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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무루당 이인희 법사

“아버님 주신 불심유전자가 80생 밝힌 법등명이죠”

▲ 이인희 법사는 “만족할 줄 알며 정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이라고 강조했다.

코흘리개 시절 목탁과 요령은 장난감이었다. 염불과 기도소리는 흥얼거리는 동요에 다름 아니었다. 도량석을 듣고 일어나 염불과 기도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범종소리를 들으면서 석양을 맞이했으니 불교는 그대로 그의 일상이었다. 이제 그 어린아이는 세수 80인 노거사가 되었다. 사찰에서 지냈던 어릴 적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뉘엿뉘엿하지만 아버지 스님의 자비롭고 소박한 살림살이는 어제 일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단 한 번도 “너는 부처님 밥 먹었으니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 스님.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의 삶은 이렇게 지극하다고 일러주신 아버지 스님의 삶이 눈에 선하다.

이인희 법사는 오늘도 환귀본처(還歸本處)를 염송한다. 자비롭고 여여(如如)했던 아버지 스님의 삶을 회상하며 지금 나는 어떠한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본래 마음자리에 새긴 아버지의 삶이 자신의 육신을 통해 이어지고 있기에 염송은 언제나 지극하고 정성스럽다.

사찰서 태어나 부처님 품서 성장
대학 입학후 삶에서 불교 멀어져
뒤늦게 불교 공부하며 포교 발원
불법 향해가는 지금이 가장 행복

부처님 도량에서 태어나 아버지 스님 품에서 자랐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도량을 벗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버지 스님이 몸과 마음에 팔만사천번 새겨놓은 불심은 그를 불자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고 전법과 포교에 전념하게 했다. 그가 ‘무루당(無漏堂)’이란 아호를 만난 것 역시 번뇌와 망상 없이 전법과 포교를 향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필연이리라.

“능인불교대학을 시작으로 금강불교대학, 열린선원불교아카데미, 동산불교대학 등에서 20여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배움의 길을 걸어왔다. 또한 그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지금도 배움을 멈추지 않는 진실한 불자다.”(열린선원장 법현 스님) “2006년 입제한 니까야독송 7년 결사가 회향될 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정진했다. 주위에 좋은 인연을 심어주기 위해 항상 노력하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도반들을 다독이고 그 길을 함께 가도록 이끌어준 공로자다.”(이미령 북칼럼리스트)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등단했지만 열정만큼은 젊은 작가들 못지않다. 그의 작품을 보면 불교에 대한 공부와 사색의 깊이가 느껴지며 그만큼 감동과 공감을 준다.”(시인시대 박일동 고문)

흔히 부자(父子)의 연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이 법사와 불교의 인연 또한 부자의 인연만큼이나 지극하고도 정성스럽다. 아버지는 스님이었고 자연스레 그의 집은 절이었으니 부처님과의 인연을 몇 마디 수식어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몰록 마음이 지극해지는 인연자리를 되새기게 한다.

그가 아버지 스님과 함께 생활한 곳은 사격을 갖춘 여법한 도량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에 부처님을 모신 곳이었지만 사람들은 큰 바위 밑에 있다 해 ‘바위박이 절’이라고 불렀다. 바위박이 절은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마을의 사랑방이자 아이들의 공부방이었다.

유년기과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낸 그는 성균관대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고향인 부여를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자연히 불자로서의 삶은 어린 시절 추억으로만 남아 희미해져 갔다. 누구나 그렇듯 1960년대는 생활고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금의 아내를 만나 뛰어든 섬유사업이 크게 힘을 받자 그토록 염원했던 교육자의 길마저 접어버렸다. 당장 눈앞에 놓인 돈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더욱이 절집에서 자랐지만 신심이 돈독했던 게 아니었으니 불교는 인생의 후순위로 자꾸만 밀려났다.

“쉼 없이 앞만 보며 달음질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의문이 들더군요. 아버지 스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미소로 품어주시던 그 얼굴 말입니다. 그리고 지극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모시던 그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그의 가슴 속 깊이 심어졌던 불연의 씨앗이 60년 만에 움을 틔우고자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스님을 그토록 미소 짓게 만든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기왕 낸 마음 제대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에 능인불교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불가에서 태어나 불가에서 자랐지만 오계를 수지하고 자광(慈光)이라는 법명을 받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그렇게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능인불교대학을 거쳐 금강불교대학, 열린선원불교아카데미 등으로 10여년간 이어졌다.

“10여년간 교학적으로 불교를 접하니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는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아버지는 일평생 부처님 모시는 일에만 매진했는지 의문은 여전했어요. 아직 머리로만 불법을 이해했을 뿐 마음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다 ‘법화경’ 법사품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 곧 여래의 사도’라는 대목을 접하면서 아버지 스님의 그 크신 원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삼계의 대도사이자 사생의 자부인 부처님을 대신해 그 가르침을 전하니 얼마나 보람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목표가 생겼다. 늦었지만 아버지가 걸었던 그 행복의 길에 동행하기로 마음을 냈다. 그즈음 동산반야회에서 ‘부처님의 친설을 빠짐없이 모두 읽겠다’며 7년간 5부 니까야[아함경]를 완독하는 결사가 시작됐다. 그의 나이 72세였지만 그 행복의 길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이듬해에는 동산불교대학에 입학해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고, 2년 과정을 마친 후 동산불교대학원에 입학해 교학의 깊이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 사이 연합포교사고시에 합격해 포교사 품수를 받았고, 대학원 졸업으로 법사 법계도 품수했다. 물론 연합포교사고시가 시작된 이래 최고령 합격자라는 족적도 남겼다. 여기에 의식반과 염불반 과정을 이수하고 지난해 니까야독송 7년 결사를 회향했으니 이제 대중에게 나아갈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 몸은 늙었지만 전법과 포교에 대한 열정은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배우고 익힌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법문할 내용을 준비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운 날들입니다. 늦은 만큼 더 열심히 준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 남긴 마지막 당부 역시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정진 없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지나간 날들에 비해 턱없이 짧을 것은 자명합니다. 눈 뜨지 못했던 그 많은 시간을 참회하며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행복하다. 늦게 찾은 행복의 길이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하다. 또한 인생의 후배들은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초발심자경문 첫머리에 ‘백년탐물일조진 삼일수심천재보(百年貪物一朝塵 三日修心千載寶)’라는 말이 나옵니다. 백년 동안 욕심내 모은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지만, 사흘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가는 보배가 된다는 뜻입니다. 생활경제에 연연해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누구나 빈손으로 떠납니다. 만족할 줄 알며 정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이른 새벽 맑은 공기를 가르며 삼배로 하루를 연다. 일 배는 부처님을 향해, 일 배는 가르침을 향해, 일 배는 불연의 씨앗을 심어준 아버지 스님에 대한 감사의 인사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펜을 잡는다. 행복으로 향하는 그 길로 안내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해 글로 옮긴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행복의 미소가 피어난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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