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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돈황보살(敦煌菩薩)’ 축법호

기자명 법보신문
동아시아역경사 -

36국 언어에 능통한 어학 천재 40년간 150만부 이상 번역

원문에 충실한 직역 방법 불경 번역의 새로운 장 구축




서진 시대를 대표하는 역경가로 축법호(竺法護)를 손꼽는다. 축법호의 선조는 본래 대월씨국 사람인데 몇 대에 걸쳐 돈황에 살았다. 본래 대월씨국 출신이기 때문에 ‘지(支)’를 성으로 삼는 것이 중국의 통례이지만, 축법호의 경우는 인도 출신인 스승 축고좌(竺高座)의 성에 따라 ‘축(竺)’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본 이름은 ‘다르마락샤(Dharmaraksa)’이다. 8살 때 출가하여 불법을 전하는데 뜻을 세워 스승을 따라 서역 각지를 유랑하며 서역 여러 나라에 흩어져있던 불경을 수집하여 돈황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서역의 36국 언어에 능통했다고 하니 가히 ‘어학의 천재’이다.

축법호는 일생동안 오직 역경작업에만 매달렸다. 돈황에서 장안, 낙양에 이르기까지 머무는 곳마다 거의 쉬지 않고 역경작업에 전념하여 진시 년간(265-274)에서 영가2년(308)까지 약 40년간 150부 이상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현존하는 경전만 계산해도, 정법화경, 광찬반야경, 유마힐소설법문경, 점비일체지덕경( 화엄경 십지품의 이역), 미륵하생경 등의 대승경전을 비롯해 보요경, 생경 등의 설화류에 이르기까지 70여종의 경전이 남아 있으니 공전의 역경 업적이다. 이 때문에 2세기 말의 지참, 5세기 초의 구마라집, 7세기의 현장과 나란히 ‘사대역경가’로 꼽히기도 한다. 승우는 “불교 경전의 가르침이 중국에 널리 퍼진 데는 축법호의 힘이 크다”고 평가하며, “당시의 사람들이 축법호를 ‘돈황보살’로 칭송하였다“(출삼장기집 축법호전)고 전한다. 말년에 장안 청문 밖에 절을 짓고 살다가, 서진 말엽 난을 피해 민지(繩池, 하남성 민지현)로 내려갔다가 병에 걸려 임종하니 세수 78살이었다(양고승전 축담마라찰전). 임종 시기에 관해서는 아직 이견이 분분하지만 양고승전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축법호의 생존연대는 236-313로 추정할 수 있겠다.

출삼장기집 합방광광찬약해서 에서 도안은 광찬반야경의 번역상황 및 유포경위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광찬반야경은 태강7년(286년) 11월 25일에 장안에서 번역되었는데, 이 때 우전(于門)국의 승려 기다라(祈多羅)가 가져온 범본을 축법호가 중국어로 구술 번역하고, 섭승원이 필수 노릇을 하였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번역본은 곧바로 양주로 흘러가 버렸고 따라서 중원지방에는 유포되지 않았다. 혜상(慧常), 혜변(慧辯) 등 도안의 제자 몇 사람이 인도로 가는 길에 양주에 들렀다가 우연히 광찬반야경을 발견하고는 사람을 시켜 태원 원년(376년) 5월에 양양에 있던 도안에게 보내니, 이 때에 비로소 중원 지방에 광찬반야경의 존재가 알려진다.

도안의 기록은 당시의 번역 상황에 관해서도 비교적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역경사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축법호가 범본을 읽으면서 이를 중국어로 구술 번역하였고, 이를 중국 측의 재가 거사인 섭승원이 받아서 필사하는 형식을 택하고 있으니 이것이 당시의 구체적인 번역 상황이었을 것이다. 출삼장기집의 정법화경기(작자 미상)도 정법화경의 번역 상황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정황 묘사를 한다. 정법화경의 역경 작업은 286년 8월 10일에 시작하여 9월 2일에 끝나니 가히 ‘초인적인’ 능력이라 하겠는데, 정법화경기의 기록에는, 인도의 승려 축력(竺力), 구자국(龜玆 Kucha)의 재가거사 백원신(帛元信)이 291년 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교정을 본 일이 덧붙여져 있으니, 축법호의 역경 태도가 얼마나 치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축법호의 역풍에 관해서, 도안은 “방광반야경(축숙란 역)은 번역문이 간략해서 이해하기는 쉬우나 생략이 많은 탓에 따로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자주 있다. 광찬반야경은 중복되는 부분이라도 원문에 따라 하나도 생략함이 없이 전부 번역하였기 때문에 주도면밀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원문을 중시하는 직역이었기(辭質勝文)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앞 뒤 문맥의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두 한역본을 서로 보완해서 읽으면 깨닫는 바 많을 것이다.”(합방광광찬약해서에서 요지만 발췌)라고 평한다. ‘辭質勝文’이란 평가에서 축법호의 번역이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종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북경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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