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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떠도는 돈황)

기자명 일지 스님

관념론의 열병을 앓고 난 뒤의 기록

《떠도는 돈황》의 부제는 `불교문학과 선으로 본 오늘의 불교인문주의'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불교인문주의(佛敎人文主義)'라는 용어를 항상 애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얼마나 반(反)인문주의적인 풍토에서 씌여진 책이기에 가히 인문주의의 정점인 불교가 스스로 인문주의임을 강변하고 있다니 아하, 그 얼마나 가슴쓰린 단어라는 말인가.

선과 화엄, 중국문학, 때로는 교계와 우리 사회의 현안들을 연속적인 과제인식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의 원고들은 주로 월간 <해인〉과 <불일회보〉의 연재를 위해서 씌여졌다. 이 글들을 한편 한편 써나가던 당시, 나는 갈수 없었던 저 감숙성 서부의 모래바다에 신기루처럼 떠 있을 푸르른 돈황을 항상 상상하고 있었다. 황량하기만한 심신으로 떠돌던 나는 그렇게나마 먼 곳의 푸르른 돈황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사태 직후였던 '80년 초반의 어느 해인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불교는 관념론이 아닌가?" 나는 "그래 맞다. 불교는 인류의 가장 완벽한 관념론이다. 그러나 그 관념론은 관념의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체적(解體的) 관렴론이다."라고 비스듬히 말해주었지만 상당히 우려스럽고 당황스러운 지적이었다. 신심이 부족한 탓만이라고는 돌릴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 사회과학에 압도당하고 있던 우리 연배들의 풍토에서 어떠한 형태든지 관념론은 곧 은폐의 논리였으며 실천론의 반대어(反對語)였다. 그래서 민중불교운동권의 숱한 팜플랫들은 `참여'와 `민중'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내게는 불교가 관념론이건 아니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상의 퍼즐게임 정도가 아니라 더욱 더 근본적으로 불교의 진실에 대한 폭넓은 탐구가 필요했으며, 또한 오만한 독서인으로서 나는 불교가 종교라는 대전제를 원칙으로 삼더라도 역사의 총체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와 전혀 무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계의 어떤 벗들은 불교를 당시 유행하던 역사유물주의의 시각으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사유와 대응이 바로 이 책에 실린 논문 <현대중공(現代中共)의 불교인식(佛敎認識)〉이다. 이글은 당시로서는 소름끼치는 이름의 출판사 즉, 중공의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책들을 읽다가 불온한 혐의로 안기분가, 어딘가의 사람들이 총무원의 교무부로 내사를 다니고 백차가 절로 급습한 아침, 나는 또 도망의 귀재(鬼才)답게유유히 탈출하는 곡예를 부리면서 씌여졌다. 책도 마음대로 읽어서는 안된다니 참 씁쓸한 일이었다.

나는 불교가 현실적인 당위를 지나치게 내재화시켜 버리는 관념론이라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불교유심론은 세상의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인한 정신의 단련과 창조적인 전망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선불교처럼 단호하고 치열한 유심론이 불교를 불교답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선과 경전, 문학의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관념론의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난 뒤의 기록이다. `떠도는 돈황'이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떠돈다는 것은 그저 막연한 표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서성거림이라면 그냥 그것으로 좋다.


일지 스님 (수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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