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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최초의 사자후, 성철사상의 초전법륜 ‘운달산 법회’

기자명 김택근

▲ 김룡사에 머물던 시절의 성철 스님이 산내 대중과 대학생 불자와 자리를 함께한 모습.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김룡사의 성철은 인재불사를 서둘렀다. 사람을 키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려야 했다. 성전암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나눠줘야 했다. 절문을 열어 사부대중을 맞았다. 성철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중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심(下心)을 갖춘 이들에게 비로소 법문을 했다. 자신이 집대성한 중도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

북한산 도선사에서 청담과 겨울을 났다. 청담과 성철은 당시에 많은 사진을 찍었다. 아마 행자나 신도가 줄곧 따라다니며 도반의 ‘행복한 시간’을 담았을 것이다. 사진을 보면 흡사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표정이 밝다. 차 안에서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사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도반의 보살핌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성철은 1965년 이른 봄 김룡사 산문을 넘었다. 처음으로 ‘조실’이란 벼슬을 달았다.

김룡사는 588년(신라 진평왕 10) 운달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 이름은 운봉사였다.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알 수 없고, 1624년(인조 2) 혜총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문경 부사 김 씨가 운달산에서 불공을 드려 아들을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용(龍)이라 지어서 절 이름을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꿨다고 한다. 운달산 금선대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수십 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말사로 거느렸던 직지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절도 윤회를 하고, 흥망성쇠의 언덕 어딘가에 앉아 있음 아니던가. 제행무상이다.

당시 김룡사는 비구니 사찰이었다. 김룡사에 가려면 점촌에서 거의 40리를 걸어가야 했다. 깊고도 외진 곳에 있으니 신도들 발걸음이 뜸했다. 절은 크고 보시는 적다보니 비구니들이 절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때 산내 암자인 양진암에 머물던 묘전 스님이 성철을 모셔오자는 의견을 냈다. 큰스님 가르침도 받고 절도 일으켜 보려 했다. 묘전은 묘엄 등과 더불어 성철사상을 깊이 받들고 있었다. ‘집도 절도 없던’ 성철은 제자들과 도선사를 나왔다.

성철은 김룡사에서도 수행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김룡사 대중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참선을 했다. 성철에게서는 고승의 위엄과 기운이 우러나왔다. 당시 김룡사 선방을 찾아갔던 대원 스님은 성철의 풍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위풍당당한 기가 느껴졌어요. 천하를 누르는 듯 고고한 기상이었지요.”

김룡사 경내에 봄이 찾아와 노닐 때였다. 스승 동산 스님이 입적했음을 알리는 부음(訃音)이 운달산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다. 성철은 소쩍새 울음을 밟으며 산을 내려갔다. 천제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전국에서 몰려든 스님과 신도들로 범어사 경내는 장터처럼 붐볐다. 장례식에는 3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목탁소리가 계곡을 메웠다. 영결식에서 청담이 조사를 바쳤다.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 어두운 밤에 횃불이 꺼졌구나!/ 어린 아이들만 남겨두시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 동산이 물 위에 떠다니니/ 일월이 빛을 잃었도다/ 봄바람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동산 스님은 일생 동안 가람 불사와 포교 활동에 매진했다. 또한 승단의 계(戒)를 바로잡았다. 불교정화운동을 위해 두 번이나 산문을 나섰다. 갈 곳 없는 수행자를 내치지 않았고, ‘닭이 천 마리면 그 가운데서 봉황이 나온다’는 말로 대중을 품었다. 조계종 종정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동산은 1965년 이른 봄에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보살계를 설하고 대중에게 선언했다.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오르지 아니하리라.”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서 그 뜻을 새겨보았다. 동산은 입적하는 날에도 대중과 함께 도량을 정성스레 비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해질 무렵 홀연 몸을 바꾸었다. 육신보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겠다며 의사의 칼을 내려놓고 목탁을 든 지 53년, 세수는 76세였다.

성철은 스승의 사리탑비 비문을 지었다. 끝부분은 이렇다.

‘송(頌)하기를 영골사리는 청정하고 찬연하니 부처님이 실색하고 달마가 점두(點頭)하도다. 한 여름에 서리 내리고 엄동에 꽃이 찬란하도다. 해는 푸른 산마루에 비추고, 달은 붉은 계수나무에 걸렸도다. 흰 구름은 하늘에 비껴가고, 붉은 안개는 바다에 잠기었으며 푸른 용은 웅비(雄飛)하고 표범은 용맹스럽게 달리도다. 날카로운 칼날은 감로수요, 비둘기 깃은 맑은 차(茶)로다. 어두운 밤의 보배구슬과 낭떠러지의 무지개 다리로다. 시체가 쌓이어 산이 높고 피가 흘러 폭포가 되었네. 향기로운 바람은 땅을 휩쓸고 꽃비는 하늘에 가득하네. 봉황은 예천(醴泉)을 마시고 기린은 경림(瓊林)에 들었도다. 성주(聖主)가 홀(笏)을 잡고 춤을 추니 시골 늙은이가 한껏 노래 부르네.’  -문인 성철이 울며 짓다.

성철은 은사스님의 입적에 새삼 인간의 짧은 생을 실감했다. 일각에서는 성철이 스승인 동산 스님에게 소홀했다는 얘기들도 했다. 하지만 성철은 스승을 가슴에 고이 품고 있었다. 단지 깨달음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 스승을 섬기는 길이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정진해야 했으며 홀로 ‘중의 길’을 가야했다.

“오해를 받을만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며 동산 스님이 종단 대표로 남방에 다녀오시더니 남방스님들의 노랑가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노란 옷을 입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성철 스님은 봉암사에서 괴색을 주장했지요. 괴라는 것은 무너질 ‘괴(壞)’자입니다. 단색을 입지 말고 색을 무너뜨려서 입으라는 것으로 율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색을 무너뜨리느냐, 바로 청, 백, 흑이지요. 그런데 불교계 어른들이 남방을 다녀오더니 ‘그쪽을 따라해야 한다, 세계추세가 그렇다’고 하며 노란 옷을 입고 와버렸습니다. 이래놨으니 성철 스님이 보통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언론들도 괴색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산 스님께서도 나중에는 그게 옳다고 했습니다. 일부러 괴색 가사를 지어 나에게 스님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하여 내가 괴색 가사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사이가 좋네, 안 좋네 하면 안 되지요.” (천제 스님)

김룡사의 성철은 인재불사를 서둘렀다. 사람을 키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려야 했다. 성전암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나눠줘야 했다. 절문을 열어 사부대중을 맞았다. 성철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중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심(下心)을 갖춘 이들에게 비로소 법문을 했다. 자신이 집대성한 중도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

1966년 성철은 하안거 기간에 중도법문을 했다. 비구, 비구니, 신도들과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회원 등 모두 100여 명에게 ‘반야심경’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를 설했다. 대불련 소속 학생들은 성철이 도선사에 머물 때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덕산거사로 더 알려진 이한상 씨도 학생들과 함께 김룡사 법문을 들었다. 법문은 20일 동안 계속됐다. 성철의 법문은 자상하면서도 예리했다. 대중을 향해 처음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성철사상의 초전법륜이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며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법문에 빨려 들어갔다. 불교 이론은 정연했고 비유는 정치(精緻)했으며 과학적인 인용은 흥미로웠다. 성철을 엄격한 수행자, 괄괄한 선승으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해박하고도 유려한 법문은 일반 재가불자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이한상 씨도 이때 감명을 받아 평생 성철을 받들고 성철의 불교개혁 구상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불교핵심 사상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했다. 또 최면술의 이치로 육도윤회를 설명하고, 연기(緣起)법문에서는 시간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우주과학의 원리를 동원했다. 쉽고도 오묘했고 또 타당했다.

“운달산 법회가 해인사 백일법회의 모태입니다. 백일법문은 운달산 법회의 되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또한 백일법문은 초점이 흐려지고 좀 산만한 면이 있어 아쉬웠습니다. 운달산 법회는 참석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진지했습니다. 그때 반야심경 사상을 다 설명하셨는데 정작 백일법문에는 그 말이 빠졌습니다. 산중 법문에 감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천제 스님)

이 대중법회를 사람들은 ‘운달산 법회’라 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법회의 전체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성철은 녹음 같은 것을 일체 하지 못하게 했고, 제자 천제가 몰래 녹음한 테이프도 닳아서 재생시킬 수가 없다. 이제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띄엄띄엄 증언해 줄 뿐이다. 앞으로 그 사람들도 띄엄띄엄 사라질 것이다.

법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등) 또한 깊이 감동했다. 20일 간의 법회가 끝난 후 다시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으로 이어졌다. 김룡사에서 법문을 들었던 박성배 교수와 김금태, 이진두 학생은 출가해서 성철의 제자가 되었으니 바로 원조, 원공, 원기이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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