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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제작 연대

동아시아 미술양식상 ‘539년’vs 고대 문헌 근거로 ‘419년’

▲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앞면 및 뒷면. 고구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19호. 전체 높이 16.2㎝.

논쟁이란 학문적 견해의 완성을 위한 기초적인 과정이다. 논쟁을 통해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연구자는 주장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자료와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러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주제들을 묶어서 고찰하면 그 학문의 나아가는 방향도 엿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논쟁이 연구자에게 그리 바람직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논쟁을 넘어 비방으로까지 치닫기도 한다. 실제로 자신이 하면 비판, 남이 하면 비방인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의령에서 고구려 불상 발견
광배에 ‘연가7년 기미년’ 기록

역사학계는 ‘419년’설 지지
장수왕 재위 7년과 딱 맞아

미술사학계, ‘539년’설 주장
419년은 미술양식상 불합리

그렇다면 바람직한 논쟁이란 무엇일까? 첫째로 학문의 세계에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다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은 똑같은 설명이라도 “더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고, 더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의 전제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전제란 “만약 A이면 B이다”와 같은 가정이다. 모든 학설은 추측과 가정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면 더욱 의미 있다. 그런데 전제 자체를 비판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따라서 비판은 다만 전제나 가정 위에서 전개되는 논증과 논리에 집중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있어서나 타인에게 있어서나 그 주장 자체 내에서 논리적 모순이 생기는 경우 그것을 지적하고 보완하는 것이야말로 논쟁의 건설적인 방향일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 다루고자 하는 불교미술사적 논쟁이라는 것도 어느 해석이 옳고 어느 해석이 틀리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개될 주장들은 모두 설득력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이다. 따라서 논쟁을 소개하는 목적은 유물을 바라보는 시점이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 아울러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 첫걸음으로 삼국시대 불교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가7년명 불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불상은 1963년 경남 의령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광배 뒷면에 불상조성의 내력을 담고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고대 불교문화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명문은 “연가(延嘉) 7년 기미(己未)년에 고려국 낙랑의 동사(東寺) 주지”가 사도 40인과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만약 명문이 아니었다면 출토지가 경남이니만큼 신라불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발견 당시에는 고구려 불상이 신라 땅에서 발견될 수는 없다고 보고 여기서의 고려는 고구려가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의 고려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고 한다.

명문의 해석에서 가장 큰 논쟁은 ‘연가7년’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연가’ 연호는 중국이나 그 외 다른 나라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독자의 연호임을 알 수 있다. 아쉽게 고구려의 연호가 정확히 언제 사용되었던 것인지 확인된 바는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년) 시기의 연호인 영락(永樂) 외에는 없다. 유일한 단서는 ‘기미’라는 간지(干支)명이다. 간지명은 60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몇 개의 가능성이 있는데,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372년 이후의 기미년을 살펴보면 419년, 479년, 539년, 599년 등이 이에 해당된다.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위의 몇 개의 기미년 중에서 고구려의 어떤 왕의 재위 7년과 맞아떨어지는 사례를 찾는 것이다. 실제로 찾아보면 장수왕 7년이 419년이 되어 딱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이 불상을 419년으로 보는 설이 등장했다. 이는 주로 역사학자들이 보는 견해였다.

▲ 인도식으로 가사를 입은 5세기의 중국 불상. 대동(大同) 운강석굴 제20굴. 북위시대(460년대).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이 양식적으로 판단하기에 419년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발견되는 400년대 전반의 불상들과 비교해보면 이 불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불상의 가사, 즉 법의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이 시기에는 모두 인도불상의 가사 착의법을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연가7년명 불상은 중국식의 도포자락을 걸친 모습을 하고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지 옷입는 방법 하나에 무슨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나 무시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입은 불상이나 기독교 성상이 성소에 봉안되는 일이 일반적인지를 보면 전통적으로 성인(聖人)을 묘사하는데 있어 옷을 갈아입힌다는 것이 매우 생소하고 특이한 일임을 알 수 있다.

▲ 연가명 불상과 유사한 중국 북위 정광(定光)5년명(524) 금동불입상.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중국에서는 중국식, 즉 한족(漢族)의 옷을 입은 불상이 등장하는 것을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 시기의 일로 보고 있다. 효문제가 한족 문화를 북위 문화에 접목시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이른바 복제개혁을 단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연가7년을 419년으로 본다면 중국보다도 먼저 고구려에서 한족 복식을 한 불상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가7년명 불상과 매우 유사한 중국의 불상은 정광(定光) 5년(524)명 금동불입상 정도부터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100년도 더 빠르게 우리나라에 이런 양식의 불상이 등장한 것이 된다.

미술양식에서 중국보다 우리나라가 선행하는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만약에 중국과 우리나라에 불상이 몇 점만 남아있다면 그런 가설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연가7년명 불상을 419년으로 옮겨놓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다른 불상들을 재배열해야한다. 재배열 뿐 아니라, 그러한 재배열에 따른 양식전개를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 우선 왜 고구려에서 그런 한족 복식을 한 불상이 등장하게 되었는가부터 시작해서 그 양식이 어떻게 100년 뒤에 북위에 영향을 주었는가에까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반면에 미술사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539년으로 보고, 대신 왜 연가7년이 어떤 왕의 재위 7년째가 아니라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35) 9년째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즉 안원왕 2년에 어떤 연호에서 ‘연가’로 연호를 바꾸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연호가 바뀌는 경우는 많았다. 연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중국의 경우, 특히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에는 연호가 자주 바뀌어서 심지어는 1년만에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아가 삼국시대 불상으로 편년되는 불상들에는 ‘연가’ 이외에도 ‘건흥(建興) 5년’, ‘영강(永康) 7년’ 등의 연호가 등장하는데, 이들 연호와 간지명도 실제 삼국시대 제왕들이 등극한 연도와 맞춰보면 맞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어쩌면 애초부터 연호의 연도와 제왕의 등극 연도를 맞춰보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419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첫째로는 북위와는 무관하게 한족 왕조인 남조에서는 영명(永明) 원년(483년)에 이미 한족 복식을 한 불상이 등장하고 있었다. 더불어 북위 황실의 역량을 보여주는 운강석굴의 초기 석굴인 16굴 주존불상 역시 한족 복식을 하고 있는데, 이 상이 460~47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미술사학계에서도 연가7년을 539년보다 한 갑자 앞선 479년으로 보는 해석이 등장했다. 이런 추세라면 새로운 자료의 출현에 의해 419년설이 다시금 제기될지도 모른다. 여하간 419년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왜 419년일 수 없는가’에 답하기 위해 미술사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문제가 없으면 답도 없기 마련이다.

연가명 불상의 이어지는 명문을 통해서는 이 불상이 현겁천불 중의 29번째 부처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이며 천불조성에 참여한 40명의 사도 중에서 비구 겁류(怯類)가 발원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천불을 대략 40여명이 나누어 조성했다면 한 분이 25구 정도의 불상을 담당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혹 이 불상은 29번째이므로 겁류라는 스님은 26~50번째의 두 번째 그룹을 담당한 스님이셨던 것일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불상조성의 공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미술사학자는 유물(遺物), 역사학자는 문헌(文獻)을 판단의 전거로 삼는다. 둘 다 중요한 과거의 기록이므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유물과 문헌이 제공하는 정보가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만약 두 해석이 충돌할 경우, 미술사학자는 유물을 기준으로 문헌정보를 재해석하는 반면, 역사학자는 문헌을 기준으로 유물을 재배열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77호 / 2015년 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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