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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나라 최초 석탑은

목탑 닮은 미륵사지 탑 대세 속 정림사지 탑 ‘선행양식’ 대두

▲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 백제, 7세기 전반. 국보 11호.

우리나라에서 석탑의 존재는 각별하다. 중국에서는 벽돌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이 세워진 반면, 우리나라는 석탑이 유행하여 그 개성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석탑이 처음부터 세워졌던 것은 아니고, 먼저 목탑과 전탑이 유행한 다음 아마도 백제에서 처음으로 석탑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언제, 왜 백제에서 석탑이 창안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나라 석탑 연구사에 있어서 첫 장을 장식한다. 물론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격렬한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왜 발생했는가’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언제 발생했는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고유섭, “미륵사지 탑이 최초”
석탑은 목탑서 발전했다고 파악
미륵사지 탑은 전형적 목탑 양식
그 뒤 조성된 것이 정림사지 탑
해방 이후에도 이견 없이 계승

1971년 정림사지 발굴로 새 국면
정림사지 탑 처음부터 함께 조성
“정림사 석탑이 전형적 목탑양식”
사비천도 이전 유구들도 확인
과학적 측정 결과 625년쯤 조성

풍성한 담론…학계 진보 이끌어
논쟁 2라운드로 넘어가는 양상

가장 전통적인 견해는 일제 강점기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 선생에 의해 제시되었다. 고유섭 선생은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태두답게 양식론(樣式論)을 근거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고, 이어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세워졌다고 보았다. 여기서 양식론이란 우리나라 석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발전했다고 가정하고, 목탑에 가까운 양식을 보이는 석탑일수록 오래된 석탑이라는 가설에 기초한 견해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미륵사지 석탑은 그야말로 재료만 돌일 뿐, 그 생김새는 완연한 목탑의 모습이다. 이는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다층형식의 목조건축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고유섭 선생의 견해는 해방 후 미술사학계에 이견 없이 계승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론적 연구 성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 충남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 7세기 전반. 국보 9호. 높이 8.33m.

그런데 1979년부터 실시된 정림사지 발굴조사결과,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정림사지탑의 지반을 조사한 결과, 정림사지가 처음 세워질 때 석탑의 지반도 함께 조성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대했다. 왜냐하면 기존에는 부여의 정림사지가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대의 익산에 세워진 미륵사지보다 앞서는 것은 맞지만, 정림사탑만은 나중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정림사탑 아래의 지반은 정림사를 처음 세울 때의 지반과는 다를 것이라고 가정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림사 창건기에 석탑의 지반까지 함께 다져졌다면 정림사탑은 나중에 세워진 탑이 아니라 정림사가 세워질 때 함께 세워졌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륵사보다 먼저 세워진 정림사의 탑이 연대가 더 앞서는 것이다.

이 발굴결과에 대해 비판적 주장이 제기되었다. 초창 시기에 다져진 탑의 지반은 현재 우리가 보는 석탑의 지반이 아니라, 석탑 이전에 존재했던 목탑의 지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사라진 정림사지 목탑, 미륵사지 석탑, 그리고 다시 정림사지 석탑의 순서로 전개된다는 가설이 등장했다. 그러자 이 비판에 대해 다시금 발굴결과를 바탕으로 반론이 이루어졌는데, 만약 탑 지반 위에 목탑이 먼저 존재했다면, 목탑의 기둥을 세우기 위한 적심 흔적이 남아있어야 했지만,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정림사에는 처음부터 지금의 석탑이 세워져 있었다는 내용이다.

석탑의 편년 논쟁은 불상의 양식문제로 확산되었다. 목탑형식을 얼마나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가 하는 기준도 양식론에 기반한 것이지만, 시기별 조형양식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정림사탑의 날씬하고 날렵한 양식은 중국 남북조 시기의 동·서위(東·西魏, 534~556년) 양식에 가깝고, 미륵사지탑의 웅장하고 육중한 양식은 북제·주(北齊·周, 550~581년) 양식에 가까운 것이어서, 정림사탑이 양식적으로 앞선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오히려 정림사탑이야말로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5중탑 같은 전형적인 동아시아 목탑 양식의 충실한 번안이며, 미륵사지탑은 분황사탑과 같은 전탑의 선행양식으로서 주목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여 정림사탑 선행설에 무게를 더했다.

이렇게 팽팽하게 전개되던 논쟁은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와 정림사지의 추가조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2009년 미륵사지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함의 명문을 통해 무왕의 비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 관여하여 639년에 미륵사가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미륵사지가 무왕대에 건립되었다는 것은 ‘삼국유사’를 통해 알려져 있었지만, 이 명문을 통해 639년이라는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무왕 재위기의 말년으로서 백제 석탑의 시원양식이 백제 멸망(660년) 불과 21년 전에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나아가 정림사탑을 미륵사탑보다 나중에 세워진 탑으로 본다면 정림사탑은 결국 639년 이후부터 백제멸망 직전 사이에 세워진 것이 된다.

정말로 이렇게 석탑의 시원양식이 늦게 확립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무렵, 그간의 축적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정림사지 출토의 기와편 및 조각상의 편년이 보다 세밀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불상 및 소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북위(北魏, 386~534년)의 조각양식과 유사하여 538년 사비천도 이후 정림사 창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거기다 백제가 주로 중국의 남조(南朝)와 교류해왔다는 견해 속에서 새롭게 북조(北朝)와의 교류가 제시된 것도 중요한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림사지 석탑보다 선행하는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2011년 발간된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는 그간 논의된 정림사 창건기 지층 아래로 더 내려가는 지층에서 청동기 시대를 포함한 사비천도 이전의 유구까지 확인된 성과가 공개되었다. 그런데 탑을 쌓기 위해 다졌던 지반 아래에서 발견된 원형노지 유구에 대하여 과학적 조사방법의 하나인 고고지자기 측정을 실시한 결과 625±20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림사지가 사비천도를 즈음하여 창건되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뒤엎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어떻게 보면 큰 변화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미륵사탑이 639년 무렵에 세워진 것과 정림사지가 최소한 7세기에 들어서 창건되었다는 것을 통해 둘 모두 기존의 견해보다 늦게, 더 구체적으로는 무왕 대에 세워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변화이지만, 이러한 사실들도 두 탑의 선후관계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로서 두 탑의 선후관계를 논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원론적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의 판단을 덧붙이자면 미륵사지 석탑이 정림사탑에 비해 세부적인 면에서 목탑구조의 흔적을 더 많이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륵사지탑은 탑 단독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미륵사에 세워져있던 3기의 석탑 가운데 하나임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미륵사에는 높이 60m 가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목탑이 서있었고, 그 동·서로 석탑이 세워졌는데, 논의의 중심이 된 석탑은 그중 서탑이다. 동·서탑은 중앙의 목탑과 시각적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목탑과 닮게 조성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가운데는 목탑, 양 옆에는 석탑을 세웠을까의 문제가 이 쟁점의 키워드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동·서 석탑은 원래부터 미륵사의 마스터플랜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쌍탑의 개념으로 추가된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가람배치는 1탑 1금당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양쪽 석탑 뿐 아니라 금당 옆의 두 건물도 그때 함께 추가되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지만 아직 확실치 않다. 심지어는 2011년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정림사지가 1탑 1금당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제시되어 논쟁은 점차 2라운드로 넘어간 양상이다.

▲ 일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오중탑(五重塔). 7세기 후반.

이러한 논의는 학문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석탑은 과연 목탑을 번안하는 과정에서 창안된 것인가 하는 양식론적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하나의 사찰이 창건될 때 금당과 탑 중에 어느 쪽이 먼저 만들어지는가의 문제, 백제기와의 편년문제, 동시기 불상들과의 양식비교 문제, 발굴결과와 유물해석의 충돌문제, 부여와 익산이라는 두 지역의 상관성 문제, 아울러 과학적 조사방법론의 수용 등이 거론된 것은 보다 풍성한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바로 학문의 진보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79호 / 2015년 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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