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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춘희 법사

부처님 설한 진리·벅찬 감동 소리그릇에 담아 세상에 펴다

▲ 송춘희 법사는 “나이가 들면서 활동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회향하지 못한 불사와 나를 기다리는 불자들이 있어 포교의 길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건달바는 불설법회에서 불법과 불제자를 수호하는 여덟 신장 중 한 분이다. 특히 건달바는 긴나라와 함께 법석의 아악(雅樂)을 담당한다고 해 ‘음악의 신’으로 불린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음악으로 전하는 건달바는 부처님 당시의 진리와 감동 그리고 치유를 소리그릇에 담아 보시한다. 올해 78세인 가수 송춘희 법사는 이 시대의 건달바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우보만리(牛步萬里). 우직한 소의 걸음이 만리를 간다 했는데 40여년간 불자가수로서 걸어온 외길은 우리 곁에 있는 산의 나무와, 계곡의 물과, 밤을 비추는 별처럼 한결같다. 있으되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 바로 송춘희 법사가 도량에 있는 이유이다.

‘수덕사 여승’ 인해 불교 귀의
40여년간 불자가수 외길 걸어
군·교도소 다니며 나눔 실천
포교하는 삶으로 남은 생 회향

1983년 첫 번째 찬불가 앨범을 시작으로 총 5종의 찬불가 음반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법화삼부경’ 28품을 각각 노래로 엮어 3장의 CD에 담아 내놓았다. 거기에 1991년 백련장학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소년소녀가장 등 도움이 절실한 청소년 150여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또 전국의 군법당과 교도소를 돌며 손수 마련한 간식을 나누고 노래를 통해 지친 신심을 다독였으니 건달바가 천수와 천안으로 고통을 보듬는 형상이리라.

“40여년 전 처음 불교에 입문해 발심할 당시 그대로 부처님을 향한 신심 가득한 불자다.”(전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광옥 스님) “부처님을 향한 마음과 불자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실천으로 보여준 도반이다.”(정옥진 조계사 봉화회 전 회장)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있어 이런 불자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가수 김활선)

사시(巳時)가 되면 집에 모신 관세음보살님께 예를 올리고 108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교도소, 군법당, 산중 사찰이라도 불법을 전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음성공양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궂은 일도 마다않는다. 저녁예불을 모신 후 지친 몸은 사경으로 회향한다. 정좌해 마음을 가다듬어 ‘법화경’을 사경해야 그의 일상에 회향의 종성이 울린다.

그의 하루하루는 수행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보아도 독실한 불자 가정에서 성장했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송 법사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집안에 5명이 목사였으니 교회에서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를 대표하는 히트곡 ‘수덕사의 여승’ 때문이다.

1956년 악극단 가수로 연예계에 발을 내디딘 그는 10년간의 고생 끝에 ‘수덕사의 여승’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1967년부터 5년 연속 ‘10대가수’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으나 늘 마음에 빚을 진 느낌이었다. 어떤 무대에서나 히트곡 ‘수덕사의 여승’ 때문에 “수덕사에 가봤냐”는 질문을 받아야했다.

“노래 한 곡이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 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수덕사 가봤냐는 질문에 답변할 거리나 찾자며 어느 날 가까운 사찰을 찾았어요. 합장하는 법도 모를 때니 멀뚱히 법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어요. 바늘방석도 그런 바늘방석이 없었죠. 그런데 머리를 들어 부처님을 바라보는데 순간 저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이시는 거예요. 그것이 부처님과의 첫 인연이에요.”

이후 틈나는 대로 법당을 찾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외할머니댁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방송과 공연 등 쉴 새 없이 바쁜 일정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면 외할머니를 찾듯 부처님을 찾았다. 너무나 편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맞이해 준 부처님께 이끌려 그는 불자가 됐다.

이렇게 매듭지어진 인연은 인드라망의 그물로 이어졌다. 1976년 공연차 방문한 캐나다에서 포교를 위해 현지에 머물고 있던 광옥 스님을 만난 것이다. ‘초보불자’라는 말조차 민망했던 그는 광옥 스님에게 불교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물었고, 스님은 불연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지도했다. 또 LA에 머물고 계시던 숭산 스님께 수계를 부탁해 자비의 길로 이끌었다.

“숭산 큰스님께서 ‘백련화’라는 법명을 내려주셨어요. 그리고 열심히 정진해 불자로서 귀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지요. 큰스님 말씀인데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노래를 통해 불교를 알리는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송 법사는 생각했던 것이나 약속한 일을 그냥 말로 끝내는 경우가 없다. 결국 나이 50을 앞두고 찬불가 음반을 내기 위해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1983년, 당시 찬불가 대부로 불리던 고(故) 서창업 선생의 도움으로 삼귀의와 보현행원, 사홍서원, 산회가 등 20곡을 선별해 첫 번째 찬불가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불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금은 법회의식 속 찬불가가 당연한 일이지만 1980년대 초만해도 거부감이 컸다. 찬불가 앨범을 홍보하러 간 사찰에서 “마구니가 왔다”며 호통을 치면서 쫓아내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찬불가를 홍포하겠다는 원력을 세웠기 때문이다. 전법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선지식들도 무수히 많지 않았던가.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스님과 불자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직접 음반을 들고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녔고, 누가 청하지 않아도 음성공양으로 부처님을 찬탄했다.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찬불가 앨범을 찾는 불자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교도소와 군법당 등 자비와 나눔이 필요한 곳에서 불법을 펴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도 이 즈음이다.

“부처님 일을 통해 생긴 정재인데 부처님 일에 사용해야죠. 그래서 모든 수익금을 교도소와 군 포교에 회향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동참하는 분들도 여럿 생겨났어요. 그렇게 군법당도 5개나 건립할 수 있었죠.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이 불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불교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찬불가 한 곡을 부르더라도 제대로 알고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동산불교대학을 비롯해 포교사대학, 삼장대학원 전법사과정, 해동불교범음대학, 동국대 불교대학원 등을 다니며 불교교리와 경전, 수행에 대해 공부했다. 송 법사의 부처님을 향한 정성은 가지를 뻗고 새잎을 돋게 해 큰나무로 성장해갔다.

그렇다고 전법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삶에서 만난 고통과 아픔은 항상 양약이 되어 그의 원력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불자가수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사찰은 물론 교도소, 군법당 등 전국 각지에서 초청이 밀려올 즈음인 1980년대 중반이었다. 포항에서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자동차가 전복됐다. 갈비뼈 8대가 부러지는 중상에 의식도 잃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의 입은 관세음보살님을 염송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련하게 부처님의 뒷모습이 보였고, 반가운 마음에 부처님을 불러 보았다. 그런데 언제나 미소로 맞아주시던 부처님은 오간데 없고 ‘썩 돌아가라’는 불호령만 들려왔다. 호통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고 눈을 떠보니 병원 침대였다. 스님들이야 아무런 의미 없는 꿈이라 경책하겠지만 그는 가피라 확신한다.

“부처님 가피입니다. 그때 부처님의 호통이 아니었다면…. 돌이켜보면 이곳저곳에서 저를 찾기 시작하자 아상(我相)의 싹이 자라는 것을 보고 경책을 내리신거죠. 다시 원을 세웠습니다. 부처님 가피로 얻은 삶은 온전히 불법을 전하고 실천하는데 쓰겠다고요.”

이뿐만이 아니다. 또 한 번의 교통사고와 위암수술 등 몇 차례 더 고통과 질곡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하심(下心)하라는 부처님의 경책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화답해주셨다. 그럴수록 그의 포교 원력도 금강같이 단단해졌다. 팔순을 목전에 둔 그이지만 그의 발길은 오늘도 사찰로, 교도소로, 군법당으로 향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문턱에서 ‘이 생명 다하도록 포교에 온 몸, 온 마음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나아가야만 한다.

“나이가 들면서 활동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회향하지 못한 불사와 나를 기다리는 불자들이 있는데 멈출 수 있나요.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나이 먹은 만큼 전해줄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는 겁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지금껏 배우고 수행한 것들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봄볕에 피지 않는 꽃은 없다. 송 법사의 노래에 불자들이 작은 미소를 짓는다. 40여년 전 마음 밭에 심은 불연의 씨앗이 담긴 노래에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덧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어 온 세상을 품에 안을 듯한 넉넉한 나무, 그의 지금 모습이 그러하다. 꽃을 피우게 하는 자연스러운 봄볕은 송 법사를 떠올리듯 따스하고 자애롭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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