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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국대 정각원장 혜원 스님

‘국내 비구니 박사 1호’ 길 없는 길 걸어 선학연구에 큰 획

▲ 내년이면 정년을 맞는 혜원 스님은 후학들에게 ‘대서원이 있는 삶’을 당부한다.

“나는 그렇게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이 없어요. 그러니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뭐가 궁금할까요.”

이렇게 시작된 인터뷰는 해가 기울도록 계속됐다. 드라마틱한 인생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은 우리의 역사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 하물며 ‘국내 비구니 박사 1호’라면 삶에 담긴 무게는 드라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일혜원(杲日慧謜) 스님이 한국선학연구사에 그은 한 획은 비구니 진홍 스님이 1986년 대만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비구니스님이 국내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성과로 오늘날 비구니박사 67명 탄생의 토대가 되었다.

1·4후퇴 피난 후 양친 별세
5살에 벽안 스님에게 출가

어린 상좌 딸같이 여긴 은사가
들려준 혜능·신수 스님 이야기
후일 ‘북종선 연구’의 씨앗 돼
선어록·선사 말씀과 한 평생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이 없다는 것도 빈말은 아니다. 적어도 스님의 기억 속에는 그렇다. 1952년, 혜원 스님은 6·25한국전쟁의 한복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함흥, 하지만 스님의 고향은 대구다. 함흥의 내로라하는 부호였던 속가 부친이 1·4후퇴 때 남쪽 행을 택한 것은 당연했다. 부인과 예닐곱 살에 불과했던 딸아이 손만 간신히 붙잡고 고향을 떠났다. 재산은 고사하고 자식도 다 챙기지 못한 채 도착한 남쪽 땅에서 혜원 스님은 태어났다. 부친에게 새 생명의 탄생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3년 후 모친이 세연을 접었다. 남쪽에서의 재기, 그리고 어린 두 딸을 위해 부친은 일에 매진했다. 탁월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부족함 없이 두 딸을 키웠다.

▲ 동진출가 인연은.
“집에 세 사는 보살님이 있었다. 신심 좋은 불자였는데 그 보살님 덕에 부친이 내 은사인 벽안 스님과 안면이 생겼다. 원래 북측 사람들이 종교적이지 못한 성향이 있는데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벽안 스님을 보고는 ‘수행자답다, 학자답다’며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저 스님에게 데려다 달라’고 보살님께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셨고 나와 언니는 벽안 스님에게 의탁하게 됐다. 언니는 11살, 나는 5살이었다. 그렇게 자매가 나란히 동진출가하게 됐다. 이런 이야기도 어른 스님들이 나누는 말씀을 오가며 들은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져서 그런지 양친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 은사인 벽안 스님이 키운 것이나 다를 바 없겠다.
“그렇다. 내게는 어머니와 같다. 워낙 어렸기 때문에 상좌라기보다는 딸 같이 보신 것 같다. ‘화초같이 키웠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내가 자란 견성사는 대구시내에 자리하고 있어 형편도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일반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삭발득도 후에도 강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당시 강원들의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유별난 은사스님의 상좌 사랑 덕에 ‘견성사 가면 귀한 애가 있다’는 소리도 들었고, 오가는 스님들에게 더 이쁨을 받기도 했다.”

▲ 은사스님은 어떤 분이셨나.
“무척 뛰어나셨다. 특히 다른 스님들과 함께 경학을 공부할 때면 늘 남들보다 앞선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타고난 체질이 병약해 공부를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탄옹 스님과 혜봉 스님(1874~1956)에게 경을 배우셨다. 특히 상주 남장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는 혜봉 스님이 총명함을 칭찬하셨다고 한다. 비구니대강백 수옥 스님(1902~1966)도 ‘내 뒤를 이을 만하다’고 말씀하셨다. 수옥 스님이 일본 유학을 권하기도 했는데 아마 건강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 같다. 딱 한 번 ‘나도 유학 갈 기회가 있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1995년 은사스님 입적 다음해에 교수에 임용됐는데 마지막까지도 내 걱정을 하셨다.”

비록 양친과의 인연은 짧았지만 은사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학교 공부는 고사하고 출가한 사미니를 강원에 보내는 것조차 꺼리던 시절이다. 혜원 스님에게 대학진학의 기회가 주어진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하지만 그 복의 씨앗을 부지런히 가꾸고 성장시켰기에 복전이 되고 비구니박사 탄생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 동국대에 진학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이래저래 진학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강원, 선방, 대학 중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주변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 체계적인 불교학 공부를 권했다. 은사스님 도반의 상좌신데 그분은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과를 다니셨고 그런 분의 권유니 그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은사스님은 서울행을 반대했다. 그 먼 곳에,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학문보다 ‘유학생스님’의 권유에 단순히 따른 것이다(그는 나중 환속했다.) 은사를 설득하고 도반과 함께 은사 도반이신 광우 스님을 비롯해다른 스님들이 계시는 암자에서 학교를 다니며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 대학공부도 흔치 않은 시절, 더구나 박사과정은 전에 없던 일이 아닌가.
“당연히 이견이 있었다. 세속 공부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비구니스님들도 제대로 교육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눠져 있었다. 그런데도 은사께서 선학 전공을 의미 있게 평가해주셨고 교수님들도 많이 도와주셨으니 학운이 좋았다고 할밖에. 누가 봐도 비단길을 걸어왔으니 토를 달 바는 아니지만 도솔천 내원궁에 있어도 본인이 못 느끼면 도솔천이 아니 듯이 말이다. 돌아보면 나는 늘 내 공부에 바쁘기만 했다. 여행도 못 다니고, 도반과의 교류도 그리 많지 않았다.”

▲ 명성여고 교사로도 재직했던 이유는.
“사범대학 김병옥 학장이 잠시 명성여고교장에 취임하며 졸업 후 교사임용고시를 제안했다. 교육학을 부전공 한 내게 평소에도 친절하게 지도해 주셨던 분이었다. 그 전까지는 임용고시를 거치지 않고도 교법사로도 재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즈음 임용규정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임용고시를 본 후 윤리교사 겸 교법사가 됐다. 그때 같이 교단에 섰던 교사들과 지금도 교류를 한다. 명성여고에 법당을 만들었고 명성여중에 ‘우샤스 합창단’이라는 불교스카우트도 만들었다. 청소년 교화활동의 중요성을 느낀 시기였다.”

▲ 일본유학 계기는.
“동국대와 코마자와대학은 업무협약이 체결돼 있어 교환학생으로 일본유학을 갈 수 있었다. 코마자와대학은 조동종 계열의 종립대학이다. 특히 그곳 도서관은 희귀고문서뿐만 아니라 돈황에서 발굴된 선문헌이 소장돼 있다. 당시 일본불교학계를 잘 아는 김지견 박사가 선학 관계 학술서적을 사 주시며 선학을 권유한 것이 유학의 계기가 되었다. 1983년 코마자와대학에 가보니 명망이 높은 대학자들이 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학술발표 저술 등 선학의 토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 박사학위논문은 사실상 그들의 연구를 정리한 것밖에는 안 된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 중국선종, 그중에도 북종선을 전공했다. 남종선 연구가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데 북종선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의 지도교수였던 타나카 로쇼(田中良昭) 교수는 돈황문서를 정리하고 연구한 유명한 분이다. 특히 돈황문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북종의 선사상을 다시 보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유학했고 타나카 교수의 지도로 북종선을 연구한 것이다. 더 오래된 이유도 있다. 1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학교를 다니면서 방학중에는 은사로부터 초심, 치문 등을 배우는데 어느 날, 은사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던중 스님은 옛날이야기처럼 혜능 스님과 신수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두 분이 홍인 스님 문하에서 공부할 때의 장면은 무척 재미있게 들어서 기억에 남았다. 은사는 말씀을 참 잘하시는 편이다. 신문에 연재한 대하소설의 이야기는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한 계기도 되었다. 대학에 입학해 ‘육조단경’을 보았는데 은사스님께 들은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역시 단경에서의 대통 신수(大通神秀)선사는 무참하리만큼 평가절하 돼 있었다. 의문이 들었다. 홍인 스님의 상수제자였고 박학다식했던 신수 스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섰다는 말인가. 그리고 홍인 스님은 어떤 이유로 혜능 스님을 선택하고 신수 스님을 버렸을까, 등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10대 때 은사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북종선 연구의 계기가 된 셈이다.”

혜원 스님의 북종선 연구는 국내학계에도 조금씩 변화를 불러왔다. 남종선 일색이던 학계의 시각이 북종선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종선과 쌍벽을 이루며 중국 선종사의 흐름을 이어갔던 북종선에 대해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혜원 스님의 연구는 선종사 연구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혜원 스님은 자신의 연구가 “은사스님과 김지견 박사, 타나카 교수와 같이 좋은 학자를 만난 덕”이라고 공을 돌리며 “미흡한 부분이 많지만 부족한 부분은 후학들이 더 연구하고 채워줄 것이라 생각 한다”는 말로 보람을 대신한다.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첫 발을 딛고 그 뒤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 어느 순간 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기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에게 길이란 없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믿고 걸음을 옮겨야 한다. ‘국내 비구니 박사 1호’라는 타이틀은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했던 묵묵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이뤄진 거탑이다.

선연 은혜 보답하듯 한 길 매진
‘국내 비구니 박사 1호’ 결실

“일본 비구니 사회 역량 높여
비구니 차별 개선 이끌어 내”
비구니회 운영위원장 맡으며
비구니 결집 구심 모색 화두

혜원 스님이 걸어간 길은 북종선 연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 위상에 대한 관심은 스님의 평생 화두와도 같다. 특히 제6대 전국비구니회 집행부에서 기획실장 소임을 맡았을 때는 심포지엄을 통해 비구니 팔경계법에 대한 재해석과 종헌종법상의 비구니 차별 문제를 거론하는 등 비구니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지난해 논문을 통해 한일 비구니의 위상을 비교한 바 있다.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근대기를 살피며 일본과 비교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시대(1868~1944) 비구·비구니 차별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후 일본 비구니들은 3회에 걸쳐 전국비구니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 1950년대 비구와 비구니의 평등이 이뤄졌다. 우리의 제도에 비교해보자면 교구본사 주지를 비구니가 할 수 있게 되거나 비구와 비구니에게 같은 법계가 부여되는 식이다.”

▲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사례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이런 성과는 운동으로만 이뤄낸 것은 아니다. 일본 비구니계는 제도 개선보다 우선 대중저변확대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들의 복지활동이 큰 역할을 해냈다. 보육원, 고아원, 양로원 등 복지시설 설립과 운영을 비구니계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비구니에 대한 사회 평가가 높아지게 됐다. 사회가 비구니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가 되니 비구스님들도 비구니 차별 규정 개선에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일본의 비구·비구니 평등은 제도 개선에 앞서 사회적 역할의 평등에 따른 부수적 결과였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일본의 사례는 혜원 스님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전국비구니회 서울지회장에 이어 운영위원장에 추대된 스님은 전국비구니회의 역할도 이 지점에서 찾고자 한다. 서울지회장에 추대된 직후 “비구니스님들의 사회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동감하는 모습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 최근 전국비구니회 서울지회장과 운영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전국비구니회에 거는 바람이 있다면.
“비구니스님들이 힘을 모아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 또한 각자 능력껏 역할을 해 왔다. 다만 그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모를 뿐이다. 지금까지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곳곳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활동이 개별적으로 이뤄지다보니 규모도 작고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힘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수녀’에 대한 이미지는 봉사와 연결되는데 ‘스님’은 사회와 멀어진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 활동 외에도 그 역량이 사회로 향해야 한다. 힘들고 곤경에 처한 이의 손을 가장 먼저 잡아주는 이는 종교인이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비구니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전국비구니회가 선도해야 한다.”

▲ 학계에도 비구·비구니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나.
“학계는 학문적 성과가 기준이라 차별적 요소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하지만 선학과에 비구니교수가 더 임용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 문제로 들어오면, 아마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제도적 문제 이전에 정서적 문제다. 학문성과에 있어서도 비구니스님들의 실력이 뒤지지 않는다. 다만 더 우수한 논문을 쓰고 더 좋은 강의를 해서 어느 비구스님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갖춘 비구니학자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비구니스님들이 좀 더 관심 가져야할 학문분야가 있나.
“비구니스님들의 섬세한 성향은 번역 등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불교학연구도 마찬가지다. 특히 역경과 문헌해석은 학문의 기초가 된다. 비구니스님들이 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역경은 전법과도 연관돼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 박사스님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출가자가 수행보다는 공부 그 자체에만 매달린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석·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스님들에게 꼭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왜 학위를 취득하려 하는가다. 흥미로운 점은 상당수가 전법 활동에서의 어려움을 꼽는다. 전법, 포교의 대상인 사회인들의 학문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스님에 대한 기대치도 이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아상과 인상을 버려야하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세련된 상’이라는 웃지 못할 소리도 있다. 목사, 신부들은 상당수가 대학원 다니고, 외국 유학가고, 매일 책을 읽으며 ‘유투브’를 활용해서 세련되게 설법하고 선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님들도 외국어 잘해야 하고 유학도 가야 한다는 말이 교단 안에서도 나온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의 현상만은 아니다. 신라시대 이래로 많은 스님들이 외국유학을 다녀왔다. 조선시대 스님들이 고관대작들과 교류하며 전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학문적 수준이 밑바탕됐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도 스님들은 학문에 힘썼고 그것을 토대로 전법을 펼쳤다. 그 형태가 석·박사이고 해외유학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대의 요구에 맞춰야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 1995년 입적한 은사 벽안(우) 스님은 혜원 스님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1970년 동국대와 인연을 맺은 후 1988년 박사학위 취득, 1996년 선학과 교수임용으로 이어지며 4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동국대와 함께 보냈다. 비구니 최초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에 임명됐고 불교대학장, 불교대학원장도 역임했다. 올해에는 동국대 정각원장의 중임을 맡았다. 그러는 사이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내년 8월이면 정년퇴임이다. 그래서일까. 후학을 언급하는 스님에게서는 유독 기대가 짙게 묻어나온다.

▲ 요즘 불교대학의 분위기는 예전에 비해 어떤가.
“학인시절 불교대학 교수들은 모두 재가자였다.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에는 재가와 출가의 경계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교수는 지식전달자로 여겨지는 것 같다. 교수라고 해서 그냥 존경받는 법은 없다. 학문적 업적도 있어야 하고 강의도 잘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모든 정보가 노출되는 세상이니 학생들이 교수를 저울질하는 현상도 피할 수 없다. 또 복수전공이 가능해져서 불교대학생들도 타과 복수전공이 많다. 하지만 타과학생이 불교대학에서 복수전공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런 분위기라면 졸업 후 불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게 될지 우려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 동국대의 위상과 불교대학의 활성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불교대학 수준을 높이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불교학과 학생이 타과 수업을 들으며 교수의 영어 질문에 영어로 대답하니 다른 학생들이 ‘제 불교학과 맞아?’하면서 수군거리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교학과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다. 수능, 정시, 수시 이런 것들이 대학 진학의 잣대가 되고 실력의 상하가 딱 드러난다. 그 기준에서 불교대학은 저 아래 위치하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교공부를 위해 불교학과에 진학한 우수한 학생들도 있지만 보편적 인식은 ‘수준이 낮다’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교 내의 동아리활동이나 행사 등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스님들을 대하는 인식도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불교대학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외국어라도 잘할 수 있게 우선 유학의 기회를 주거나 취업할 수 있도록 종단이나 교계에서 우선 채용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불교대학생, 불교대 졸업생이라는 점이 경쟁력이 될 수 있도록 종단의 관심이 필요하다.”

▲ 동국대에는 출가제자도 있고, 재가제자도 있다. 승가대학의 다른 교수스님들과는 다른 역할이 필요하지 않나.
“승가대학 교수스님들은 24시간을 학인들과 같이 생활한다. 그야말로 그림자까지 보여주는 생활이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연구에 매진할 시간은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수업 마치고 퇴근하는 교수들도 다음 강의 준비 때문에 잠 잘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있지만 자고 싶으면 잔다. 승가대학 교수스님들은 그야말로 24시간 모범생이 돼야 하니 많이 힘들 것이다. 물론 일반 불교대학엔 대학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정보사회가 된 덕에 학생들도 스님교수의 강의내용을 바깥의 정보와 비교한다. 학인스님들에게는 출가자의 생각과 입장, 재가학생에게는 재가자의 생각과 입장이 있으니 이 둘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나는 수업 중 토론을 많이 한다. 출가자의 생각, 재가자의 생각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며 견해도 서로 비교하게 하기 위해서다. 가급적 다양한 용어, 관점, 변화를 반영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유행어 등 트렌드에도 민감해야 한다.”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온 생각과 일상을 집중해야 하는 것은 교학자의 숙명이다. 꽃길일 수도 있고, 비단길일지도 모르지만 외로운 길이 아닐 수 없다. 학자이자 수행자로서 두 개의 소임을 짊어지고 걸어온 길을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할까.

▲ 평생 학문의 길을 걸었다. 혹 수행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선학을 공부하며 이걸 다 놓고 선방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선학의 대상은 선사어록이고 전등사이다. 선사들의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다. 선사어록을 탐구하다 보면 공안, 선문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연구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선학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몇 해 전부터는 예불 후 단 30분이라도 좌선을 한다. 선어록 등을 공부하면서 참선을 병행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선사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 지난해 발표한 ‘근대 한국비구니 선수행 양상과 인가에 관한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출가 후 곧바로 선 수행을 시작한 후 교학을 익히도록 하는 교육제도를 제안했다. 교학자로서 이례적인 제안으로 보인다.
“지금의 교육 방식은 교를 공부한 후 선을 수행하도록 돼 있다. 보편적인 교육의 방식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근대 비구니 스님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다른 방식을 제안하게 됐다. 만공 스님, 향곡 스님 등으로부터 인가 받은 근대 비구니 수좌스님들 중 교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수좌스님도 있었다. 인가를 해준 큰스님들은 다들 교학을 익히 분들이다. 이런 스님들로부터 선문답을 통해 인가를 받았다. 교학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깨침을 얻을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육조 혜능 스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노행자가 ‘금강경’을 듣고 노스님에게 찾아가 문답을 하며 바로 인가를 받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난세가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의문, 삶에 대한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세상이었다. 아마 근대의 비구니스님들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차곡차곡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인 강원도 없는 상태였으니 생에 대한 의문은 산만하게 쌓여있었을 것이다. 이를 직관한 큰스님들이 ‘다 내려놓고 앉아라’ 했을 것이고, 스님들 또한 가득한 의문을 놓고 앉았다. 그 근간에는 순수성이 있었다. 커다란 의심이 노여움같이 불타올랐을 때 그것을 화두로 한꺼번에 불살랐기에 확 트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깨치는 이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학을 한 후에 그 글을 모두 내려놓고 들어갈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행자기간을 마치고 곧바로 2년 정도 참선참구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경학을 해도 늦지 않다. 이러한 시도를 해보면 마음이 밝아져 경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제안한 것이다. 초발심 때에 갖고 있는 처음 발 딛는 선문에서 의정을 바로 풀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후 경학은 자신의 수증(修證)이 될 것이라고 본다.”

▲ 교학자의 길을 걸어서 가장 좋은 점,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선학을 선택함으로써 옛 선사들의 말씀을 평생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고승대덕을 말씀을 듣고 수행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선학을 통해 선사의 말씀을 평생 가까이 두고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교학을 한 가장 큰 기쁨이다.”

▲ 반대로 힘든 점, 아쉬움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원전이 난해한 한문이다 보니 한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다는 점을 계속 느낀다. 고어가 많고 문화적 배경, 속어 등 당시의 사회상을 잘 안다면 좀 더 좋은 번역으로 선사들의 사상과 지도방식 등을 알고 뒷사람들에게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그 점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영어권의 번역을 보면 단어의 뜻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후학들이 ‘영어번역을 보니 더 쉽더라’ 하는 소릴 들으면 ‘내가 뭘 했나’ 싶어 아쉬움이 크다.”

정년을 앞둔 학자의 소회는 점점 더 커지는 책임감이다. “정답을 찾아 제시하는 것 못지않게 부족한 부분을 후학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학자의 역할”이라는 여러 스승들의 한 말씀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가볍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맺어온 숱한 선연(善緣)들의 공덕 때문이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베풂이 있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삼라만상이 나를 위해 보시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완성됐다. 어쩌면 나 또한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보시했을 것이다. 보시하고, 보시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대승적 삶의 자세라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출가자의 삶에는 대서원이 있어야 한다. 서원이 명확하고 자신의 발원을 늘 점검한다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방편의 하나로 선사들의 어록을 머리맡에 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게을러졌을 때 다잡아주는 좋은 경책이 될 것이다. 또한 아는 것에 머무는 불교가 아닌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공부를 하면 좋겠다. 재가제자라면 부모들이 보기에도 ‘아이가 불교를 공부하더니 달라졌다’고 느낄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 후학들에게 어떤 교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사실 요즘 후학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강의 후 학인들에게 강의가 어땠는지 자주 묻는다. 혹시라도 어려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학인시절 강의가 어려워 힘들었던 기억이 종종 있다. ‘그 교수님은 강의를 쉽게 해서 그 덕분에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선학이 즐거웠다’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 앞으로의 계획은.
“정년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다. 정신이 맑을 때 지금까지 진행했던 연구들을 정리하고 전법에 힘쓰고 싶다. 특히 비구니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활동을 조직적으로 펼치는 데에도 힘을 보태고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식상한 유행어지만 혜원 스님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말이다. 정년이 코앞이라는 말을 하며 스스로도 멋쩍어하는 스님에게서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보시를 받았다”는 스님은 이제 그 삼라만상의 복전이 되는 길을 찾는다. 불연을 맺어준 부친, 어머니 같은 은혜를 베풀어준 은사스님, 학문의 길을 이끌어준 수많은 스승들. 이 모든 인연들의 시은을 한 푼 헛되게 쓰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기에 아직 남은 학문과 전법의 길도 버겁지 않다. ‘제석은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천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는 ‘아함경’의 가르침처럼 인터뷰를 끝내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는 스님의 시간 속에는 방일하지 않았기에 닦을 수 있었던 새로운 길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한 순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부지런함의 표상

내가 본 혜원 스님

정운 스님 보령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 같은 문중도 아니고 학연도 없지만 20대부터 교우하며 지켜본 혜원 스님은 그야말로 ‘외유내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려 보이지만 속이 묵직하다. 무슨 일을 맡기든 학문을 연구하듯 묵묵히 이끌어 가고 필요할 때는 맺고 끊을 줄도 안다. 그 바쁜 틈에도 다방면에 관심과 소양이 많아 함께 있어도 지루한 법이 없다. 학문하는 이들이 고루하고 외골수인 경우도 왕왕 있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한 달여간 서울에 머물 일이 있어 가까이서 보니 잠은 하루에 3~4시간이 고작이었다. 순박하고 순수한 면도 있다. 사물과 상대를 왜곡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심성이 있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 한 눈 한번 팔지않고 출가자의 길과 학자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일광화 소림사신도회장=37살에 처음 만났으니 벌써 35년 세월이 지났다. 마음이 복잡하던 차에 가까운 지인의 소개로 처음 찾아간 사찰에서였다.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말씀이 마음에 딱 와 닿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스님은 지금껏 그 당연한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게 살았다. 그 한결같은 모습이 있기에 세납은 적지만 지금껏 멘토라 여기고 있다.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일 없이 부지런하다. 어떨 때는 철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잠을 많이 자는 법도 없고 먹을 것을 일부러 챙기는 모습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 건강을 잘 챙기셨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자 바람이다.

박인성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혜원 스님은 고집과 자부심 있는 학자다. 특히 간화선의 수승함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널리 알리고자하는 의지를 자주 엿볼 수 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선학은 필수고 그런 점에서 혜원 스님이 연구한 북종선은 선학을 이해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스님의 연구 성과가 후학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출·재가를 떠나 동료 교수들과도 스스럼없이 교우하지만 불필요한 만남을 절제하며 시간을 소모하지 않는다. 특히 원칙과 정의를 지키는 모습이 가장 좋다. 반듯하다, 청렴하다, 정의롭다는 말이 스님과 가장 잘 어울린다.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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