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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와 금산사

기자명 이만희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공양주의 추억

<사진설명>금산사 전경.


정적을 깨고 내가 말했다.
“채공은 뭘 하는 거고 공양주는 뭘 하는 겁니까?”

원주스님께서 답했다.
“채공은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채소를 가꾸고 그 외 허드렛일을 다 해야 하고 공양주는 밥만 하면 되지요.”

내가 말했다.
“그럼 공양주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라. 공양주는 밥만 하면 되지만 채공 행자는 허드렛일을 다해야 한다는데 누가 그걸 하겠는가. 허나 막상 맡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채공행자는 8명이나 되었고 공양주는 나 혼자 뿐이었다.

1975년 가을이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 3학년이던 나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불가에 몸을 담기 위해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를 찾았으며 거기서 난 6개월 동안 공양주를 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돌 고른 쌀이 아니었기에 하루에 한 가마니나 되는 쌀을 조리질 해야 했고 덕분에 내 손목은 퉁퉁 부어야만 했다.

“원주스님. 손목이 퉁퉁 부어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내 말에 원주스님은 짧게 답했다.
“처음엔 다 그래요.”

힘든 건 조리질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마솥에 쌀을 앉히고 아궁이에 장작 두 단쯤을 넣고 석유를 뿌려 불을 붙인 다음 부뚜막 위에 올라가 물을 흠뻑 적신 행주로 솥뚜껑을 계속 닦아야 했다. 솥뚜껑에 행주질을 해야 하는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는 설고 밑은 타서 삼층밥이 된다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난 행주질을 계속 하면서 염불을 외워야 했다. 하루에 일정량의 염불을 외워야 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때가 아니면 딱히 외울 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연기가 꽉찬 공양간에서 아궁이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연신 행주질을 하면서 염불을 외우고 있는 까까머리를 상상해보라. 연옥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그 후 고된 행자생활을 마치고 난 월주(月珠)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계(戒)를 받았고 금산사에서 1년 6개월쯤 머물다가 환속하여 극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난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때마다 내 마음은 금산사로 간다.

대중 공양 때 돌이 나와 원주스님한테 꾸중 듣던 일, 가마솥 청소를 안했다가 삼 천배를 했던 일 등 대부분 혼난 기억뿐이지만 지금의 나에겐 향내로만 남아있다.

인생이란 추억을 파먹고 사는 거라 했던가. 금산사에 묻어둔 젊은 시절의 한때가 지금도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이만희/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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