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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1 일상관(日想觀)

서쪽에 떨어지는 해를 바라볼 때 눈 감고도 분명해지면 바른 관찰

“그때 위제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지금 저와 같은 경우는 부처님의 힘 덕분으로 저 국토를 봅니다만, 만약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모든 중생들은 (시대는) 탁하고 (사람들은) 악하고 선하지 않아서 다섯 가지 고통에 핍박받을 터인데, 어떻게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대상에 생각을 붙들어 매어
마음을 굳게 지니려는 명상
부처님은 일상관 설하시며
극락세계 떠올리도록 유도

고마운 일입니다. 위제희는 스스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우리와 같은 말세의 중생들, 시대는 혼탁하고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보다는 나쁜 일을 하고서라도 자신만의 삶만을 생각하는 그런 상황을 염려해 주고 있습니다. 정토의 가르침은 이렇게 시대는 탁하고, 사람들은 악한 시대에 최적화된 가르침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시대에는 다섯 가지 고통이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다섯 가지 고통은 생, 노, 병, 사의 네 가지 고통에 사랑하면서도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을 더한 것입니다.

당나라 선도대사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까지가 서분(序分)입니다. 이 뒤로부터는 이 경전의 본론 부분인 정종분(正宗分)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질문은 서분에 집어넣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종분에 집어넣는 것은 다소 이상합니다. 다른 방식은 없을까 궁리해 봅니다만, 다른 대안도 마땅치 않은 것 같아서, 일단 선도대사의 과목(科目)나누기에 따르고자 합니다. 과목은 전체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가면서, 그 부분들이 전체와 관련해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는 경전 해석의 한 방식입니다.

위제희 부인의 질문에서 문제는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문에서 ‘아미타불극락세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볼 수도 있고,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와 같이 번역하시는 분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저는 후자로 옮겼습니다. 그 이유는, 뒤의 대답에서 제시되는 관찰의 대상이 극락세계라는 국토 하나만이 아니라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의 둘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은 정보(正報)이고, 극락세계는 그 정보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환경인 의보(依報)입니다. 16관 중에서, 전반의 13관 중에는 의보와 정보가 둘 다 설해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 위제희 부인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설하시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제희에게 고하셨다. 그대와 (내가 열반한 뒤에 살아갈) 중생들은 마땅히 마음을 오롯이 해서 하나의 대상(一處)에 생각을 매어서 서방을 생각하라. 어떻게 생각할까? 대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장애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마땅히 (극락세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선도대사의 과목 나누기에 따르면, 이 말씀부터 정종분입니다. ‘관경’의 본론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종분의 내용은 앞의 위제희 부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됩니다. 그 질문은 어떻게 해야 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를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그 중에 먼저, 첫 번째로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극락세계를 떠올리는 관찰법(=관법)이 제시됩니다. 이른바 일상관(日想觀)입니다. 일상관이라는 말은 구체적인 대상이 해(가 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관경’의 관찰이 곧 하나의 대상에 생각(=마음의 작용)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찰의 방법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극락은 지금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을 해보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하나의 대상을 매개로 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간접적인 방법이지만, 그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서쪽을 향해서 정좌(正坐)하고 해가 지는 것을 관찰하되, 마음을 굳건히 지니고 생각을 오롯이 해서 (다른 대상으로) 옮기지 말고, 해가 지려고 할 때 마치 (허공에) 걸린 북과 같음을 보아라. 그렇게 해를 보고서는 눈을 감았을 때나 눈을 떴을 때나 (그 해의 모습이) 분명해 지는 것이 일상(관)이니 첫 번째 관찰이라 이름 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며, 만약 다르게 관찰한다면 삿된 관찰이라 말한다.”

서쪽으로 해가 떨어집니다. 극락은 해가 지는 서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쪽으로 해가 떨어지는 것을 정좌를 하고서 바라보면서, 그 해가 허공에 걸린 북처럼 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서방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에 떠올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은 일종의 명상입니다. 마음을 굳게 지닌다거나, 생각을 오롯이 해서 (다른 대상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일종의 선정(禪定)수행입니다. 그러므로 ‘관경’의 ‘관’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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