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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기자명 김택근

▲ 성철 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된 직후 찍은 사진.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일컬음이었고, 그 안에는 중도사상의 진수가 들어있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철의 글이 생애 처음으로 신문(‘불교신문’ 12월 21일자 창간호, 12월 28일자 제2호)에 실렸다. ‘한국불교의 전통과 전망’이란 제목의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이었다.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고 조계종 기획위원들이 백련암을 찾아가 면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위기의 한국 불교가 다시 살아날 길을 물었고, 이에 성철이 답한 것이었다. 10·27법난이 있은 지 거의 두 달 만이었다. 아마 종정이란 고깔을 쓰기로 하고 종단의 기획위원들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철은 종단 혁신의 요체는 승려자질 향상을 위한 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절집 지붕 기왓장을 팔아서라도 공부시켜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다시 피력했다. 승려가 중생을 교화하는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면 전문적인 불교지식과 수행력을 겸비해야 했다. 이에 승려가 되는 문턱을 높여 교육과 수도를 엄격히 시키자고 제안했다. 성철은 종단의 안이 허약하니 밖에서 불교를 하찮게 본다며 중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산중에서 또는 포교당에서 목탁이나 치고 앉아 잿밥 싸움이나 하는 식의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승가대학의 교육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철저한 신행 교육이 되도록 해야 한다. 철저한 신행교육이 없으면 속인이 되고 만다. 예를 들자면 일제강점기에 각 사찰에서 일본 유학을 200명 가량 시켰는데 졸업 후에는 모두 대처를 하고 말았다. 노스님들께서는 대학이 내 상좌 다 잡아먹었다고 대학이 원수다 하고 한탄하셨다 한다. 또 동국대 종비생교육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지식만 가르치고 중노릇(신행교육)을 철저히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승풍을 바로잡기 위해 성철은 지식보다 수행을 더 강조하고 있다. 또 승가대학 및 총림의 설립과 운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이와 별도로 한국불교의 은사제도를 개선하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글의 흐름에는 다소 동떨어졌음에도 이를 중간에 삽입하여 강조한 것은 파벌싸움으로 척박해진 종단의 현실을 직시했다고 보여진다. 

“은사제도- 문중 파벌 등 폐습과 세속적인 정(情)에 매달리는 등 병폐가 많기 때문에 은사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좋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상좌는 승가대학 졸업당시 전국적으로 은사될만한 스님의 명단을 작성하여 배정하는 식으로 한다.”

사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병폐는 승려들이 같은 문(門) 아래 똘똘 뭉쳐 세력화함이었다. 스승은 법 위에 있었다. 자신들의 스승은 높임을 받아야 하고, 그래야 자신들도 높아진다고 여겼다. 결국 다툼의 뿌리에 문중이 있었다. 성철은 그런 폐단을 고쳐보려 했다. 성철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큰절의 요직을 맡지 말라 이른 것도 이런 세력화를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철은 또 투명하고도 공정한 ‘중앙 통제’의 재정 집행을 주장했다. 국가의 수입을 국고로 관리하듯, 또 가톨릭의 경우 성당의 전 수입을 중앙에서 관리하듯 불교도 모든 수입을 중앙에서 투명하게 거두어 나누자고 촉구했다. 도대체 중이 왜 돈을 관리해서 자신의 사찰에 근심덩어리를 쌓아놓느냐는 일갈이었다. 

“돈 많은 절 주지 등 몇몇이 나누어 먹는 식으로 하면 불평불만이 생기고 서로 좋은 절의 주지를 하려는 암투가 없어지지 않는다. 공부하고 포교할 생각은 없고 주지 될 생각만 하게 된다. 결국 사찰재산과 수입의 개인적 분산 관리의 현 체제가 승려들의 비행, 부정, 암투의 원흉이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승려의 비행을 근본적으로 막고 사찰수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불교중흥을 이루도록 제도적 개혁을 해야 한다.”

성철은 그러면서 먼 앞날을 내다보고 사심 없이 일대혁신을 하자고 촉구했다. 적당히 현상유지나 한다면 결국 종단은 망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글을 맺었다. 그렇다면 그 후 문중 파벌싸움은 줄었는가? 재정의 중앙 통제는 투명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조계종단은 흥했는가, 망했는가? 10·27 법난을 지켜본 부처님들이, 산천초목들이 묻고 있다.     

조계종 종정 성철은 백련암에서 취임 법어만을 내려 보냈다. 그 법어는 단번에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구절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고, 쉬운 듯 어려웠다. ‘산은 산 물은 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어찌 보면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정권을 찬탈한 무리를 향해 던진 돌팔매처럼 보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말함과 동시에 당시 전두환 정권을 향해 ‘진실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 참회하고 반성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경준 동국대 교수)

또 시대정신을 잃어버린 세태를 꼬집는 은유이고, 근본을 잃어버린 사회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상식이 승리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필귀정의 희망이기도 했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일컬음이었고, 그 안에는 중도사상의 진수가 들어있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체(體)에서 볼 때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용(用)에서 볼 때는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전자는 정(定)을 말하며 쌍차(雙遮)를 가리킨 것이고 후자는 혜(慧)를 말하며 쌍조(雙照)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니 곧 한번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大死却活] 바로 비치는 것을 분명하고 밝게 보자는 말이었다. 눈을 뜨고 보면 자기가 천지개벽 전부터 이미 성불했으니 결국 자신의 본성을 보라는 것이었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진리의 혜안을 지닌 자만이 사물의 핵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마음을 깨쳐 세상을 바로 보면 만물이 관음이었다. 우리의 실상을 바로 보면 우리 사는 지상이 곧 극락이니 행복을 다른 데서 구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한국 불교계에는 경종이었고, 사바대중에게는 희망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백련암에 집중됐다. 장좌불와와 10년 동구불출 이야기가 퍼지고 성철의 행적이 신비롭게 포장되어 더러는 부풀려진 채 유통되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런 취재요청에 응할 성철이 아니었다. 그러자 성철을 만나지도 않은 채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사 사이에 일대 취재경쟁이 벌어졌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온갖 연을 동원했다. 성철을 친견한 인터뷰는 어느 특종 못지않게 시선을 끌었다.

기자들의 성화에 제자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저마다 말씀 한 마디만 듣겠다고 지극정성이었다. 무작정 기자들을 따돌리기도 미안했다. 원택과 원영은 한 가지 꾀를 냈다. 묘책은 아니지만 궁여지책으로는 그럴듯했다.

“법문집을 만들기 위해 정리해둔 원고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 주자.”

한 시간 분량의 법문 원고를 기자에게 내줬다. 그리고 그 원고는 주간지에 ‘성철 종정 최초 법문 공개’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됐다. 그러자 절집에 일대 회오리가 일었다. 전국 사찰에서 주지들의 항의 전화가 해인사로, 백련암으로 빗발쳤다. 요지는 성철의 법문이 승려들의 밥통을 깨버렸고 나아가 승려들의 위상을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종정이면 종정답게 승려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지 당신만 잘났다고 하면 어찌 되냐고 대들었다. 성철의 제자들도 욕을 먹어야 했다. 법문은 이렇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어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여러 가지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 깎고 가사와 장삼을 빌어 입고 승려의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와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쳐서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다 도적놈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부처님 가까이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까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 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 해야겠습니까. 그것은 절이 아니라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겠지요.”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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