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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8 상관(像觀)

여래가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고 청정한 마음이 다시 여래 만들어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7관에서 설한) 이러한 것들을 다 보고 나서는 그 다음에 부처님을 생각해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는 온 누리 중생들을 위한 몸인데, 두루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 가운데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제가 ‘온 누리 중생들을 위한 몸’이라고, 과감하게 옮겨본 말은 ‘법계신(法界身)’입니다. 법계는 모든 것들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계신을 중생들을 위하는 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극락 통해 부처님 생각하고
이후에 부처님 관찰하게 돼
마음 밖 이미 계신 부처님
중생들 마음속으로 들어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들이기에, 우리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 속에 이미 들어가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우리는 부처님이 사시는 국토에 대해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본어의 ‘사랑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말에서는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영희’라는 인격체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직역하면, “철수는 영희의 것을 사랑한다”라는 식입니다. ‘영희의 것’은 영희 자신, 영희라는 몸과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희가 사는 동네, 집, 그리고 영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관경’의 관상은 일본어 식입니다. 그래서 앞의 7관까지는 의보(依報)를 설했던 것입니다. 극락을 통해 극락에 계시는 부처님을 생각한 뒤, 정보(正報)인 부처님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곧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 큰 특성과 여든 개나 되는 소소한 특성을 다 갖춘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부처를 짓고, 그러한 마음이 부처이다.”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는 저 유명한 말씀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뜻일까요? 모든 중생은 본래 청정한 불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眞心)이야말로 바로 부처이고, 그러한 진심이야말로 바로 불국토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설입니다. 오직 청정한 마음 외에는 따로 극락이 존재하지 않고, 아미타불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유심정토설이 주류를 이루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려 중기 이후에 선불교나 화엄불교가 우리 불교의 중심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런 사상적인 맥락 속에서 유심정토 내지 일심정토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관경’을 비롯한 ‘정토삼부경’에서 설하는 정토나 아미타불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과연, 지금 ‘관경’의 이 문맥은 바로 그렇게 유심정토설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달리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문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에 나온, 온 누리 중생들을 위하는 몸(존재)이신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에 들어가셨다는 전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 마음, 그런 마음속으로 부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청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중생들의 마음 밖에 부처님이 먼저 계시고, 중생들의 마음 밖에 불국토가 먼저 있습니다. 그 부처님과 극락국토가 중생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청정하게 된 마음이 이제 다시 부처를 만들고, 바로 그 마음이 곧 부처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다와 같이 많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이 들어와 있는)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경’의 입장을 저는 정토일심(淨土一心)이라 표현해 봅니다. 밖에 있는 정토로부터 안의 일심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토신앙의 정토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의 정토관과는 다른 입장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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