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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비구니 묘엄이 탄생하다

기자명 김택근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한국 현대불교 비구니사에 큰 획을 그은 묘엄 스님. 스님은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였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대승사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조선 부녀자들을 색출해서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조선이라는 이름만 남았지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의병조차 사라졌다. 둘러봐도 불러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슬픈 산하에서는 소름만이 돋아났다.

집에서, 들에서, 골목에서 조선 부녀자들이 끌려갔다. 일제는 초등학생까지 꾀거나 위협하여 일본 또는 남태평양 지역으로 보냈다. 짓밟힌 딸들은 먼 나라에서 울부짖었다. 전쟁의 광기가 스며들어 이 땅은 지옥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인순이 그 지옥의 땅을 막 벗어나 산에 오른 것이다.

44세 청담은 출가한 지 벌써 19년이 넘었는데 14세 딸이 찾아 왔다. 그렇다면 중이 아기를 낳았음이었다. 청담은 파계를 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담은 고향 진주의 재가불자들이 보낸 초청장을 받았다. 연화사에서 법회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청담은 망설이다 초청에 응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 고향에 내려가 연화사 낙성법회에서 법문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속가의 어머니를 만났다. 늙은 어머니는 장삼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종손이 아들을 낳지 않고 출가했기 때문이었다. 청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비록 인연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그 옛집에 하루쯤 쉬어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하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설복 당했고, 그리하여 어머님의 뒤를 따라 그 옛 집을 찾아갔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야 했다.

“네가 중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느냐.”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해있는 험한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강압이 되었다. 나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청담대종사전서1 : 마음’)

그렇게 하룻밤 파계로 둘째 딸이 태어났고, 그 딸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인순이는 청담에게 어머니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딸을 산사로 보낼 수밖에 없는 전후 사정이 담겨있었고, 기왕에 절을 찾아갔으니 인순이를 설득하여 출가시켜 달라고 쓰여 있었다.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그날 밤 성철과 청담은 인순이가 머무는 원주 방을 찾았다. 깜박이는 호롱불 아래서 성철이 얘기를 꺼냈다. 청담은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성철은 처음 부처님 일대기를 얘기해줬다. 탄생, 출가, 고행, 깨달음, 열반까지 차례로 이어갔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성인의 삶이 관심 밖에 있을 뿐이었다. 다른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야 했다. 성철과 청담은 날마다 저녁 공양을 마치면 인순을 찾아갔다. 성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위인, 장군, 왕들의 삶을 풀어놓았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인순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인순은 성철의 넓고도 넓은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님들은 목탁 치며 염불이나 외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책을 보지 않고 얘기하는데도 선생님들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았다. 성철은 매번 이야기 말미를 불교 교리로 돌렸다. 처음엔 은근히, 나중엔 노골적으로 출가를 권유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가고 인순이 문득 물었다.

“스님, 스님이 알고 있는 것 모두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 네가 중이 되면 다 가르쳐주지.”
“그럼 중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인순이는 성철의 ‘지식’에 끌려 승려가 되기로 했다. 인순은 대승사 근처 비구니 절인 윤필암에서 월혜 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다. 행자생활도 하지 않고 승복을 입었으니 청담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며 엄연한 ‘산중 특혜’였다. 하기야 망가진 승단에 수계식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원로 비구들이 계를 주면 그만이었다. 청담은 도반 성철이 인순에게 사미니계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철은 상좌도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나섰다.

“나는 법상에 오르지 않는 사람인데 순호(청담) 스님 딸이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미니계를 설해주지.”

성철은 자신의 말대로 그 후 한 번도 사미니계를 설한 적이 없다. 단오절인 음력 5월5일, 윤필암이 제법 부산했다. 인순이 사미니계를 받는 날이었다. 산 너머 큰 절에서 비구들이 넘어왔다. 속가의 어머니도 전날 도착해 있었다. 윤필암 큰 방에 법상을 차렸다. 다른 수계자는 없었다. 오로지 인순이 만을 위한 법상이었다. 계사(戒師) 성철이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 물었다.

“첫째는, 이 명(命)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 동안 산목숨을 죽이지 말 것이니 이를 능히 지키겠느냐?”
“능지(能持).”
인순이 대답했다. 사실 능지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윤필암 비구니가 시킨 대로 대답할 뿐이었다.
“두 번째, 이 명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동안 도둑질을 말 것이니, 이를 능히 지키겠느냐?”
“능지.”

인순은 음행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또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향을 바르지 않으며, 노래하고 춤추지 않겠다고 했다. 높고 큰 자리에 앉지 않고, 때 아닌 때에 밥 먹지 않고, 금은보화를 지니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10계를 설한 후 성철은 묘엄(妙嚴)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현대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거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험한 시국이 여승 하나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이후 묘엄은 아버지와 스승의 바람대로 비구니들의 스승이 되었다. 묘엄은 대강백 경봉·운허에게 교학을 배우는 등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두루 받으며 고된 수행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 동학사·운문사 등에서 비구니강원을 이끌었고, 봉녕사 주지와 승가대학장을 지냈다. 파계로 낳은 딸이 큰스님이 되었으니 이를 두고 누군가는 ‘청담이 남긴 사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청담의 하룻밤 파계는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을까. 또 불제자를 낳았으니 파계의 업은 어찌 되는 것인가.

수계식을 마치자 어머니가 묘엄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것은 속세의 모녀 관계를 끊음이었다. 딸이 속가를 벗어나 비구니 승가에 들어감이었다. 한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이제 월혜 스님의 제자였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승려가 되었지만 세속의 인연을 어찌 두부 자르듯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묘엄도, 어머니도, 다른 비구니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청담과 스승 성철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청산은 그저 무심했다.

어머니는 다시 진주 속가로 돌아가야 했다. 절을 나서는 어머니를 성철이 불러 세웠다.

“다시는 묘엄을 찾지 마시오. 묘엄이 보살을 보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산길을 내려갔다. 묘엄을 산 속에 남겨두고 숲길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모습이 실로 작아보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성철은 문득 산청 묵곡리에 두고 온 아내와 두 딸이 생각났다. 어림 헤아려보니 큰 딸 도경은 묘엄보다 한 살 어린 13세였다. 사실 도경은 그 나이에 중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뜻을 담아 아버지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경허 스님의 ‘참선곡’을 보고는 문경 대승사에 계시던 아버지 큰스님께 ‘출가하러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 언니가 불교나 출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에 가서 입을 것이라며 바지를 만들던 기억은 난다.’ (불필 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편지는 성철보다 원주를 맡고 있던 청하 노스님 손에 먼저 들어갔다. 성철은 안거 중이었고, 선승의 성정을 잘 아는 청하는 속가의 편지를 전하지 않고 대신 자신이 답을 보냈다.

‘큰 중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 학업을 마치고 오너라.’

청하는 나중에 그 사실을 성철에 알렸다. 어찌됐든 도반의 딸에게는 계까지 설했으면서 정작 자신의 딸은 출가를 막은 셈이었다. 성철은 그것이 자꾸 짚였다. 그리고…. 이듬해 큰 딸 도경이 죽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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