를 향한 열정은 승속을 떠나 존경받아 마땅하다.”(풍경소리 회장 덕신 스님) “불교음악과 관련한 합창, 공연, 문화제 등의 초석을 놓은 현대불교음악의 큰 어른이다.”(이종만 풍경소리 기획위원)

그의 포교 원력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불연의 씨앗을 간직하게 됐으나 그 씨앗이 싹을 틔우기까지 40여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40대에 접어든 어느 날 아내를 따라 방문한 삼각산 도선사에서 불교가 무엇인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사찰과 불자들의 모습은 어린시절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죠. 그런데 참배하는 불자들의 얼굴이 제 눈에 들어왔어요. 어찌나 맑고 한 결 같이 편안해 보이던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면서 퍼뜩 여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조계사로 향했죠.”

난관에 부딪쳤다. 조계사 인근 불교관련 상점을 아무리 뒤져봐도 불교가 무엇인지 일러주는 책 한 권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충무로로 향했다. 당시 충무로는 외국서적을 파는 서점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일본에서 편찬한 불교서적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그 가운데 마스타니 후미오가 쓴 ‘아함경’이 눈에 들어왔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무릎이 탁 처졌어요.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 갈수록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한편으로 이 좋은 불교를 지금껏 알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선연을 맺어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슴이 뭉클해졌죠. 그렇게 불교를 배우며 불제자가 될 것을 서원했습니다.”

책을 통해 불교를 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불교대학처럼 불교를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곳도 전무했다. 그렇게 불교공부에 푹 빠지게 되자 이렇게 좋은 불교를 혼자만 공부하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욕심이 생겼다. 불자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쉽게 한글로 풀어 불교를 소개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편집·출판일을 하던 그는 부처님 일대기나 교리, 불교소식 등을 담아낼 포교지를 기획했다. 원력과 계획을 세우자 응원하는 불자들도 인연이 닿았다. 조계사에서 우연히 만난 이춘담 거사와 혜일 스님이 후원을 자청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1973년 4쪽짜리 포교전단지 ‘자비의 소리’ 첫 호가 탄생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찰은 물론 불교단체, 군부대, 교도소 등에서 ‘자비의 소리’를 보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처음 5000부로 시작한 ‘자비의 소리’는 밀려드는 요구에 5만부까지 인쇄를 늘려야 했다.

“불교서적이라곤 한문 경전에 음을 달아 놓은 것이 전부였으니 포교지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요. 그렇게 한 고비를 넘어서니 다른 것에 눈길이 가더군요. 바로 청소년이었습니다. 청소년이야말로 불교의 미래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질 것인지 고민이 시작됐다. 결론은 노래만한 방편은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막상 노래를 만들려니 방법을 몰랐다. 그의 간절함이 전해진 것일까. 뜻을 함께 하겠다는 도반이 나타났다. 바로 서울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서창업씨였다. 서창업씨와 뜻을 모아 함께 찬불가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찬불가는 매월 한 곡씩 ‘자비의 소리’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자비의 소리’와 찬불가 보급의 성공은 그가 문화포교의 원력을 세우는 도화선이 됐다. 먼저 어렵게 만들어낸 찬불가를 불자들에게 선보일 합창단을 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 포교의 대상은 청년불자로 결정했다. 당시 재가불자들이 조직한 삼보법회가 풍전호텔에 공간을 빌려 일요법회를 열고 있었다. 삼보법회에 참석한 청년들을 모아 합창단을 구성하고 서창업씨와 함께 지도했다. 찬불가를 통해 법회를 장엄하고 아름답게 연출하는 삼보합창단의 활약이 입소문을 통해 확산되자 사찰들도 합창단을 구성해 찬불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1982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종합예술제 ‘동방의 빛’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결실로 맺어졌다. 합창단원만 300여명이 참석한 ‘동방의 빛’ 공연은 이후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열리는 봉축음악회의 시발점이 됐다.

 
글과 음악을 통한 반 거사의 포교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문화 영역으로 확대된다. 환갑을 넘긴 나이, 힘에 붙일 법도 하건만 그의 포교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더 밝게 빛을 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삼선포교원 거사림회 회장을 맡은 후 창안한 등산법회다.

“법회가 끝나면 거사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산사를 찾아 산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창안했지요. 법회도 보고 건강도 챙길 수 있겠다며 보살님들이 더 좋아했어요.”

71세에 수원포교당 신도들과 함께 시작한 불교문화재답사단도 문화포교의 일환이었다. 불교유적지를 방문해 문화재에 깃든 의미를 공부하고 이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기획된 불교문화재답사단은 7년만에 전국의 모든 문화재사찰과 사지를 답사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80세 되던 2009년까지 법사가 없는 군법당을 찾아 법회를 열어주고 장병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쳤다. 20여년간 해오던 불사를 중단한 것은 쉼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위해서였다. 2012년 그는 ‘좋은벗 풍경소리’와 함께 붓다콘서트를 기획해 매달 한 차례 대중과 호흡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혼자의 힘으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십시일반 원력이 모여 도량을 짓고 음악회를 완성합니다. 불교의 융성과 문화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입니다. 불교가 중흥하려면 불교문화가 살아나야 합니다. 지난 40여년간 행했던 포교지, 찬불가, 문화재답사, 붓다콘서트 등이 모두 불교문화운동의 일환입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있는데 중간에 멈출 수 있나요. 나이가 들수록 시행착오가 줄어드니 효율적 측면에선 오히려 이득이죠.”

부처님 일이라면 미소부터 짓지만 아쉽고 후회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줄 후배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이다.

“예전과 비교해 포교환경은 많이 좋아졌지만 신심을 갖고 함께 일할 줄 아는 청년불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누가 알아주던 그렇지 않던 포교 외길을 걸어온 반 거사, 그가 내딛는 걸음걸음은 한국불교문화의 역사가 됐고 발자취가 됐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반 거사의 남은 목표는 부처님 일대기를 교성곡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 땅에 구현할 찬란한 연화세계를 그리면서 오늘도 그는 노랫말을 쓰고 지운다. 그리고 부처님을 노래한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38호 / 2014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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