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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불사·포교·전법의 사표…“진관 스님은 보현보살의 화신”

  • 교계
  • 입력 2016.07.03 14:37
  • 수정 2016.07.0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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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7월3일 입적한 진관사 회주 진관 스님은

▲ 진관사 회주 진관 스님.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위치하고 있는 진관사 회주 진관 스님은 폐허의 진관사를 오직 기도와 수행의 원력으로 복원, 서울 대표 전통사찰로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수천억 여래에게 봉사하며 중생이익의 원을 세운 보현보살과도 같은 삶을 통해 수많은 후학들에게 수행의 사표가 되었다.

1948년 한암 스님 친견 후 발심출가
견성암 등 제방선원 안거 수행정진

1962년 진관사 주지 소임 맡은 후
20여년 걸쳐 복원불사 가람 일신
1977년 ‘진관사국행수륙재’ 봉행
2013년 무형문화재 제126호 지정

평생 ‘보현행원품’ 수지 독송하며
청정·검소 근본 삼는 수행자 강조

진관 스님은 1928년 9월20일 경기도 평택시에서 아버지 수성 최씨 웅순 거사와 어머니 박태순 보살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은화였다. 신심 깊은 불자가정에서 자란 은화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수없이 도선사를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젖어들었다. 당시 여성교육의 전당으로 손꼽히던 이화여고에 진학한 은화는 재학 중에도 신행활동에 매진했다. 서울에는 만공, 만해, 용성, 남전, 도봉, 성원 스님 등이 주축이 돼 설립한 선학원이 한국불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0대의 은화는 이곳을 찾아 신심을 닦았다.

1945년 18살이 되던 해 선원학에서 강도봉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계했다. 이 법석에는 훗날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게 되는 인홍 스님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홍 스님과의 첫 만남은 눈인사로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것에 그쳤다. 다만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까닭인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 한복판 묵정동 다리 위에서 재회하게 된다.

“우리 보살을 여기서 다시 보는군요. 난 오대산에 있습니다. 우리 오대산엔 도인이 계시니 꼭 한 번 찾아오십시오.”

인홍 스님이 건넨 이 한마디는 일대사인연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감로수가 되었다. 이듬해인 1948년 불현듯 인홍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 인화는 ‘도인을 뵙겠다’는 일심으로 오대산으로 향했다. 그때 나이 스물 하나였다.
오대산 도인으로 존경받던 대선지식은 바로 한암 스님이었다.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데 마음 공부하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도 보고, 염불도 하고, 절도 해야겠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참선이다”
한암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길로 출가를 결심한 은화는 속세의 인연을 훌훌 털어버리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묵정동 다리 위에서 ‘오대산 도인’을 일러준 인홍 스님이 은사가 되어주었다. 인홍 스님은 자비롭고 엄격하게 법기를 다듬었다. 그해 9월20일 인홍 스님을 은사로,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진관(眞寬)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득도 후 수행과 교학에 더욱 매진한 진관 스님은 당시 성능 스님과 탄허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과 경학을 수학했다. 특히 탄허 스님은 진관 스님의 영특함을 꿰뚫어 보았다.
“진관 스님은 글을 잘 배우면 후일 일대 강사가 되겠구나”하며 곧잘 진관 스님의 영특함을 칭찬하곤 했다. 그러나 출가 후 한암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제자로써 참선을 잘 하면 팔만대장경을 안보아도 된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던 진관 스님의 마음속에는 참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런 간절함 덕분에 쌍계사 국사암을 비롯해 대성암, 견성암, 대원사, 승가사, 동학사 미타암 등에서 안거하며 수행 정진할 수 있었다. 특히 만공 스님으로부터 법인가를 받은 만성 스님은 수좌로서 진관 스님의 그릇을 알아보고 특별히 아끼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과 어려움도 수행정진을 향한 일념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평생 수좌의 길을 가려니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인연이 진관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1962년 3월 진관 스님은 조계종총무원장이던 서운 스님의 권유로 진관사에 첫 발을 디뎠다. “진관사는 진관 스님이 살아야만 중창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진관사 중창불사를 당부한 것이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1011(고려 현종2)년 창건한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왕실 사찰로 왕들이 자주 왕래하며 크게 융성했고 숭유억불의 개국이념을 천명했던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수륙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그 위상을 공고히 했다. 이후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라 칭할 만큼 한양 근교의 4대 사찰로 서쪽을 대표하는 사찰로 천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사찰 소각령이 내려지면서 천년고찰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전란의 화마를 피해 남은 전각이라고는 나한전, 칠성각, 산신전 뿐 10여년을 폐허나 다를 바 없이 방치된 채 천년의 역사마저 잊힌 듯 했다.

출가 후 줄곧 제방선원에서 정진만 했던 진관 스님의 수중에는 석남사 신도였던 장봉욱 보살이 기도를 부탁하며 건넨 쌀 한가마니와 기도금 3000원이 전부였다. 스님은 그 돈으로 도량 한쪽에 천막을 치고 신중기도를 봉행하는 것으로 주지 소임을 시작했다.

오직 기도와 정진으로 천년고찰 복원하겠다는 젊은 비구니 스님의 원력에 불보살님도 감응했음인지 진관사 부임 2년 뒤인 1965년 기적과도 같이 대웅전이 낙성되었다. 곧이어 큰스님들도 힘을 보태주었다. 진관사복원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며 석주 스님이 대책위원장을 맡아 필두에 나섰고 청담 스님, 탄허 스님, 춘성 스님, 자운 스님, 영암 스님, 서운 스님, 광덕 스님이 대책위원을 맡았다. 특히 청담 스님은 행정을 책임지는 주지의 역할에 대해 세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부대중의 성원에 힘입어 본격적인 복원불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까지 20여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 일주문, 나가원, 동정각, 홍제루, 서별원, 동별원, 나한전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1969년에는 진관사 경내에 무분별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각종 식당과 민가들이 철거되어 청정도량의 모습을 되찾았다. 1976년에는 진관사 진입로를 확장 포장, 수행환경까지 갖춰지며 북한산 자락에는 고려시대 왕실사원이었던 웅장한 진관사의 모습이 다시 우뚝 서게 되었다. 20여년에 걸친 진관사 복원불사는 폐허나 다를 바 없이 쇠락했던 도량을 천년고찰의 수행대가람으로 일신시킨 대작불사였다.

진관 스님은 복원불사의 와중에도 선방 수좌시절 인연이 되었던 노스님들을 진관사로 모셔 수행 뒷바라지를 했다. 복원불사가 한창 진행되는 시기 진관사에는 상시 15명 이상의 대중 스님들이 함께 수행하며 기도 정진했다. 도량의 외형을 복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관사의 변모에는 근대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큰스님들의 지지와 성원도 커다란 동력이 되어 주었다. 자운 스님, 춘성 스님, 고암 스님, 영암 스님, 청담 스님, 탄허 스님, 서운 스님, 석주 스님, 광덕 스님 등 제방의 큰스님들이 수시로 진관사를 찾아 장엄한 법석을 펼쳐 보임으로써 진관사 복원불사의 대원력에 뜻을 함께 해 주었다. 큰스님들의 발걸음은 진관사 복원 불사에 온힘을 기울인 진관 스님에 대한 또 다른 치하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7년 진관사에서는 또 하나 장엄한 역사가 부활했다. 수륙재 봉행이었다. 당시 자운 스님은 대장경을 열람하며 수륙재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자료가 원고지 두 상자에 달했다. 자운 스님은 “이 기록에 따라 여법한 수륙재 설행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진관 스님에게 수륙재 재연을 부탁했다. 자운 스님의 원력을 받들어 1977년 진관사에서는 칠일칠야 수륙재가 봉행됐다. 대장경의 기록에 따라 25단의 불단이 차려지고 각 단에는 새롭게 불화가 조성돼 모셔졌다. 모든 대중 스님들은 결계를 펼쳐 청정도량을 수호했다. 무엇 하나 소홀한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각종 공양물을 진설할 그릇까지 모두 새로 장만했다. 수륙재 봉행에 쏟은 진관 스님의 정성은 가히 부처님을 모시는 영산회상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수륙재는 진관사와도 땔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진관사는 조선시대부터 국가적 차원의 수륙재가 봉행되는 도량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1977년 진관사에서는 자운 스님을 법사로 물속과 땅위의 모든 중생들을 위로하고 해탈로 이끌기 위한 칠일칠야 수륙재가 봉행된 것이다.

자운 스님의 원력과 진관 스님의 노력으로 조선시대 국가적 차원에서 봉행되던 수륙재가 진관사에서 재연된 것은 안으로는 수륙재 봉행사찰 진관사의 역사와 위상의 복원이었으며 밖으로는 전통불교문화 부흥의 한 획이었다. 이후 수륙재는 몇 차례의 산보(刪補)를 거듭해 윤달이 깃든 해에 지속적으로 설행되며 매년 10월로 정례화 되었다. 그리고 2013년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제126호로 지정되며 또 하나의 불교무형문화재 탄생을 기록했다.

진관사에서는 ‘자비도량참법’ ‘아미타경’ 등 수 많은 경전들이 출판, 보급되었다. 이 역시 포교와 전법의 중요성을 인식한 진관 스님의 안목이었다. 특히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한다”는 원력 아래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군장병 등 당시까지도 교계의 여력이 두루 미치지 못했던 포교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과 관심으로 이어졌다.

진관사에는 1980년 어린이 법회에 이어 1985년 청소년 법회가 잇따라 창립됐다. 진관 스님은 법회에 오는 아이들을 위해 손수 차담거리를 마련해 나눠줄 만큼 어린이 포교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은 어린이법회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시절 많게는 1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동참할 만큼 어린이법회를 활성화시키는 결실로 이어졌고 나아가 본격적인 새싹포교 시대의 장을 여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1996년에는 고양시 행신동에 진관사 부설 보현정사 코끼리유치원을 건립, 새싹 포교의 전당을 마련했다. 코끼리유치원은 이후 지역 내 최고의 어린이 교육시설로 성장,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 오고 있다. 코끼리유치원은 어린이포교와 함께 교육을 통한 지역 사회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방의 군법당 건립 불사 및 경찰 법당 불상 모시기 등의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적극 동참, 후원했다. 포교와 전법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이라면 어느 사찰, 어느 단체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불교의 발전을 위한 진관 스님의 노력은 비구니 승단의 위상 강화와 수행환경 조성에서도 빛을 더했으니 전국비구니회가 그 결실이다. 1967년 종단 내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임인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전신)’가 교육, 수행, 포교, 복지 등 역량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실천과 후원을 목표로 창립되었다. 곧이어 진관 스님의 은사 인홍 스님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자 진관 스님은 그 뒷바라지에 전력을 기울였다. 지역적으로 서울에 위치해 있었던 진관사는 자연스럽게 우담바라회 활동 지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진관 스님은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비구니회관 건립이 중요 사업으로 부상하면서 1995년 수서지구에 위치한 회관 부지 매입 재정 마련에 힘을 보태는 한편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뜻과 힘을 모으는데도 전력을 기울였다. 1997년 인홍 스님이 입적한 후에도 뜻을 이어받아 마침내 2002년 전국비구니회관 개관이라는 현대 불교사의 큰 획을 그었다. 2003년까지 비구니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진관 스님의 원력이 전국비구니회의 위상을 끌어올린 밑거름이자 버팀목이 된 것이다.

불교를 위한 일, 큰스님들을 시봉하고 포교하는 일이라면 무엇 하나 두렵지 않고 아까울 것이 없는 진관 스님은 후학들에게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항상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남에게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어라. 모든 사람들을 갸륵하게 여겨야 한다. 보현행원품을 실천하는 것이 곧 복지다.”
후학들을 향한 진관 스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한량없는 자비심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일, 수행에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엄한 잣대를 세웠다. 발우를 펼 때마다 ‘중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과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는 수행을 모습을 통해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단 한 번도 새벽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예불이 끝난 후에도 아침 공양 전까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올바른 수행자의 자세를 실천으로 전해 주었다.  2006년 주지 소임을 상좌 계호 스님에게 물려준 후에도 회주로 주석하며 산문을 벗어나지 않은 스님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수행자의 사표가 되었다. 후학들은 이러한 스님의 모습 속에서 가늠할 수없는 신심의 깊이를 느끼는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며 올바른 수행자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도량 복원, 수륙재 재연, 비구니회 탄생, 포교와 전법 등 불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진관 스님의 일생은 부처님의 행원을 펼쳐 보이신 보현보살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런가하면 언론은 물론 어떤 매체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진 한 장 찍을 때에도 고개를 숙이며 하심하는 밀행존자와도 같은 모습은 오늘날 인천의 스승이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중생 곁에 있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등불과도 같았다.

진관사 측은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허투루 하지 않는 스님의 맑고 검소한 삶은 제자들과 신도들이 옷깃을 여미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진리의 법륜이 되고, 법우(法雨)가 되어 수많은 중생들에게 불성의 싹을 틔워주셨다”며 “평생 ‘보현행원품’을 수지독송하면서 진관사 대중들에게 ‘모든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평등하게 대하고, 부처님을 모시듯 기쁜 마음으로 제접하여 베풀고, 청정범행과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아 수행자다운 위의를 갖추어라’라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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