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③ 2)④ 3)① 4)② 5)④ 6)② 7)③ 8)만해스님, 용성스님 9)나란다 사원
‘골인’과 ‘깨달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엉뚱한 우문으로 말문을 연다. 이 시대 최고의 코드는 골인이다. 슛 골인의 함성이 천지에 자욱하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회로가 골인에 맞추어져 있다. 승리, 정복, 쟁취, 출세, 환희, 감격 등 모든 가치의 실현은 골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머리카락 하나 만큼의 차이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진다. 빠름, 속도전, 디지털이 그 가치를 획득하는 도구이다. 안타깝게도 깨달음의 길은 그 가치와 동반하지 못한다. 그것과 역행하는 노선을 만나야 도달할 수 있다. 법열은 골인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예보다 높은 것이기에 가부좌를 틀고 화두를 잡고 있다. 용화선원은 도심 사찰이다. 인천시 남구 주안동, 주변엔 아파트와 상가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수행의 입지로서
btn, 불우이웃 추천 받아 장애인 및 독거노인, 불치병 환자 등 도움이 필요한 불자와 신행단체를 결연해 후원금을 지원하는 btn‘자비의 천수천안’ 프로그램은 지속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한 불자를 추천 받는다. 이번에 선정된 불우이웃은 매달 일정액과 신행단체의 정기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02)3270-3451 플레시애니메이션 시상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은 1월 9일 조계사 극락전에서 불교문화콘텐츠 개발과 보급을 위한 사업 일환으로 실시한 ‘제1회 한국불교 플레시애니메이션’을 당선작 시상식을 가졌다. ‘제1회 한국불교 플래시애니메이션 공모전’ 최우수작은 장준희 씨의 ‘가슴속에 든 불법’으로 내용성, 창작성, 심미성, 독창성, 기술적 요소 등 5가지 분야로 평가한 결과 총 3
1975년 1월 13일 입적 전강(田岡) 영신 스님은 20대 초반에 개안(開眼)을 이루고 30대에 조실의 지위에 오른 현대 한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특히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스님 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찾아 직접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는가 하면 육조 혜능과 마조, 임제의 사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경허와 만공 스님 이후 선종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전강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나이 16세 되던 해인 1913년 유기 행상을 하다 만난 한 스님과의 인연에 의해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출가 이후 피나는 수행과 정진을 계속하던 스님은 도반이었던 사미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삶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 때부터 만공 스님으로
2월 15일. 40여년 이상을 수행정진해 온 한국 대표 선원장 스님들의 향훈을 조계사 법당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조계사가 주최하는 ‘한국 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대법회’〈표 참조〉는 15일부터 5월 9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총 13회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대법회의 취지는 ‘간화선 위기론의 해법 제시’와 ‘재가 신도들의 수행 고취’ ‘수행의 대중화’로써 한국선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다. 왼쪽 상단부터 고우 스님, 무여 스님, 혜국 스님, 대원 스님, 현웅 스님, 지환 스님. 선지식들의 생생한 ‘법문’ 2004년의 화두가 ‘수행’으로 떠오른 지금 한국 선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전국 30여 시민 선원에서 30
1966년 2월 7일 입적 화산 수옥 스님은 금룡(金龍)·혜옥(慧玉)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후대 비구니들의 지표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오늘날 비구니를 대표하는 니승이라면 대부분이 그의 제자라 할 정도로 비구니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비구니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해 평생을 후학 양성과 주력해 온 수옥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에 몸을 담았다. 스님은 그 해에 법희(法喜)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으며 다음 해에 비구 청월(淸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견성암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9세가 되던 해 전문강원이 있는 해인사를 찾아 고경화상(古鏡和尙) 밑에서 2년 동안 사집과를 수료했다. 28세 봄이 되던 해, 스님은 서
1940년 2월 24일 입적 용성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기 속에서 불교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명성을 날린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스님은 대각 운동을 펼쳐 침체된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작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또 3·1운동 당시 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 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도 최일선에 섰던 인물이다. 스님은 열여섯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수도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다시 해인사에서 출가를 한다. 해인사에서 승려로서 기본 소양을 배운 용성 스님은 이후 의령 고운사를 찾아 수월 스
1999년 2월 27일 입적 광덕 스님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용성, 동산, 소천 스님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대각 사상을 현실적으로 대중화 시켜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평생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으며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해 생활불교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한국대학 재학시절 한관섭 선생을 만나면서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 선방에서 처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처사의 신분으로 범어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광덕 스님은 1952년 당대 최고의
진보적 사상가이자 근현대 불교 개혁의 선봉에 섰던 대선사로 추앙 받던 만해 스님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었지만 조계종에서조차 대처승이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갖지 않거나 그나마 50∼60년대 태고종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만해 스님을 기리는 사업도 그 이후 맥을 잇지 못하고 퇴색되기도 했다. 그러나 70∼80년대 재야 학자 등을 중심으로 학술적 연구가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만해 스님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후 만해 스님에 관한 논문, 저술 등의 연구 성과물이 800여 편이 출간되는가하면 80년 만해사상연구회가 결성돼 스님의 불교, 문학,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과 업적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
수행우열 구분 경계…일념정진이 관건 체험담 전하며 마장 극복방안도 제시 책을 읽다보면 그 내용이나 구성이 쉽고 재미있어 술술 넘어가는 책이 있고, 딱딱하고 분석적이어서 한 장 넘기기가 힘겨운 것이 있다. 대개가 쉽고 술술 넘어가는 책들은 읽기는 좋으나 내용이 부실하여 다시 찾는 경우가 거의 없고, 딱딱한 책들은 비록 읽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내용성이 충실하고 심오한 경우가 많다. 두 종류의 책이 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읽기도 쉽고 내용도 충실한 경우일 것이다. 물론 이런 책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룡 큰스님의 책은 특별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60여 년이 넘는 큰스님의 탄탄한 수행이력이 뒷받침 된 것이기에 그 내용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