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방(정동) 흥천사가 전소되자 사을한(성북구) 흥천사가 왕실원찰로서 명맥을 계승했습니다. 때문에 흥천사명 동종이 새로 보관돼야 할 장소는 오늘날 흥천사입니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동국대 명예교수)이 최근 ‘흥천사의 역사와 흥천사 대종의 귀환’을 발표하며 “조선 왕실이 발원해 1462년 최고의 장인들이 제작한 불교문화재 흥천사명 동종이 유랑을 거듭하며 제 가치를 잃고 있다”면서 “이제 흥천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7년 조성된 절이다. 당시에는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오늘날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기에 흥천사의 터도 정동으로 정해졌다.
‘흥천사명 동종’은 흥천사가 생긴 지 65년 뒤인 1462년 세조가 만들었다. 높이 282㎝, 입지름 171.2㎝, 두께 29.6㎝의 거대한 크기로, 종의 명문은 한계희가 짓고 정란종이 썼다.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세조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사리분신이라는 상서로운 일을 기념하고자 조성했다.
조선 억불정책에도 도심에 건재하던 흥천사는 연산군 10년(1504)과 중종 5년(1510) 때 연거푸 화재를 입으면서 모든 건물이 전소됐다. 집 잃은 흥천사명 동종도 한동안 방치됐다가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조선 후기부터는 경복궁 광화문에 걸렸지만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됐던 일제가 동종을 이왕가박물관의 전시품으로 편입시키면서 1910년 창경궁에 전시됐다. 또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1938년 동종도 다시 옮겨졌다. 이후 오랜 기간 물시계 ‘자격루’(국보)와 함께 덕수궁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18년 6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복원과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흥천사명 동종의 보존처리는 올해 12월 마무리된다고 한다. 하지만 보수가 끝난 뒤가 문제다. 보관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흥천사명 동종을 아무런 연관도 없는 덕수궁에 전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동 흥천사도 전소돼 제자리라고 할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문 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정면 반박한다. 정동 흥천사의 명맥을 성북구 신흥사(현재 흥천사)가 계승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종이 만들어진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궁을 전전할 게 아니라 오늘날 흥천사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흥천사는 정릉이 도성 바깥으로 이전되면서 조성됐다. 경복궁 인근 황화방에 있던 정릉이 태종 때 사을한으로 옮겨지면서 새로운 흥천사로 생겨났다. 이 흥천사는 기존의 흥천사와 구분하기 위해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신흥사가 생겨난 1409년부터 기존 흥천사가 전소된 1510년까지 도성 안팎으로는 각각의 흥천사가 있었다. 100여년 동안 신흥사는 능침사원 역할을, 흥천사는 왕실사원 기능을 했다. 하지만 1510년 정동 흥천사가 불타면서 성북구 신흥사만 남아 있게 됐다.
문 교수는 “정동 흥천사가 전소되면서 성북구 흥천사가 왕실원찰 명맥을 이어갔다”면서 “흥천사 전각·불상·불화 대부분이 왕실 시주로 조성됐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신흥사의 사격은 조금씩 높아졌다. 현종 10년(1669) 송시열의 건의로 신덕왕후릉이 후비릉에서 왕후릉으로 복위되면서 능침사원이던 신흥사 규모도 커졌고, 정조 18년(1794)에는 왕실원찰로서 위상을 되살리고자 한 차례 더 중창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칠성각(1846)·적조암(1849)·극락보전(1853)·명부전(1855)·대방(1865) 등의 불사가 지속됐다.
순조 32년(1832) 조성된 ‘흥천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보물)는 왕비, 효명세자의 부인과 빈궁, 세존(후에 헌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제작됐다. 시주에는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정조의 딸 숙선옹주, 순조의 딸 명온·복온·덕온 공주 등 왕실 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고종 2년(1865)에는 흥선대원군이 H자형의 대방을 완성하고자 앞장섰다. 이때 흥천사라는 본래 이름도 되찾았다. 대원군은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흥천사’를 써 현판에 달았고 현판은 현재까지 대방에 걸려 있다. 문 교수는 “대원군이 사찰 이름을 흥천사로 복원한 건 성북구 흥천사가 왕실사원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흥천사와 왕실의 인연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5살 때 흥천사를 방문해 글씨를 남겼고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귀비 엄씨는 고종 36년(1899) 시주를 통해 극락보전과 독성각 중창을 도왔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조선왕조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흥천사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문 교수는 “흥천사 명맥을 잇는 장소가 명백히 있음에도 흥천사명 동종이 여러 궁을 유랑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동종이 조성된 취지를 살리려면 이미 여법한 보존 환경을 갖추고 있는 흥천사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38호 / 2022년 6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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