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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4 보수관(寶樹觀)

현실이 가상임을 알 수 있다면 가상 역시 현실임을 알게 될 것

지금까지 우리는 해, 물, 땅을 매개로  극락세계를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한 상상을 곧 관찰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네 번째 매개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들이 다 보배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보수관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지상관 이뤄지고 난 뒤에는
일곱 가지 보배의 나무 관찰
범왕 궁전 같은 아름다움에
백억 태양·달빛 뿜어져 나와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지상관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그 다음으로 보배나무를 관찰하여야 한다. 보배나무를 관찰한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하나 관찰하되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의 나무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가지 보배’에 대해 선도대사의 ‘관경소’에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황금은 뿌리, 자금(紫金)은 줄기, 백은은 가지, 마노는 곁가지, 산호는 잎, 백옥은 꽃, 진주는 열매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나무들은 “하나하나의 키가 팔천 유순(由旬)이며, 모든 보배나무는 일곱 가지 보배로 된 꽃과 잎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순(yojana)은 옛날 인도의 거리 단위입니다만, 약 7마일(11.3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나무 하나의 높이로서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또 그 “하나하나의 잎과 꽃은 기이한 보배로부터 나오는 색깔(의 빛)을 낸다. 유리의 색에서는 금색의 빛이 나고, 파리(頗梨)의 색에서는 홍색의 빛이 나며, 마노의 색에서는 자거(磁磲)의 빛이 나고, 자거의 색 중에서는 녹색의 진주 빛이 나며, 산호 호박 등 모든 갖가지 보배로써 장식되어 있다.” 나무 자체가 온통 다 보배로 이루어져 있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배들로부터 기이한 빛까지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는 공연 같은 것을 할 때 보면, 갖가지 조명을 비추는 것과 유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빛을 보배나무가 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나무들 위로는 “기묘한 진주 그물이 나무 위를 덮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나무 위에는 또한 일곱 겹의 그물이 덮고 있다. 하나하나의 그물 사이에 오백 억이나 되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는 것이 마치, 범왕(梵王)의 궁전과 같다.” 범왕은 범천왕(梵天王)이라고도 합니다만, 색계(色界)의 첫 번째 하늘을 주재합니다. 나무 위에 덮여져 있는 그물과 그물 사이의 간격이 그만큼 넓다는 이야기겠지요.

그 궁전에는 “모든 하늘세계의 동자들이 본래부터 그 중에 있고, 하나하나의 동자들은 다 오백 억이나 되는 석가비릉가마니보배를 영락으로 삼고 있다.” 여기 나오는 ‘석가비릉가마니(s´akra-bhilagna-man.  i-ratn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를 소리로만 베낀 것입니다만, 그 뜻을 옮기자면 ‘능히 갖가지로 나타나는 여의주(如意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그 보배를 온 몸에 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배에서는 또 빛이 나오겠지요. “그 보배에서 나오는 빛이 백 유순을 비추고 있는데 마치 백억이나 되는 해와 달이 서로 화합하는 것과 같으니, 가히 (그 아름다움은) 다 말할 수도 없고, 모든 보배들 서로 어우러져서 최고의 빛을 (만들어 낸다).”

현실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가상세계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나 구현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런 가상현실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가상’과 ‘현실’이 합쳐져서 생긴 말입니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가상은 단순히 가상에서 끝나지 않고 곧 현실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 곧 색(空卽是色)”이라는 것이 이 소식입니다. 물론 그런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이 가상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색이 곧 공(色卽是空)”이라는 단계가 먼저 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 가상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지금 보배나무들이 이루어지는 가상 역시 현실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관경’과 같은 정토경전은 ‘반야심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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