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8. 청담, 그리고 향곡과 자운

기자명 김택근

▲ 북한산 비봉에 함께 오른 청담, 향곡, 성철 스님. 도반이 많지 않았던 성철 스님은 청담, 향곡, 자운 스님과는 깊게 교유하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청담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이었다.”

 성철의 백일법문은 달리 말하면 중도법문이었다. 방대한 불경을 중도로 꿰어 쉽게 강설했다.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깨쳐야하는지 알 수 없었던 후학들에게는 귀한 지침이 되었고, 불자들에게는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바로 ‘백일법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이 법문을 통해 불자의 의식개혁을 일깨웠습니다.”(고우 스님)

백일법문은 제자 원택 스님의 표현대로 ‘일백 개의 해가 솟아있는 법문’이었다.

1971년 11월15일 조계종 총무원장 청담 스님이 돌연 입적했다. 청담은 도선사 경내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입적하기 나흘 전에는 이화여대에서 법문을 했고, 사흘 전에는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법당(현 보라매법당) 준공법회에 참석했다. 이틀 전에는 원주 1군사령부 법당 준공법회에서 설법했다. 일요일인 14일에도 신도들의 야외법회를 이끌며 설법했다. 실로 총무원장으로서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그렇더라도 청담의 입적은 누구도 예상조차 못했던 비보였다. 그날 밤 조계사에서 입적을 알리는 범종이 울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부대중이 크게 울었다.

성철은 해인사에서 도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한국불교는 청담이 더 있어야 했다. 정화불사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향곡과 만나 서울로 올라갔다. 향곡은 성철을 보자 대뜸 소리 질렀다.

“너 앞으로 레슬링 상대할 사람 없어 어쩔래?”

청담과 성철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붙잡고 힘자랑을 했다. 두 사람만 있으면 거의 난투극에 가깝게 뒹굴며 싸우는 게 흡사 레슬링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혹 성철이 서울에 올라가 신당동 신도 집에 머물 때면 청담이 찾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두 큰스님이 만났다하면 방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이 들썩거렸다. 집주인이 하도 궁금해서 어느 날 큰맘 먹고 방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두 스님이 웃통을 벗고 나뒹굴고 있었다. 고승의 풍모는 간 데 없고, 삭발한 학생 둘이 싸우는 것 같았다. 그걸 알고 있는 향곡이 레슬링 얘기를 꺼내 성철의 서운함을 달래줬다.

1964년 갈 곳이 없었던 성철이 도선사를 찾아가자 청담은 도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청담의 제자 현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성철 스님이 도선사에 오신 후부터 청담 스님의 방에선 두 분의 대화가 쩌렁쩌렁 울렸고, 간간이 박장대소가 도량을 휘몰아치곤 했지요. 이전까지 항상 참선으로 적요만 흐르던 스님의 방이었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나는 그 무렵 성철 스님에게 불만이 생겼어요. 은사이신 청담 스님이 훨씬 연상인데도 두 분은 ‘너, 나’ 하면서 서로 하대하는 거예요. 그 점이 이해가 안 갔지요.”

그리고 어느 날 현성은 청담 스님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스님이 큰형님뻘인데, 성철 스님은 예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청담은 그런 제자를 나무랐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보물이다. 그걸 내가 알지 못하면 누가 알겠느냐. 내가 열 살 많지만 불교는 성철이 열 배나 더 잘 안다. 그 따위 생각일랑 버리거라.”

청담은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대명사였다. 조계종단의 기틀을 마련했고 초대 중앙종회 의장, 종정, 장로원장, 총무원장 등 주요 소임을 차례로 맡았다. 청담은 평생 교단정화와 중생교화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현대불교의 거목이었다.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이었다.

“산중의 성철은 뜻이 깊다. 성철과 팔만대장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성철 스님을 택하겠다.”

‘청담 스님을 위시한 종단정화가 수행환경의 외연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면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은 정화를 통해 확립한 그릇에 수행이라는 내용을 채우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화에 발 벗고 나섰던 청담 스님과 끝까지 수행에만 몰입했던 성철 스님이 “부처님 법대로”를 기치로 삼았던 봉암사결사에서 서로 의기투합했던 도반임을 상기한다면 그 두 분은 각자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정화를 통해 설립된 해인총림에서 백일법문이 울려 퍼지지 않았다면 정화는 단지 사찰의 주인이 바뀌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서재영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오르네’)

성철에게 도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깊게 교유했다. 청담 외에도 자운과 향곡과 여러 일화를 남겼다.

향곡은 성철의 권유로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고, 봉암사에서 확철대오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성철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향곡은 성철의 질문에 꼼짝하지 못했고 그날부터 대분발심이 일어나 정진에 들어갔다. 그리고 21일 동안의 용맹정진 끝에 사중득활(死中得活), 즉 ‘죽은 자리에서 살아남’의 경계에 이르러 오도송을 지었다. 실로 도반의 참모습이었다. 당시 향곡은 경허-혜월-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받았다. 스승 운봉으로부터 1944년 8월 전법게를 받았다. 이름과 위상이 우뚝 솟았음에도 도반의 질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수행 정진했다. 깨달음의 경계를 알아보고 질문을 던진 성철과 이를 받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공부에 들어간 향곡,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둘 사이에는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었다. 오직 깨달음으로 가는 길 위에 함께 있을 뿐이었다.

1960, 1970년대의 불가에서는 ‘북전강 남향곡(北田岡 南香谷)’이란 말이 돌았다. 즉 ‘북쪽에는 전강 스님이, 남쪽에는 향곡 스님이 있다’ 했으니 향곡의 법력이 누리에 뻗침이었다. 당호 그대로 향기로운 골짜기를 이루었다. 나이가 같았지만 성철보다 먼저 입적했다. 1979년 1월 묘관음사에 머물다 원적에 들었다. 성철은 장의위원장을 맡고 추도사를 지었다.

‘슬프도다, 이 종문의 악한 도둑아. 하늘 위 하늘 아래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業緣)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의 말이 되든 서쪽 집의 소가 되든 애닯고도 애닯도다. 갑을병정무기경(甲乙丙丁戊己庚)’

이 얼마나 소탈하면서도 절절한 그리움인가. 성철은 향곡을 생각하며 고비 때마다 떠나간 도반을 찾았다.

“지금 향곡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고.”

자운은 가야산 해인사 바로 왼쪽에 있는 홍제암에 머물렀다. 성철과 자운은 해인사 큰절의 양대 거목이었다. 성철과 자운은 1940년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만났다. 그리고 50년이 넘는 세월을 도반으로 지냈다.

일찍이 봉암사 결사 시절에는 성철의 부탁을 받고 이 땅에 계율을 다시 세웠다. 당시에도 이미 ‘포살’ 같은 절집의 전통을 되살리고 장삼의 본을 만들어냈다. 치열하게 공부하면서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철은 이렇게 회고했다.

“봉암사 시절에는 모두 어렵던 시절이라 탁발도 쉽지 않았지. 그럼에도 제일 많이 탁발을 다녔던 분이 자운 스님이야.”

또 성철이 성전암에 있을 때의 일화도 전해진다. 하루는 자운이 걸망을 지고 성철을 찾아왔다. 그 안에는 원고뭉치가 들어있었다.

“운허 스님이 ‘금강경’을 번역한 원고라네. 노스님께서 특별히 교정을 부탁하시니 한번 읽어주시게.”
“내가 어찌 노스님 원고를 교정본단 말인가. 나는 못하겠으니 다시 싸 짊어지고 가소.”

자운은 할 수없이 원고뭉치를 걸망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운은 똑같은 걸망을 메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성철은 무심했다. 다시 거절했다.

또 몇 달이 지나 자운은 걸망을 지고 다시 성철을 찾아왔다.

“어른 체면을 봐 주시게.”

그렇다고 마음을 바꿀 성철이 아니었다. 그러자 자운이 불처럼 화를 냈다.

“내가 세 번을 올라와 부탁하고, 노스님이 세 번이나 교정한 글을 한 번도 못 봐주다니 이럴 수 있나.”

자운이 화를 내자 성철도 난감했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스님 말처럼 그 사이에 운허 스님께서 세 번이나 교정보신 것을 내가 손 댈 것이 뭐 있소. 내가 손대는 것 자체가 노스님께 불경 아닙니까.”

그러자 자운이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저 고집을 언제 꺾어 보려나.”

자운은 이렇듯 성품이 온화했다. 성철은 성전암에 머물던 1955년 해인사 주지로 추대되자 이를 뿌리치며 대뜸 자운을 추천했다. 그리고 자운은 또 “해인사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철 스님을 모셔와야 한다”며 문경 김용사에 머물던 성철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이끌었다.

성철도 자운의 청이라면 숙고를 거듭했다.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도 자운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기에 뿌리치지 못했다.

자운은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스님을 친견한 후 법제자가 되었다. 어질고 품이 넓어 “자운 스님 포대 속에 어른스님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교와 선을 익히고 율에 정통했다. 1992년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으니 세수 82세였다. 청정계율을 지킨 한국불교 계맥(戒脈)의 중흥조였다. 이름 그대로 ‘자애로운 구름(慈雲)’으로 수좌들을 품었으니 계를 받은 수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성철은 종정으로서 도반을 추모했다.

‘(전략) 계행은 달과 같고 자비는 꽃과 같아 삼공이 줄지어 빛남이로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닦으심이여, 맑고 맑고 깨끗하고 깨끗하도다. 만법을 거두시고 선정에 드심이여, 사바와 극락이 두 가지가 아니로다. 허허! 만리길이 황금의 나라요 천층의 백옥누각이로다. 온통 천지가 노래소리 춤이요 전 세계가 풍류일 뿐이로다.’

자운의 다비식이 끝나고 사리친견법회가 있었다. 법회가 진행되는 동안 제자가 사리를 모셔오자 성철은 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것이 자운인가, 사리가 이리 나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성철은 평소 재를 뒤적이는 사람들은 크게 나무랐지만 자운만은 예외였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