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분열, 편협한 시각, 옹졸함, 상대방의 조건을 맞추어주지 않으려는 고집, 타성.” 미국을 대표하는 노암 촘스키가 진보세력을 정조준 해 쏜 화살이다. 본디 탁월한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여든 살이 넘은 지금 이 순간까지 사회적 발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찍이 1966년에 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촘스키는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미국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 된 순간이다. 촘스키는 지배 권력만 비판하지 않았다. 진보진영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촘스키는 진보세력이 “편협한 시각에 집착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찬성하지 않
제 자신도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새로이 법조인이 되는 친구들에게 기회가 닿는다면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물론 자기 직업에 적응하기 바쁘고, 쫓기는 듯 바쁜 일정에 살짝 피하려 하기도 하지만 원대한 포부를 갖고 시작한 일인 만큼 귀찮게 여긴다 싶어도 반드시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정해놓은 틀에 생각을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과 항상 헌법과 기본권에 대한 고민과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다행히도 먼저 불교를 접해 이변(二邊), 즉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가 무엇일까 하는 중도사상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한 연유에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따라서 자기 범주에 빠져 상의·상관하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
휴가철을 맞아 밀물처럼 몰려왔던 관광객들이 빠져나가자 설악산이 다시 적적해졌다. 괜스레 바쁘고 쫓기던 마음도 가라앉고, 차분히 도량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출가한 뒤 여러 큰 절을 다니며 공부할 때, 노스님들께 도량을 어떻게 가꾸는가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게 아니라 그 분들의 평소 언행을 통해 배워나간 것이다. 노스님들은 그 어떤 작은 불사를 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여러 번을 생각한 뒤 실천에 옮기곤 했다. 포행을 나갔다 돌아오면서 다시 그 자리에 가보고, 며칠 뒤에 다시 또 그 자리에 가보기를 반복한 뒤 “이건 이렇게 했으면 좋겠네”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당시는 나이도 어리고 혈기도 넘쳤던 때라 그게 갑갑해보였지만, 훗날 그런 반복을 통해 이룬 불사는 도량의 원래 자리
지난 8월 14일부터 4박 5일 동안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사부대중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이 진행되었다. 무비, 혜국 스님 등이 법석의 인례자로 나서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부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토론방식의 열린법석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가볍지 않다. 특히 종단개혁을 해온 승려운동 조직이 94년 조계종 개혁종단 출범 이후 속(俗)화 되어버린 현실에서 금번 지리산 야단법석은 불교개혁을 열망하는 사부대중에게는 희망의 불씨로 느껴질 만하다. 무비 스님의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대한 성찰적 이해의 주장이나, 혜국 스님의 “간화선은 여러 가지 수행법 중에 하나다”라고 언급한 대목은 논란의 여부를 떠나 조계종의 변화를 위한 초석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다. 2009년 새해를 맞을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민주주의와 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두 대통령이 모두 세상을 뜨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새삼 생로병사의 굴레를 실감하는 오늘이다. 두 대통령의 서거를 보는 눈은 다양할 수 있다. 평가도 그렇다. 다만, 겨레의 미래를 위해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공통점에 눈 돌릴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서거 직전에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로부터 ‘독설’에 시달렸다. 대통령 시절 직접 돈을 챙겼다는 확인되지 않은 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퍼부은 신문들의 조롱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인격 살인’이 끝내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자살을 불러왔다는 진실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한세대 아니 불과 몇 년이 지나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부끄러운 생각만으로 가득차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한동안 사회 전체가 자본을 ‘자유’로만 여기는 천민자본주의에 열광하면서, 남보다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현혹돼 재화가 한도 끝도 없이 생긴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가 남보다 잘살면 그만큼 못살게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씨줄과 날줄처럼 정보망이 촘촘히 얽혀 서로를 환히 읽을 수 있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그러한 거짓된 성공 신화를 거르거나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이웃의 비범한 성공 신화에 열광하면서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내달려가면서 자본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에게 동조했습니다.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고도 경기회복
최근 몇 년 사이 수해를 많이 입은 강원도에 살다보니 ‘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 중 가장 오랫동안 사유하며 놀라워 한 것은 물이 자기 기억을 갖고 흘러간다는 점이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보면, 그 자리는 어김없이 예전에 물길이 나 있었던 곳이다. 물이 자기의 과거를 복원하며 세차게 흘러 그 앞을 가로막는 건물과 토지 등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물길 위에 지어진 집과 다리와 밭 등은 늘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자연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아직도 완전하게 복구되지 않은 강원도 동해안의 수해 피해지역을 둘러보면 ‘물의 기억’이 지닌 엄청난 힘과 파괴력을 새삼 느껴볼 수 있다. 물론 그 원인에는 순간의 안락과 안
격렬한 몸싸움 끝에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대리투표’, ‘재투표’의 논란과 함께 그 파장이 향후 우리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지 그 끝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지난 7개월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강행 처리되었지만 이명박 정권 집권이후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취한 정치행태의 행간을 읽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은 그 결과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계엄군을 연상시키는 촛불광장과 용산 철거민 현장에서 자행된 공권력의 대국민테러, 1950년대로 민주주의 시계를 돌린 조계사 앞 백색테러와 극우단체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파괴, 미네르바와 유모차 엄마들 44명에 대한 무더기 소환 등의 지난했던 현대사를 경험한 국민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을 ‘쇄신’하겠다며 자신 있게 내놓은 검찰총장 인사가 결국 망신으로 귀결됐다. 검찰총장으로 내정된 천성관 씨가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온갖 비리가 드러나 결국 사퇴했다. 사필귀정의 전형적 보기다. 처음 천성관 씨가 검찰총장으로 발탁되었을 때 대다수 언론이 ‘파격인사’라고 평가했다. 당시 신문들을 되짚어보면 ‘파격’의 실체를 간파할 수 있다. 청와대 대변인을 ‘배출’한 「동아일보」는 “천성관 후보자와 먼 혈연관계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측근” 또는 “권력기관의 고위 인사”가 천 씨를 천거했다고 분석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선택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논조가 정반대의 신문이지만, 천 씨의 검찰총장 내정에 대통령 의중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분석에는 일치했다.
중수부 검찰들의 ‘사악한’ 수사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며 분노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그 ‘표독한’ 수사의 배후에 정치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정황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나라에는 원망과 절망, 저주의 언어가 가득합니다. 봉은사에서 노 대통령을 위한 49재를 지낸다며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그 위에, “대한민국 검찰 중수부 소속 검사들은 봉은사 출입을 삼가주십시오”라는 글귀가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에 대해 명진 스님은 “부처님 말씀 중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이 있어요. 속된 것, 사악한 것을 버리고 올바른 것을 따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참된 길이 무엇인지 묻고 찾아야 합니다”라며
불교의 계율 중 첫째가 ‘살생하지 말라’이다. 이는 생명의 소중함을 표현하기 위한 강력한 메시지다. 이 세상에 존재되는 수만 종류의 생명체도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곧 삶은 생명체의 존재 이유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요, 남의 생명까지도 존중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통계에 의하면 자살로 인한 사망률이 심각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7년도 현재 15분마다 1명꼴로 자살을 시도하고 있고, 하루에 35명 정도가 자살하여 1년이면 1만 3000여명이 자살함으로써 자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라고 하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청소년과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40여년간 근대화, 산업화
불자로서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만든 책 가운데 한 권이 『상처 입은 치유자(Wonded Healer)』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 저자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심리치료학을 가르치고 있는 리처드 맨키비치 교수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 사회와 한 개인이 겪고 있는 여러 정신병리학적 증상들을 지적하면서 그것 때문에 생긴 상처와 아픔을 오히려 치유의 원천으로 바꾸어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동조하지 않으면 배타적 적개심으로 공격하는 자세가 난무하는 사회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출해 주었던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멸로 이끌기
“국민이 부처다” 참으로 신선한 법문이다. 귀가 번쩍 뜨였다. 불기2553(2009)년 6월15일 조계사 대웅전 앞. ‘이명박 정부의 참회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염원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 1447인 시국선언’이 천명한 말이다. 시국선언문은 “국민 위에 군림하며 비뚤어진 공권력에 의지해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집회 등의 자유를 유린해온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국가적 희망과 미래도 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시국선언을 놓고 숫자를 비교하기란 못난 짓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 750여명의 서명에 견주어 서명자가 2배에 이른 사실은 분명 음미해볼 진전이다. 1994년 종단개혁 이후 15년, 조계종 변화를 입증해준 선언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조계종의 달라진 모
봉하 마을 추모 대열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추모객들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황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고인의 미덕을 찬양하며 이른 죽음을 애달파 한다. 나는 또 다른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다. 대통령이 방문객들의 부름을 받아 나오면서 시작된, 반갑고 흥겹고 진지했던 봉하 이야기판의 사라짐에 대해서. 대통령이 퇴임하여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의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 많은 국민들이 감동했다. 참 따뜻한 모습이었다. 자전거에 손녀를 태우고 들판을 달리는 모습이 그랬고, 오리 농법으로 키운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을 운전하는 모습이 그랬다. 고향 강 습지를 되살리기 위해 쓰레기를 줍고 뒷산 장군차 밭의 풀을 뽑는 모습도 그랬다. 그중 가장 찬란한 순간은 봉하
21세기를 특징짓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지난 세기 세계를 이끌었던 서구중심의 문화로부터의 탈피가 심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개발과 물량위주로 인한 서구 근대정신의 폐해와 한계를 극복하여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류문명의 중심이 동양으로 옮겨 올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다. 자유분방한 사고와 시장원리를 최고의 가치로 발전해 왔던 서구의 물질위주의 사상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석학들은 21세기를 ‘환태평양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유구한 역사와 심오한 정신문화를 간직한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문명으로부터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줄 가치를 캐내고자 탐구해 오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어느 국가도 내놓을 수 없는 독특한 전통 문화를 찾는다면
경기도 양평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유림에 조성한 수목장림 ‘추모원’ 이 개장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수목장이란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지정된 수목의 밑이나 주위에 묻어 장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며, 수목장림은 이러한 수목장을 하기 위해 지정된 산림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수목장림은 숲을 아름답게 조성해 공원처럼 만들어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숲을 느끼고 숲속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돌아가신 망자(亡者)는 자연으로 돌아가 나무와 함께 상생을 하면서 자연회귀에 따르도록 한다는 것이 그 취지이며 의미라고 봅니다. 수목장림은 그렇기 때문에 묘지가 아닌 숲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신수사상과도 연결 지어 생각을 할 수 있어 전통성까지도 가지고 있기에 그 의미는 더욱 깊다고 봅니다. 또 그
“거룩하신 부처님! 부처님은 일찍이 나라 일이 잘 되려면 민족이 모여앉아 함께 의논하라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북과 남)의 사부대중은 오늘 부처님오신날에 이 나라 방방곡곡 사찰에서 일제히 봉축법회를 열고 통일의 서원을 발원합니다.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자면 겨레의 가슴마다에 통일의 환희를 안겨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변함없이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오신날.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법요식에서 발표된 공동발원문에 나오는 다짐이다. 남과 북에서 각각 공동법회를 여는 형식으로 발표된 공동발원문은 “우리 모두가 어엿한 통일보살”로 살아가자고 남과 북의 불자들에게 제안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남북관계가 시나브로 악화하는 데 있다. 공동발원문도 “지금은 비록 화해와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거듭 접하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기에 이르렀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자살을 충동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상황을 잠시 모면하고자 떠올린 실천력 희박한 단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결국 자살을 시도한 경우는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치명적 고통을 전제하는 것이다. 자살의 동기는 타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아 ‘의문사’로 남기도 했다. 관련 정보가 독점되는 군대에서의 자살은 더욱 그랬다. 그동안 군 당국이 자살로 몰아가려 했던 의문사가 타살이거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이었다는 사실이 군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하나둘 밝혀졌다. 그런 군 당국의 태도를 여성들의 죽음을
3박4일의 짧은 일정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 나가노현 우에다시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경로원과 연꽃마을과의 개호 기술향상과 인적 교류를 위한 실무 협약식에 참석하고 선진 시설을 견학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동경 나리타 공항에 내려 나가노로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일본의 봄 모습은 한국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약간 늦은 봄이라 벚꽃은 바람에 날리고 있지만 다른 봄꽃들은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며 이방인을 맞이한다. 시골 풍경은 우리와 다른 것이 없으나 논과 밭이 정연해 보이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튿날 6시부터 젠코지(善光寺)를 참배하기 위하여 서둘렀다. 몇 년 전에도 방문한 사찰이지만 이번에는 색다른 마음으로 참배를 결심 했으나 만만치가 않을 것 같다. 작년 10월에 kbs ‘백
이제 며칠만 지나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전국의 사찰들은 이 날을 기리고 축하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절집 안은 물론, 거리 곳곳마다 연등을 장식하며 조금은 멋지고 화려하게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자유와 책임의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그리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하여 의미 있고 보람 있는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은 사람이기에, 누군가의 말처럼 삶이란 그 무언가에 또는 그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 일입니다. 그 때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터득합니다. 하지만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