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학원이 역사왜곡하며 만해 선양 나선 이유는

  • 교계
  • 입력 2018.10.10 17:47
  • 수정 2018.10.11 13:54
  • 호수 1460
  • 댓글 5

김광식 교수, 정체성 관련 논문
선학원, 역대조사 선양 사업에서
만공 스님 배제, 만해 스님만 부각
‘조계종과 갈등’ 의도적 배제 의혹
선학원 주역은 수덕사 만공 스님
만해 스님 집중 부각은 몰역사성

재단법인 선학원은 지난 6월2일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준공식을 가졌다. 선학원은 기념관 1층에 만해 스님의 동상을 조성했다. 김광식 교수는 "정화불교, 정화운동의 근거처를 내세우는 선학원이 이미 결혼을 했으며, 불교근대화 차원에서 승려결혼의 자유론을 주장한 만해 스님을 선양하는 것은 선학원 정체성을 혼란케 한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선학원기관지 '불교저널' 보도 캡처.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 스님)이 조계종과의 ‘법인법 갈등’ 이후 선학원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역대 스님 선양사업에 있어서도 수덕사 만공 스님을 배제한 채 만해 스님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선학원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만해학회장인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선학원미래포럼(회장 자민 스님)이 10월2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는 ‘선학원 미래를 열다’ 주제 워크숍에 앞서 발표된 ‘선학원 정체성의 재인식-만공과 한용운, 계승의 문제’ 논문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는 “최근 선학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역사 및 이념의 작업을 유의해서 살피면 선학원 설립 및 운영의 핵심적인 인물인 수덕사 만공 스님에 대한 계승 및 선양은 찾아볼 수 없고, 반면 만해 스님에 대한 선양사업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며 “이는 선학원을 설립, 운영, 활동했던 스님들에 대한 계승인식 및 선양사업의 측면에서 보면 부적절하다”고 질타했다. 특히 김 교수는 “만해 스님에 대한 선양사업이 국가로부터 사업비를 지원 받기에 용이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선양사업에 있어) 만해 스님에 대한 비중이 높은 것은 오히려 선학원 역사의 본질과 정체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선학원의 정체성 훼손과 관련한 단적인 예로 선학원 100주년 기념관인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상량문에서 찾았다.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은 선학원이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기존 건물을 해체하고 그곳에 지하 4층, 지상 2층의 전통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정부 및 지자체, 자체예산 등 총 9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이 기념관은 2014년 11월 기공식 이후 4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 6월2일 준공됐다. 선학원은 준공에 앞서 2016년 8월18일 상량식을 진행해 선학원의 역사와 이념, 정체성을 참고할 수 있는 상량문도 봉안했다. 특히 선학원은 상량문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불교의 수호를 외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조사스님들이 있었으니 만해, 용성, 남전, 도봉, 석두, 만공, 성월 등의 명안종사들이었다. 이 조사스님들은 의로운 활동과 수행을 위하여 1921년 10월 지금 이곳에 작은 가람을 마련하니, 선학원이라 하였다”고 적었다. 또 “해방 후, 선학원은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민족불교를 계승하기 위해 정화불사를 주도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켰다”고 기록했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만해 스님을 선학원 설립조사로 포함시킨 것은 명백한 역사적 오류”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선학원은 1921년 8월10일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4일 상량식을 갖고, 그해 11월20일 준공됐다. 그러나 당시 만해 스님은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1921년 12월22일에서야 출옥했다. 때문에 김 교수는 “감옥에 수감 중이었는데 어떻게 선학원 건립 공사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 수감 중인 만해 스님을 찾아가 공사과정을 전하였고 이에 만해 스님이 동의해 주었다는 말인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서술”이라며 “만해 스님을 선학원 설립조사로 포함시킨 것은 명백한 역사적 오류”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또 “선학원 설립, 운영의 주역인 만공 스님을 설립조사의 후반부에 배열한 것도 상식에서 벗어난 역사왜곡”이라며 “민족불교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만해, 용성 스님과 함께 초반부에 배열하는 것이 순리”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선학원이 설립조사에서 만공 스님을 후반부에 배치한 것은 의도적이라는 의혹도 제기했다. 특히 김 교수는 “이런 배치는 최근 선학원과 수덕사간의 간월암 및 정혜사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재판을 진행하는 등 일련의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상량문에서 ‘선학원이 1962년 조계종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역사를 왜곡하고, 나아가서는 역사를 자의적으로 창조하는 몰역사성”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선학원에 주석한 스님들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의 등장에 기여하고, 선학원이 그 거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계종이 1962년에 창종된 것이 아니기에 ‘탄생시켰다’라는 것은 자의적 해석이다. 김 교수는 “대한불교조계종은 1954년 불교 조계종,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계승했고,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은 그 이전 불교종단을 계승했다”며 “선학원이 창건되던 1921년, 선리참구원이 법인으로 등장한 1934년에도 불교종단이 있었고, 그 종단을 계승한 것이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김 교수는 “현재 선학원이 조계종의 법인법에 동의하지 않고, 대립하는 현실이라고 해도 조계종단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선학원은)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선학원 건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수덕사 만공 스님은 1935년 조선불교선종 제1회 수좌대회를 개최한다. 사진 맨 앞줄 좌측에서 일곱번 째가 만공 스님. 출처 '한국불교 100년'(민족사)
선학원 건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수덕사 만공 스님은 1935년 조선불교선종 제1회 수좌대회를 개최한다. 사진 맨 앞줄 좌측에서 일곱번 째가 만공 스님. 출처 '한국불교 100년'(민족사)

김 교수는 또 ‘선학원과 만공’ ‘선학원과 만해’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료를 비교 제시하며 선학원이 설립조사로 우선 선양해야 할 대상은 만공 스님임을 역설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만공 스님은 △1921년 초 성월․용성 스님 등과 선학원 창건 논의 △선학원 건립 이후 선우공제회를 출범시켜 수도부 이사를 담당하고, 초기 재정이 어렵게 되자 정혜사 토지 6173평 기부 △직접 흙으로 불상을 빚어 선학원 법당에 봉안 △1934년~1946년 선학원 중앙선원의 조실을 맡아 선풍진작과 기반 강화에 착수 △1934년 12월 선학원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받을 무렵 수덕사와 정혜사의 재산을 기부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또 △1935년 3월 중앙선원 법당에서 수좌대회를 열어 “불교 부흥을 위해 선종을 흥성케 해야 한다”는 소신 피력 △1941년 중앙선원에서 ‘계율수호 및 불교정화’를 목적으로 열린 유교법회에서 증명법사로 나서는 등 중심부에 섰고, 이 법회에서 제기된 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조직체인 ‘범행단’ 출범 등도 주도했다.

김 교수는 “만공 스님은 선학원 창건과 운영, 재건, 활동, 정체성 구현 등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주역”이라며 “만공 스님과 선학원과의 연관성은 분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며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만해 스님은 1921년 12월 출옥한 뒤 유점사 포교당에서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 10년간 머물렀으며 이 기간 동안 선학원을 중심으로 민족운동, 불교활동, 계몽활동, 문학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만해 스님과 선학원의 연관성이 널리 홍보된 것은 사실이지만, 만해 스님은 1931년 이후 선학원을 떠났고, 서울 종로 청진동, 사직동에 방을 얻어 홀로지내면서 더 이상 선학원과 인연을 맺지 않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만해 스님은 1910년 5월, 9월 두 차례에 걸쳐 당국에 ‘승려결혼 자유론’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실제 만해 스님은 1933년 스스로 혼인을 하고 서울 성북동에 초가(심우장)를 얻어 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최근 선학원과 관련한 만해 스님 중심의 역사 재창조, 계승 작업은 심히 우려스럽다”며 “만해 스님이 선학원에서 민족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해 스님은 결혼을 했고, 승려결혼의 자유론을 주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화불교’ ‘정화운동의 근거처’라는 역사성을 내세우는 선학원과는 이질적이고 상충된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김 교수는 “선학원은 역사 및 이념의 정비에 있어서 만공 스님을 적절하게 강조해야 한다”며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선학원의 선양 사업은 의도적, 편의적, 몰역사의식에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