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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종미학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자명 명법 스님

선과 중국문화, 그리고 서양 횡단하는 통합적 관점 필요

▲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간결하고 담박한 디자인에 미디어와 인터넷을 인드라망으로 연결한 젠 스타일(Zen style)의 스마트폰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선적인 감성을 자극했다. 사진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패드 프리젠테이션 장면.

미학은 18세기에 비로소 성립된 학문으로, 감성과 예술작품, 그리고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미학이 이처럼 뒤늦게 학문으로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감성이 근대 이전에는 진지한 학문의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감성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진리 추구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주장하는 선종의 감성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들 역시 애당초 선(禪)과 어울리지 않는, 아니 그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미학은 18세기 성립된 학문
격외도리 주장 선과 안맞아

현대사회 선 미학화 본질은
동아시아의 미적인 감수성

선 중국화는 선 내부 아닌
당송시대 문제의식이 토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문화를 박제품 취급

우리 삶의 현실은 서양현대
동아시아 복귀 방법이 없어

동양과 서양 횡단 없다면
선종미학 뜬구름 잡게 돼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종미학”이란 새로운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모더니즘 이후 건축, 디자인, 패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유행하고 있는 “젠 스타일(Zen style)”은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일본식 취미(Japonism)의 혼종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선적인 감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미스 반 데르 로우가 말한 “Less is More”이라는 모더니즘 정신과 상응하는 단순하고 모던한 스타일로,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선은 하나의 미적 취향 또는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젠 스타일로 불리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현대 가구들.

선의 현대적 재현,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의 미학화’는 선의 고유한 미적 감수성이라기보다 불교,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공유되어 온 미적 감수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현대 건축에 영감을 준 기둥과 기둥으로 구성되는 간(間) 구조와 장식의 배제 등 일본건축의 특징으로 알려진 건축구조는 사실 일본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건축의 보편문법이었으며, 바우하우스의 혁신적 디자인이나 간결함이 돋보이는 애플사의 디지털 기기들에서 엿보이는 미적 감수성은 동아시아에서 공유되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일본식으로 이루어진 선의 재현이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선을 공통분모로 했던 동아시아 문화의 미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과 무관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양무제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총총히 소림굴을 향했던 보리달마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처럼 중국 지배층의 후원 속에서 성장했던 “제도권” 불교와 단절을 선언하고 그야말로 “출세간”의 수행을 지향했던 선이 어떻게 하여 하나의 미적 감수성 또는 취미를 형성하게 되었을까?

“서천6조 동토28조”라는 선의 공식적 계보는 선이 마치 중국사회와 어떤 접촉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내적 발전을 이루어온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이러한 인식은 “이심전심” “사자상승” 등 선 특유의 수사법에 의해 강화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선불교 연구의 탈역사화는 그것을 선수행의 독특한 특징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이제 학자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선사상의 정수와 선수행의 본질 규명뿐이며, 선의 고유한 미적 특징의 규명은 “선종미학”이라는 새로운 분과에 맡기면 그만이다.

어쩌면 초기 선불교는 이러한 연구가설에 적합할지 모르겠다. 보리달마와 양무제의 만남이나 소림굴의 면벽에 대한 뚜렷한 역사학적 근거를 찾기 어렵고, 그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혜가(慧可, 487~593)와 승찬(僧璨, ?~606)의 존재 역시 모호해서 그들의 실존 여부를 가릴 수 없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중국의 수많은 은사(隱士)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밖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 일본의 사찰정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내에 있는 암자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

그러나 4조 도신(道信, 580~651)과 5조 홍인(弘忍, 601~674)에 이르면 선은 중국 역사 속에 뚜렷하게 형태를 드러낸다. 당태종 정관 19년(645), 18년 만에 서역에서 돌아온 현장법사가 수도 장안에서 뭇 백성들의 환영을 받고 낙양성에서 태종을 알현하고 있을 무렵, 훗날 선종 4조로 추앙된 강남 출신 무명의 승려 도신이 주석하고 있던 강북 황매 쌍봉산은 사방각지에서 몰려든 눈 푸른 젊은이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도신 사후 30년이 못 되어 쌍봉산은 불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의 재전 제자 신수(神秀, ?~706)는 무측천(700)을 알현했으며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회(神會, 688~758)는 중앙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선종교단은 폐쇄적인 작은 종교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불교계와 사상계의 주류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른바 당송교체기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전국시대와 더불어 중국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전국시대가 다가올 천년을 위한 중국 사상의 지적 기초를 놓은 “축의 시대”라면, 당송교체기는 중국사회의 정치에서부터 사회제도, 경제와 물질문화, 과학과 기술, 예술적 표현과 종교 사상과 실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일어난 시기이다. 학자에 따라 이 시기를 당대부터 남송대까지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고 있으나 이 시기에 형성된 지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지형이 그 후 중국과 동아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아시아 전통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 시기는 선이 중국사회에 그 존재를 드러낸 시기와 일치한다. 흔히 선을 중국화된 불교라고 일컫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선의 중국화는 당송변혁기 중국사회의 변화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데, 다시 말해 선의 중국화는 중국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일어난 것이지 사회와 유리된 채 선종교단 내부에서 일어난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그 변화의 주체는 중국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주체인 지식인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출가하여 선승이 되었고 나머지는 세속에 머물렀던 사대부들이지만 그들 모두 당송변혁기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의 중국화는 이들 지식인들을 통해, 그들이 성장했고 대결해야 했던 중국문화와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이 상호작용을 통해 중국문화가 선으로 흘러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선 또한 중국문화 속으로 흘러들어가 중국문학과 예술에 새로운 미적 감수성을 형성했다.

짐작하겠지만, 뛰어난 선사들 개인의 사상과 수행에 초점을 맞추어 선의 역사를 기술하는 연구방법은 선의 변치 않는 본질을 전제한다. 그것이 불교적인 태도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서양 식민주의에 의해 창안된 “불교학”의 근대적 성격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단순명료한 선종미학과 닮아있다. 1926년 월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완성된 바우하우스 건물.

특히 서양근대의 관점이 어쩔 수 없이 개입되어 있는 ‘미학’을 선과 중국문화에 적용할 때 서양미학의 본보기를 단순하게 적용하거나 서양미학의 타자적 관점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한 사례가 빈번했다. 서양미학이 제시하거나 또는 서양미학의 타자적 관점을 적용하여 동아시아 문화를 해석한 가장 상투적이며 익히 들어왔던 논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서양에 대하여 직관적이며 초월적인 동양을 대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동양을 서양에 비해 더 열등한 것으로 재현하든 또는 더 우수한 것으로 재현하든 동양문화를 자생력을 상실한 박제품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서양 오리엔탈리즘 또는 그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오류를 피하면서 선종미학의 독자적인 성격과 그것이 중국미학과 예술에 끼친 영향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상이나 종교적 수행을 더 넓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동아시아 전통으로 복귀할 방법이 없다. 엄격히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동양전통이 아니라 서양현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동양 전통 언어를 구사하여 과거의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서양의 타자적 시선을 적용하는 것보다 더 허무맹랑한 것이 되기 쉽다. 동양과 서양의 횡단을 감행하는 도전이 없다면 선종미학 연구는 다시 또 과거의 뜬구름 잡는 미사여구만 반복하거나 특별한 몇몇 사람들의 호사취미에 머물고 말 것이다.

모든 문화는 특정한 사회 속에서 배양되고 개화한다. 선을 현실사회 속에 작용했던 하나의 종교 활동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당송변혁기라는 중국사회의 변혁기에 현실세계에서 좌절한 지식인들이 중국문명의 근거를 그들 내면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그 돌파구를 왜 선에서 찾았는지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과 중국문화, 그리고 다시 서양을 횡단하는 새로운 관점, 다시 말해 “문명을 통해 사상을 이해하고 다시 사상을 통해 문명을 이해”하는 통합적인 관점이 요청된다.

앞으로의 연재에서 개별 사상가나 예술가, 또는 선사들의 사상이나 미적 사유를 검토하는 대신 그들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미적 논의의 지향점을 그들의 시나 회화 또는 서예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푸코가 주장한 계보학적 방법을 적용하기엔 동아시아 미학에 대한 기초적 연구와 나의 지식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시대 속에서 이해하고 그들의 고민을 현재적으로 공유해보도록 해보겠다.

명법스님 myeongbeop@gmail.com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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