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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유물과 켜켜이 쌓인 세월, 온갖 사연들 가득 담긴 공간”

  • 무진등
  • 입력 2022.05.20 21:08
  • 수정 2022.05.23 11:19
  • 호수 1633
  • 댓글 3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

MZ세대 ‘힙한’ 공간된 국립경주박물관…“30년차 박물관맨” 노하우 담아 세련된 감각 더해
‘창령사터 오백나한’ 앙코르전 총괄…740개 스피커로 빌딩숲 연출, 49일만에 4만9천명 관람
은진미륵 위상 높이고자 불상연구 시작…민가에 방치된 통일신라 비로자나불 찾아내기도

국립경주박물관 내부. 석조사자상이 놓인 유리통창이 호텔 로비를 연상케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내부. 석조사자상이 놓인 유리통창이 호텔 로비를 연상케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이 MZ세대의 ‘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유리 진열장이 아니다. 호텔 로비를 연상케하는 환하고 세련된 장소. 유물은 진열장 바깥으로 나왔고, 큐레이터는 여기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다. 연회색 배경 벽에 걸린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부터 노오란 보름달 위아래로 전시된 당나라 양식의 신라 흙인형들까지…. 

당나라 양식의 신라 흙인형들. [국립경주박물관]
당나라 양식의 신라 흙인형들.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국립경주박물관]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건 지난해 11월 신설된 ‘불교사원실’. 국립박물관에 불교사원실이 따로 마련된 건 경주가 처음이다. 구층목탑이 있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사천왕사, 감은사, 흥륜사 등 신라 대표 사찰의 기와·전돌(벽돌)·조각상·불상·사리장엄구가 한 곳에 모였다. 사원실을 걷다보면 ‘신라인들이 염원한 불국토가 이런 것일까’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기와와 전돌로 전통 목조건축 분위기를 내고, 여기에 세련된 감수성이 더하니 박물관이 남녀노소에게 치유의 공간이 됐다. 물론 안전도 문제 없다. 규모 8.0의 지진에도 끄떡 없도록 바닥부터 천장까지 내진·면진 시스템을 구축했다. 진열장 유리는 가시광선 투과율이 99%에 가까운 저반사 유리로 전면 교체했다. 

지난해 11월 신설된 ‘불교사원실’. [국립경주박물관]
지난해 11월 신설된 ‘불교사원실’. [국립경주박물관]

올해 2월 문을 연 관내 카페 반응도 뜨겁다. 유리통창 너머로는 선도산 풍경이 펼쳐져 이미 “노을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 신라 미소를 담은 ‘수막새 마들렌’은 경주박물관에 와야 맛볼 수 있는 특화 메뉴가 됐다.  

‘힙’해지는 박물관이 새삼 궁금해진 건 이곳의 새로운 수장이 오백나한전 큐레이터였단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2019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창령사터 오백나한’ 앙코르전은 당시 “나 닮은 나한 찾기” 유행을 일으켰다. 49일 동안 다녀간 관람객만도 4만9천명.

최근엔 세계를 사로잡고 있단 소식도 들린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드니 파워하우스 특별전에 관람객 23만명이 다녀갔다고. 내년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제 불연(佛緣)은 새벽 일찍 쌀과 양초를 들고 사찰을 나서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맺어준 것”이라는 최선주 관장을 5월18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만났다. 뒤편으로 보이는 문화재는 관내에 설치된 성덕대왕신종(국보).
“제 불연(佛緣)은 새벽 일찍 쌀과 양초를 들고 사찰을 나서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맺어준 것”이라는 최선주 관장을 5월18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만났다. 뒤편으로 보이는 문화재는 관내에 설치된 성덕대왕신종(국보).

최선주(60)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당시 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이었다. 그는 “김승영 설치작가, 중앙박물관 디자이너와 함께 앙코르전을 준비하면서 대중들에게 산에서 나와 도시 일상을 성찰하는 나한이란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들은 각 나라에서 온 740여개 스피커를 천장까지 쌓아 ‘빌딩숲’을 만들었다. 빌딩숲에선 웅성이는 도시의 소음이 들리다가 이내 범종과 물방울의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스피커 사이론 나한상 29구를 배치해 어지럽혀진 귀와 마음을 씻는 범종과 물방울 소리가 마치 나한의 법어(法語)처럼 들리게 연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 ‘창령사지 오백나한’ 특별전(2019년 4월9일~6월16일)에서 전시된 740개 스피커와 나한상으로 만든 빌딩숲.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 ‘창령사지 오백나한’ 특별전(2019년 4월9일~6월16일)에서 전시된 740개 스피커와 나한상으로 만든 빌딩숲. [국립중앙박물관]

실제 관람객들은 말없이 빌딩 숲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러곤 전시장 한복판에 놓여 있던 먹물 수조를 탑돌이한 뒤 바깥으로 나갔다 소셜미디어에선 “소음이 잦아들 때 내 마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 “나한의 소박한 미소에 온종일 쌓인 피로가 사라졌다”는 후기가 쏟아졌다.

최 관장은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1월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발령 받았다. 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새로 건립될 때부터 참여해 교육팀장,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춘천박물관장, 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불교미술 전공 큐레이터다. 

2009년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팀이 구성됐을 땐 사업추진팀장을 맡아 전국 600여개 국·공·사립박물관과 미술관 협업 체계를 구성했다. 이듬해 어린이박물관이 생겼을 땐 초대팀장을 맡아 전시기획, 가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해 5월엔 그간 업무 성과를 인정 받아 ‘자랑스런 박물관상’을 받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되는 현장엔 그가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최 관장은 전문성과 리더십, 소신과 포용력을 두루 갖췄고, 다정다감한 성격 탓에 따르는 후배 학예직도 많다. 

최 관장이 불상을 전공하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 1982년 역사를 좋아하던 그는 별다른 고민없이 전남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이듬해 논산 관촉사로 간 첫 답사에서 ‘못난이’라 불리던 높이 18.12m의 큰 불상을 보게 됐다. 은진미륵이란 별칭으로 익숙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었다.

거대하기만 했지 조형미는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이었던 이 불상 앞에서 대학생이었던 그는 경외감이 들었다. 독특한 보개 장식과 위엄 있는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환희심이 올라왔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문화재청]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문화재청]

‘은진미륵의 누명을 벗겨야겠다.’ 최 관장은 답사에서 돌아온 뒤 전남문화연구회, 불교학생회에 들어갔다. 틈틈이 불적 답사를 다녔고 불상 보는 안목을 길렀다. 대학생 3학년 땐 전남문화연구회장을 맡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런 그는 홍익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다시 전남대 사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불상 전문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발표한 논문 ‘고려 전기 석조대불연구’(1992) ‘고려 초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연구’(2000) 등은 ‘은진미륵’을 향한 사명감에서 시작됐다. 최 관장은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이 옛 후백제 땅에 제왕의 권위를 세우고 중앙집권 기초를 다지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새롭게 해석했다.

그 덕에 2013년 한 연구에 ‘은진미륵’ 자문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이때 “보살상 눈은 까맣게 채색된 것이 아니라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조각해 끼워 넣은 것”이란 사실을 밝혀내 주목을 받았다. ‘은진미륵’이 고려 대표 석불로 달라진 대우를 받고, 2018년 국보로 승격된 것엔 최 관장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0년 11월 용산박물관 건립 현장으로 파견됐을 땐 “반가사유상만을 위한 독립 공간이 필요하다”고 소신있게 발언했다. 당시 최 관장 업무는 미술관과 아시아 전시 설계 검토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최고 걸작인 반가사유상이 불교조각실 한 켠에 배치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에서 본 ‘네페르티티 두상’이 떠올랐다. 50㎝크기의 유물 하나가 커다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 

당시 연구사였던 그는 연구관이던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불교조각 전공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반가사유상을 조각실 한 켠에 배치해 둔다면 역사적 죄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 관장도 독립 공간 필요성에 깊이 공감했다. 다들 “공사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제와서 이걸 어떻게 변경을 하느냐.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주변을 설득했다. 결국 최 관장이 “제가 설계변경 기안을 쓰고 절차도 밟겠다”고 끈질기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  

진구사터 석조비로자나불상. [문화재청]
진구사터 석조비로자나불상. [문화재청]

인법당(因法堂, 불당이 따로 없는 작은 절의 방에 불상을 모신 곳)에 놓여져 있던 통일신라 비로자나불도 최 관장의 애정어린 시선으로 찾아냈다. 1997년 그가 전북 임실의 옛 진구사터를 답사하다가 인법당 창고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마주한 것. 이미 법당 안엔 새로운 불상이 봉안돼 석조비로자나불은 목에 금이 간 채로 뒷 편에 놓여져 있었다. 

그는 1년 가까이 휴일마다 인법당을 찾았고, 연구조사 끝에 9세기 중엽 만들어진 통일신라 불상이란 것을 알아냈다. 그의 성과는 1998년 국립중앙박물관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발표됐고, 앞서 지정돼 있던 제짝 ‘석조대좌’를 찾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함께 지정됐다. 오지에 있던 부처님을 지켜낸 가피로 최 관장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된 것은 아닐까. 

어떤 무정물(無情物)이라도 손길이 머물고 세월의 더께가 차곡차곡 쌓이면 역사가 되고 정신이 된다.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안은 ‘유산’들은 옛 사람과 현대인을 교감토록 하고, 때론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무정물에 피가 돌고 생기를 불어넣으며 옛 가치를 되살리는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 그는 “박물관에는 유물과 그 유물이 지나온 시간들, 지극한 신심과 평화로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며 소리 없이 볼웃음을 지었다.

올해 2월 문을 연 관내 카페. [국립경주박물관]
올해 2월 문을 연 관내 카페.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33호 / 2022년 5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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